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2월 1일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이 어느새 60년이 됐습니다. 그동안 개정, 폐지 등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국가보안법은 아직까지 건재합니다. 국가보안법은 과연 우리들에게 무엇일까요. 국가보안법이란 이름 아래 족쇄가 채워졌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편집자말] |
1948년에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이하 국보법)이 12월 1일, 60살이 됐다. 이를 며칠 앞둔 11월 28일, 국보법으로 두 번이나 옥살이를 한 양홍관(49)을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서 만났다.
양씨는 요즘 그가 참여하고 있는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의 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사진 한 장 찍자고 했더니, 문익환 목사 묘소 앞으로 이끈다.
언덕 중간쯤에 소박하게 모셔진 문익환 목사 묘소 아래로 누운 민주열사들의 묘역이 무수하다. 끈질기게 이어온 국보법만큼이나 그 고초와 신산도 하염없다.
다음은 양홍관씨와 나눈 일문일답.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간첩 혐의를 받을 수 있다"- 국보법으로 처음 옥살이를 한 것이 언제인가."1988년 '반미청년회' 사건이다. 당시 동국대 4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식을 하루 앞두고, 부정선거와 군사독재에 항의하여 미국 문화원에 무단 진입한 것과, 대한항공 격추사건과 관련한 대자보를 부착한 혐의로 공안기관에 체포되었다. 반국가 단체 구성 및 지도적 임무수행이라는 어마어마한 죄목이 내걸렸다.
당시 반국가단체 관련 사건은 경찰이 아닌 공안 기관에서 담당하는데, 그곳에 21일간 붙들려 있었다. 나흘 동안 잠을 안 재우는 등 가혹행위로 일관된 심문 끝에 최소한 7년 이상 징역이라는 위협을 받았다. 반미청년회가 북의 지령에 따라 조직된 단체이며, 주체사상에 따라 획책한 일이라는 혐의로 검찰로 넘겨졌다. 검찰은 7년을 구형하였고, 1심 재판 결과, 1년 6개월 징역, 집행유예 2년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노태우 대통령 취임 이후 이어진 정치적 유화책에 따라 그 후 사면 복권이 되었다."
- 7년형에서 집행유예 2년, 그리고 사면으로 이어진 양형의 굴곡이 지나치게 가파르다."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이 정상적인 법률이라기보다는, 실체적 진실과 관계없이 정치적으로 마음대로 운용되는 탈법적 조치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일이다."
- 그 후, 다시 국보법 위반 혐의를 받게 되는데?"1992년에 '민족해방애국전선' 사건으로 구속됐다. 역시 처음부터 공안 기관으로 잡혀갔다. 죄목은 반국가단체 조직, 지도적 임무 수행에 간첩죄가 추가되었다. 간첩죄는 생각도 못했다. 간첩 혐의라는 것이 '하부성원에게 내부 학습을 위해 자료 목록을 작성해 보라고 지시하였고, 하부에 의해 제출된 자료목록을 검토하여 일부는 보관하고, 일부는 폐기하거나 반환한 사실'이란 것이다.
그 자료 목록이란 것이 신입회원 교육에 필요한 커리큘럼을 짜기 위해 당시 역사서나 사회과학서 가운데 읽을 만한 도서 목록이었는데, 그걸 뽑아보게 한 일이 간첩 혐의가 되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간첩이란 특별하고 두려운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내가 간첩이라는 혐의를 받고 보니 황당했다. 그런 혐의를 받고, 그를 자인하도록 혹독한 심문과 가혹행위를 받고 보니, 간첩이 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이라면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간첩 혐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 당시 판결문을 보면, '민족해방애국전선'은 북의 지령에 따라 결성한 '조선로동당 중부지역당'의 위장이라는 내용이 있는데?"그런 명칭은 공안 기관에서 심문을 받을 때 처음 들었다. (공안기관에서는) 그런 혐의를 계속 주장했지만 1심에서는 인정이 되지 않아 '민족해방애국전선'이라는 명칭만으로 재판이 진행되었다. '조선로동당 중부지역당'이라는 명칭은 뒤늦게 2심부터 등장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공안 기관의 집요한 주장에 따라 바뀐 조직 명칭에도, 2심의 판결은 1심과 동일했다.
이 판결을 보아도 당시 국보법이라는 것이 기준이나 원칙도 없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법이란 구체적 범법행위에 따라 적용되어야 하나, 정치적 의도와 목적에 따라 조작되고, 지나치게 포괄적이어서 이현령 비현령(耳懸鈴鼻懸鈴)으로 악용되는 폐단이 많았다. 대법원의 확정 판결에 따라 복역 중, 1998년 8월 15일 가석방조치로 풀려났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주화 운동자에 대한 복권 조치의 일환이었다."
"지금도 솔직히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는 기분이다"
양홍관은 누구인가? |
전대협 1기 동국대 대표. 반미청년회 사건, 민족해방애국전선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복역.
현재 생명평화 결사 기획조정위원장, 생명살림 마음문화원 이사장, 민노당 생태공동체 사회를 위한 환경위원장을 맡아 주로 생명과 평화, 협동과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 활동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생명, 꽃 피어나는 소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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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석방에 대한 특별한 조건은 없었나."7년 이상 복역하면 장기수로 보는데, 전향서를 요구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비전향 장기수인 셈이었다. 조작된 혐의에 따라 복역 중이었던 나는 전향서를 쓴다는 것은 죄를 인정하는 것이기에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에 들어오면서) 앞으로 대한민국 법을 성실히 지키겠다는 '준법서약서'로 바뀌어 이를 수용하였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법을 성실히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가석방 조치를 하려면 평가위원회의 심사를 받게 되어 있는데, 그곳에서 '국보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애국인사들이 탄압받는 법으로 폐지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국보법 폐지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라고 답했다."
- 가석방 된 뒤에 사회생활에서 국보법으로 인한 어려움은 없었는가."가석방 상태였으므로 사회활동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 정치활동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취업도 불가능했다. 옥중에서 깨달은 생명, 평화 사상을 바탕으로, 생태환경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팔당유기농에 참여하여 유기농을 기반으로 한 지역운동에 치중하였다. 그러다가 2003년 4월,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면 복권되었다. 법률적으로는 어떤 제약이나 불이익도 받지 않게 된 셈이다."
- 법률적인 사항 이외의 제약은 없었는가."국보법은 한 사람의 사상을 수시로 심사하고 평가한다는 게 문제다. 가석방 당시의 감시나 신고의무 등은 물론이고, 사면 복권 이후에도 스스로 내 행동에 대한 자기 검열의 강박증에 시달렸다. 지금도 솔직히 누군가에게 감시를 당하는 기분이다. 휴대폰 신호가 울리자마자 끊어지는 경우, 누군가 내 소재지를 아직도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지난날 여러 가지 모함과 조작으로 받은 피해 탓에 지금도 사진을 찍거나, 기록을 남기는 일에 부담을 느낀다. 정치적 활동에도 여전히 부담을 느낀다."
- 시장 선거에 나선 적이 있던데?"2006년 남양주시장 선거에 후보로 나갔다. 사면복권이 된 상태라 법률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으나, 선거 운동 기간 중에 적잖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공식적으로 내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다른 후보 측에서 나를 '빨갱이'라고 비난한다는 말도 들었다. 어느 군인단체에서 군 수사기관에 내 사상을 수사하여 달라고 투서한 일도 있었다."
- 국보법이 종종 일상적인 사법절차를 벗어나 탈법행위를 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사실 국보법에서 다루는 대다수 죄목들이 형법에도 있다. 그럼에도 국보법이라는 특별한 법을 만들어 특정대상을 특별히 제재하는 수단으로 삼는 과정에서 그런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인다. 당시 국보법 위반자는 형식상 어느 경찰서에 구금 중인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공안 기관에 넘겨져 24시간 철저한 감시와 심문을 받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변호인의 접견이 제한되거나, 위축될 수 있으며 고문과 같은 가혹행위가 자행되기도 한다."
"고문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고문이다"- 공안 기관에서 성고문을 당한 일이 논란된 적이 있는데?"당시 공안 기관에 근무하던 이에게 성기를 자로 맞는 성적 가혹행위를 당한 적이 있어 이를 문제 제기했다. 그 당사자로 지목된 모 의원(당시 직책)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여 검찰에 나가 수차례 조사를 받았다. 조사 과정에서 나는 당시 내 아내에게 쓴 편지 가운데 성고문을 당한 것을 알린 사실이 있으며, 복역 중 고문 사실을 고발한 일이 있고, 당시 변호사에게도 그런 사실을 알려 이것이 접견 기록부에도 남아 있다는 점을 들어, 돌발적인 문제 제기가 아니라 오래전에 제기된 사실임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검찰로부터 무혐의 판정을 받았다."
- 이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할 생각은 없는가."고문을 겪은 사람에게는 '고문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고문'이다. 지금도 그때 겪은 고문의 괴로움이 악몽처럼 남아 작은 통증에도 유난히 민감하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공방을 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당시에 고문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히 입증된 사실인지라 다시 괴로움을 감수하며 (이 문제를) 새삼 제기할 필요성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다만 내가 겪은 성고문의 문제는 이번 검찰의 명예훼손 무혐의 판정으로 명백해졌다고 생각한다. 40일간의 고문, 7년간의 복역, 6년여의 감시 기간은 내게 심각한 후유증과 피해를 주었지만, 이를 법률적으로 풀기보다는 그동안 내가 힘써 온 생명과 평화, 협동과 사랑의 운동으로 초월하고 싶다."
- 국보법의 존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국가 안보나 국민의 안위를 지키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중요한 일이 국보법으로 인해 오히려 무력해지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 지난날 국보법이 정권 유지나 독재 권력을 위해 악용되어 국가 안보와 국민의 안위를 오히려 위협한다는 인식이 적지 않다. 국가안보를 걱정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지금의 국보법을 폐지하고, 국민들이 국가안전과 보위에 필요한 내용을 국민적 합의를 통해 검토하여, 필요하다면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새 법이 아니라) 기존 형법의 테두리에서 다뤄지는 것도 (국민적 합의가 된다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시대가 변하였지만 여전히 국보법이 남아 있다. "국가안보를 위한 법이라면 국보법은 (국가를 위협하는) 모든 국가를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현행의 국보법은 북한을 적국화하고, 북한이라는 특정국가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로 인해 남북관계의 변화와 같은 시대적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남북교류협력법 등에서는 북을 교류와 협력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현실에서 잠입 탈출, 회합, 통신의 금지에 관한 국보법의 법조문은 시대착오적인 유산으로 지적되고 있다."
- 현 시점에서 국보법 존폐에 대한 국민투표를 한다면 결과를 어떻게 예상하나."어려운 질문이다. 50 대 50.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다고 본다. 국민들에게 국보법이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설득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국보법 폐지가 어렵지 않을까? 그러나 현 정부는 그럴 여유도 없고, 의지도 없어 보인다. 국민들도 경제 위기 상황에서 국보법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기 어려울 것이다. 경제가 안정되고, 통일 문제가 대두될 시기에 냉정하면서도 성숙한 단계에서 논의될 필요가 있겠다. 다만 이런 논의는 통일문제와 연관되는 것이 바람직하며, 북미관계나 통일관계 등과 함께 성숙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대담을 마치고 양홍관은 하남에서 열린다는 청소년 공부방 후원을 위한 일일찻집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분주한 걸음을 옮겼다. 멀어져가는 그를 보며,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기억을 되살리게 한 오늘의 자리가 미안했다. 부디 지난 악몽을 잊고 생명과 평화의 마음으로 건강한 삶을 일궈 나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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