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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가을은 소리 없이 왔다가 소리 없이 사라집니다. 언제 왔는지 기척조차 없다가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면 겨울이 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길 위에 서면 가을이 듬뿍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길 위를 서성거리나 봅니다.

 

지난 9일, 가을을 찾아 문경새재로 떠났습니다. 아, 가을은 거기에서 주춤거리면서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흐드러진 가을의 그림자를 밟으며 문경새재에서 수안보까지 걸었습니다. 오전 나절에는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지만 오후에는 맑게 개었습니다. 걷기 좋은 날이었지요. 이날 걸은 거리는 22km 남짓. 이번 도보여행은 걷기모임 '나를 찾아 길 떠나는 도보여행' 회원들과 함께 했습니다.

 

오전 7시 20분에 동서울터미널을 출발한 고속버스가 문경에 도착한 것은 9시 30분. 생각보다 문경은 가까웠습니다. 도보여행은 문경 버스터미널부터 시작됩니다. 이곳부터 문경새재 입구까지는 삼십 분 남짓 걸립니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자동차도로를 따라 걸어야 하므로 조심해야겠지요?

 

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 집에서 감을 말리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채 따지 않은 감이 잔뜩 매달린 감나무도 여러 그루 있습니다. 가던 길 접고 감이나 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이 달려 있네요.

 

 

30분 남짓 걸으니 문경새재 현판이 달린 문이 나옵니다. 문, 엄청나게 큽니다. 4차선도로를 꽉 채우고 있네요.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문경새재 도립공원 안으로 들어설 때쯤 되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냥 맞기에는 빗줄기가 너무 굵어 비옷을 꺼내 입어야 할 정도입니다. 덕분에 1회용 비옷이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다행히 비는 그리 오래 내리지 않았습니다. 땅을 촉촉이 적셔주고 그쳤지요.

 

길을 따라 걷다보니 사과나무가 보입니다. 과수원에서 사과 따기가 한창입니다. 종이상자에 담긴 사과들, 참 맛있어 보입니다. 문경은 사과가 유명하답니다. 사과 옆에는 대봉이 담긴 종이상자가 놓여 있습니다. 잘 익은 사과와 감을 보니 가을이라는 실감이 더 납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니까요.

 

새재매표소를 지나 안으로 들어갑니다. 매표소는 있으나 무료입니다. 그냥 안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문경새재 옛길은 흙길이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걷기 좋은 길이지요. 길옆으로 나무들이 길게 이어서 있습니다. 알록달록한 나뭇잎을 매달고 있는 나무들의 자태는 아름답습니다.

 

이 날, 새재 길에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가을을 만끽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올해 단풍이 그다지 예쁘지 않다는 입소문이 널리 퍼졌는데 새재는 그렇지 않습니다. 단풍이 곱네요. 물론 일부는 나뭇잎이 채 물들기 전에 말라버린 것도 있지만 이 정도라면 감탄사가 아깝지 않습니다. 눈이 호사를 한다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요.

 

 

예전에 문경새재 옛길을 따라 과거를 보러 갔던 모양입니다. 커다란 돌에 문경새재 과거길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새재가 옛날에는 엄청나게 험한 고개였다고 합니다.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라는 의미로 새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양으로 괴나리봇짐 하나 짊어지고 과거를 보러 떠나는 양반네가 떠오릅니다. 과거에 급제해서 금의환향하면 좋건만 그리 올라간 사람들 가운에 소수만이 그런 영광을 누렸겠지요. 낙방한 사람들은 이 길을 다시 밟아 고향으로 돌아갔을 테고.

 

그 길을 걷습니다. 너른 길을 지나다보니 길옆으로 작은 길이 보입니다. '영남대로 옛과거길'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습니다. 돌계단 옆에 붉은 단풍이 화사합니다. 그 길을 성큼성큼 걸어갑니다. 길 위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습니다. 발밑에서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하지만 소리가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아침나절에 촉촉하게 내린 비 때문이지요.

 

조곡관을 지나니 한시(漢詩)가 새겨진 돌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냅니다. 시를 만났으니 시를 읊어줘야 도리가 아닐까요? 그래서 잠시 멈춰 서서 옛 사람들이 지은 시를 소리 내어 읽습니다. 새재의 풍광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마음을 울렸던 모양입니다.

 

 

이 길에 들어서면 한 번쯤은 멈춰 서서 옛 사람들의 시를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네 삶이 아무리 팍팍하다한들 시 한 편 읽을 여유마저 없는 건 아닐 테니까요.

 

3관문인 조령관을 향해 걷는데 '상처난 소나무'가 눈길을 잡아끕니다. 일제말기에 자원이 부족해진 일본군이 한국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해서 송진을 채취한 자국이라고 합니다. V자로 새겨졌던 상처는 60년이 지난 지금도 아물지 않고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세월이 모든 상처를 다 치유해주는 것은 아니지요.

 

장원급제길도 지나고, 책바위도 지나 조령관에 도착합니다. 조령관을 넘으면 충청도입니다. 충북 괴산군 연풍면이지요. 이곳 단풍이 새재 단풍보다 더 색깔이 선명하고 아름답습니다. 감탄사가 나오는 거야 당연한 것이고, 쉽게 눈을 떼지 못합니다.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조령산 휴양림을 지나 산을 내려갑니다. 조령산을 내려와 마을길로 접어듭니다. 마을에도 가을이 한창입니다. 채 따지 않은 감이 매달려 있는 감나무와 논 위에 세워진 볏집, 말리려고 내놓은 고추, 가을은 이곳에서도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이곳을 봐도 가을, 저곳을 봐도 가을입니다. 도시에서 사라진 가을이 이곳에서는 지천입니다.

 

어디선가 나무를 태우는 냄새가 납니다. 낙엽을 태우는 냄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구수한 냄새는 바람을 따라 도로 위로 흩어집니다. 가을이 흩어지는 것이겠지요.

 

마을을 지나 자동차 도로를 따라 걸어 수안보에 도착합니다. 얼추 6시간쯤 걸었습니다. 걸은 거리는 22km 남짓. 수안보 버스터미널에서 이번 도보여행은 마무리됩니다. 버스를 기다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거기에도 가을이 걸려 있습니다.

 

아직 가을은 이 땅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번 주말 문경새재 옛길을 걸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채 떠나지 않은 가을의 긴 그림자를 만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태그:#문경새재, #도보여행, #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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