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일차] 걸은 거리 팜플로나 - 푸엔테 데 레이나 25.4km
난생 처음 지평선을 보았다. 길은 경이롭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아름다운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신작로다. 스페인처럼 땅이 넒은 나라이기에 지평선이라는 게 있는 것일 게다. 우리나라처럼 좁은 땅에서는 가히 보기 어렵다.
산티아고 길을 걷는 것은 때론 외롭고 쓸쓸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길을 걷다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외국인 친구들을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되지도 않는 언어를 구사하면서 손짓 발짓까지 동원해 농담을 주고받게 된다. 그러면 외로움은 어느 사이엔가 사라지고 즐겁게 걷게 된다.
끝이 보이지 않게 뻗어 있는 길을 홀로 걸으면 마음은 더 없이 평화로워지기도 하고,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가 어느 순간 하얗게 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무념무상의 상태가 되기도 한다. 버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비워야 할 것을 갖지 않은 사람처럼 홀가분해지는 것이다.
언젠가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삶은 아무것도 가지고 싶은 것이 없고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고,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다. 또 어느 곳에도 가고 싶지 않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게 되었다. 물기가 다 빠진 풀처럼 가벼워진 마음이다. 참 좋다.' 나는 가지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일, 기다리는 것,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던가.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와 뜨거워져 오는 발바닥의 고통, 근육이 당기는 다리의 아픔만 느껴질 뿐,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고 마음은 더 없이 홀가분해져서 참 좋다.
해발 750미터인 페르돈 언덕에서 병사들을 만난다. 쇠로 만들어진 병사들이 바람 속에 서 있다. 이곳에는 산 능선을 빙 둘러 풍력발전기가 서 있다. 바람이 장난이 아니게 분다. 그 옛날 이 고개에서 전쟁을 할 때처럼 동상이나 조각들이 세찬 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면서 서 있는 것이다.
이런 곳을 복음을 전파하면서 지나갔을 당시의 사람을 생각한다. 어디서 자고, 어떻게 먹거리를 해결했을까? 지금은 사람들이 저녁이면 시설이 좋든 나쁘든 숙소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침대에서 잠을 청할 수 있지 않나. 음식은 해먹기 싫으면 레스토랑에서 사먹을 수 있으니, 지금 걷는 이 순례 길을 고행이라고 할 수는 없으리라. 휴가를 보내는 여행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느 알베르게에서인가 벽에 신문을 스크랩 해둔 것을 보았다. '순례를 하는 사람들이 과연 여행객인가, 순례자들인가' 하는 제목이었다. 산티아고에서 스페인의 청춘 남녀들은 삼삼오오 떼로 몰려다니면서 저녁이면 술집을 전전하면서 밤늦도록 떠들고 다닌다고 했다. 그들은 스페인에서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주 적은 돈으로 산티아고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떠들썩함 때문에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 문제를 지적한 신문기사였던 것이다.
이들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돈을 들여 산티아고를 찾아온 사람들을 위해 조금만 배려하고 양보를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이 느껴진다. 그렇게 된다면 함께 어울리는 행복한 순례의 길이 되지 않을까?
길 가에 서 있는 성모마리아 상이다. 개인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산티아고를 꼭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특히 천주교 신자들은 정말 가봐야 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모 마리아상 아래 한국인 아가씨가 예쁜 글씨로 엽서에 기도문을 써서 두고 갔다. 아마도 성모 마리아에게 할 말이 많은가 보다. 메일 주소도 적혀 있다.
순례자들의 무덤이 보인다. 벨기에 사람 무덤이라고 적혀 있다.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병원이나 침대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기 보다는 길을 걷다가 가겠노라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이 길을 걸었다고 한다.
80이 넘은 프랑스 할머니가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얼굴이 마치 선녀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환하고 밝은 미소를 얼굴에 가득 띄운 채 길을 걷고 계셨다. 나보다 더 건강해 보이신다.
산티아고 순례 길은 마을이나 성당을 지나가게 이어져 있다. 그 옛날, 복음을 전파한 성 야곱이 지나간 길을 그대로 보존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종교를 사람들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으므로 항상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지나가게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마을도 모습이 다 다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사는 예쁜 마을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이 떠나버려 마치 폐허가 된 것처럼 보이는 곳도 많다. 중간 중간 집을 판다거나 세를 놓는다는 벽보가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서두르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가게들도 낮잠 자는 시간에는 철저하게 문을 닫는데 가게마다 호객행위를 하기는커녕 들어가서 눈으로 구경만 하고 나와도 싫은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느긋해 보인다. 약국도 문을 닫고, 알베르게도 한 시 이전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
아마도 이 길을 지나간 성 야곱의 모습을 만들어 세운 것인가 보다. 나무 지팡이에 조롱박을 매달고 허름한 도포를 입고 가진 것이라고는 모자 하나 뿐인 모습, 인상적이다. 예술가들의 섬세한 조각품보다 더 잘 만들어진 예술품처럼 보인다, 내 눈에는.
공립 알베르게다. 알베르게들은 봉사활동을 하는 호스피탈레로(산티아고 길을 다 걸은 순례자들에게는 자원봉사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준다)나 사설 알베르게 주인들의 특성 때문에 저마다 특징이 있다. 어떤 숙소는 더 없이 따뜻하고 편안한데 반해 어떤 곳은 강압적인 자세로 순례자들을 대하기도 한다. 친절한 호스피탈레로를 만나면 그날 걸으면서 쌓인 피로가 깨끗이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되기도 한다.
사람이 많이 사는 큰 도시의 알베르게는 신축된 건물이 많아서 시설도 좋고 규모도 크지만 오래된 작은 마을의 알베르게들 중에는 마구간이나 헛간을 고쳐서 사용하는 곳들이 있다. 그런 경우 느낌이 별로 안 좋기도 하다.
그래도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할 수 있고, 빨래도 하고 커피라도 끓여 마실 수 있으니 감지덕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산티아고 길은 특성상 또는 우리와 전혀 다른 문화적 특성으로 밤에 걷기에는 다소 무리인지라 노을을 보면서 걷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다. 하지만 새벽 일출을 보면서 걷는 것은 매일 가능한지라 이른 아침에 숙소를 나서서 한 삼십 분쯤 걸으면 아침 해가 솟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성당이 있는 마을의 새벽길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 일출을 보기도 한다. 하늘을 사진기에 담으려면 어김없이 전봇대가 함께 들어오는 한국의 마을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레이나의 알베르게는 공립이었고, 숙박비는 5유로였다. 사설 알베르게는 마을 입구에 있는데 6유로.
마을의 가게에서 신라면을 발견했다. 1개당 값은 1.9유로. 너무 반가운 나머지 2개를 사서 끓여 혼자 다 먹어버렸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한국음식(?)인지. 내가 먹는 음식을 누가 달라고 할까봐 조마조마 하면서 먹은 것은 군대생활 이후로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 맛이 별로 없었다. 왜 그럴까? 이날 이후, 산티아고 길을 끝까지 걸을 때까지 다시는 라면을 먹지 않았다.
산티아고 길이 부러웠던 이유 중의 하나는 순례자들을 위한 수도 시설이었다. 크고 작은 마을 입구에는 순례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수도 시설이 꼭 설치되어 있었다. 어떤 마을에는 백년도 더 된 수도시설이 있었다. 걷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우리나라와 비교되어 부러웠다.
스페인 젊은이들은 벽이 있으면 어디에나 낙서를 꼭 하는가 보다. 그런 흔적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스프레이나 페인트 같은 것으로 그린 그림도 있다. 오래된 문화재에도 상관없이 그린 것을 보았다. 가끔 도로 아래 벽에서 한국 사람들이 한 낙서도 볼 수 있었다.
오래된 다리. 마을과 마을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은 깨끗한데 이 곳 나바라 지역은 하수도 시설이 잘 되어 있는 것 같다. 가축을 기르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