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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이 밝았느냐 J부터 찾아내자.'
 

어제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고 맞이한 아침, 눈을 뜨자마자 J에 대한 생각 때문에 '좀 더 쉬자, 좀 더 눕자, 좀 더 자자' 할 수가 없었다. 지난 밤 거만한 이민국 직원을 살포시 지르밟은 나의 우군 페드로와의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다시 산티아고 데 쿠바 도시 곳곳을 자전거로 누비기로 했다. 가장 먼저 기차역으로 달려갔다. 벌써 네 번째 방문이었다.

 

'J, 오늘 저녁에 아바나로 출발하는 기차가 한 대 있으니 혹시 이 쪽지 보면 그 때 꼭 보도록 해요.'

 

역무원에게 부탁해 매표소 앞에 쪽지를 붙여놓고는 돌아 나와 다시 센트로로 올라갔다. 공원과 광장 어느 곳에서도 J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뾰족한 수 없이 J를 찾는데 시간만 허비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가이드북을 꺼냈다. 그리고 산티아고 데 쿠바에 관한 부분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한 장의 사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Castillo de San Pedro del Morro'.

 

저 아래 밀려드는 파란 파도가 내려다보인다. 300년도 더 넘은 성이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고 앉아 격렬했던 당시의 전투를 가늠해보게 한다. 전투지라기 보단 차라리 동화에서나 나올만한 배경의 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도심에서 약 15km 떨어진 그곳까지 나는 책 속의 그 한 장면을 직접 확인하고자 맹렬하게 페달을 밟았다.

 

자전거로 언덕 오르길 한 시간, 입구에 들어서자 산티아고 데 쿠바의 남서쪽 끝에 위치한 이 성을 오르기 위하여 흘린 땀이 헛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오전 시간이라 아직 오픈하지 않은 상점 몇 개를 지나고, 잔디가 나오는 곳에서 발길을 멈춰 바라보니 탁 트인 공간에 과연 책에서 보던 그 멋진 자태로 나를 맞고 있지 않은가.

 

'이거야!', 자전거를 입구에 맡겨놓고는 종종걸음으로 걷던 나는 성이 보이자마자 단숨에 그 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해적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1587년 이탈리아 군의 엔지니어인 죠반니 바티스타 안토넬리(Giovanni Bautista Antonelli)에 의해 디자인 된 후 오랫동안 지연되다 1693년에야 비로소 지어진 국보급 요새.

 

쿠바 섬 동남쪽 끝에 아는 사람만 알게끔 격동의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이 성의 아름다움을 유네스코가 뒤늦게 눈치 채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아름다움, 셔터가 미처 담지 못한 감동의 빛깔까지 나도 마음껏 누려 본다. 

 

생각보다 주변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아담한 나름대로의 멋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성 안으로 입장한 사람은 나와 스페인 여행자 커플 뿐. 혼자 온 마당에 위대한 문화유산 앞에서 연인을 앞에 두고 '셀카 놀이' 하기도 그렇고, 그냥 그들의 애정행각만 지긋이 바라보는 것으로 인내를 다스린다. 가끔 지루하다 싶으면 외로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친절함을 보이며 쿨하게 그들의 사진사 역할도 대신해 주고, 쫄래쫄래 뒤따르며 마지막은 언제나 소심하게 "저도 사진 한 장만" 부탁하며 추억 남기는 작업을 마무른다.

 

카리브 해의 군사지리적 요지이기도 하지만 철과 니켈의 방대한 보유량만으로도 미국, 스페인 등 서양나라들의 눈독에 갇혀있던 쿠바. 원래 살던 시보네족·타이노족 등 원주민이 스페인 군대에 침략당한 이후 노동 혹사와 대(對)에스파냐 반란, 악성 유행병 등이 연이어지면서 몰살당한다.

 

그 후부턴 지배자는 언제나 또 다른 열강의 침략자의 공격에 대한 두려움과 긴장으로 방어기제를 취해야 했다. 그래서 쿠바 섬 전역은 아바나나 산티아고 데 쿠바처럼 성으로 진지를 구축한 곳과 트리니다드나 그란마 지역처럼 군사작전으로 뚫린 곳들이 허다하다. 세월이 지나 이제 그런 곳들은 역사를 말해주는 문화유산이 되고, 관광지로 변모하게 되었다.

 

모로 성에 남아있는 포(砲)의 잔재는 원주민에 대한 침략자의 가혹한 탄압과 다시 지배자의 위치로 돌아선 그들에게 대항하는 또 다른 침략자와의 전투에 악전고투하는 양면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물론 그 포를 바라보는 나 역시 차가 아닌 자전거로 올라왔다는 육체적 어려움과 옆에 커플을 두고 솔로로 이 좋은 것을 혼자 누려야 한다는 심적 부담감이 양쪽에서 무겁게 짓누른다.

 

탁 트인 카리브 해의 에메랄드 빛 바다 위에 정복과 수난사를 써 내려간 모로 성은 마치 빨래를 밟는 수줍은 새색시의 하얀 발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거칠게 다뤄졌으나 고단한 시간의 흐름 뒤에 남겨진 아름다움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으리라. 자전거 여행의 마지막 광경이 좋아 내 마음도 흡족해졌다. 더 이상 동쪽으로의 전진은 없기에 이것으로 쿠바 자전거 횡단을 매조지하고, 이제 다시 아바나 도시 여행을 꿈꾸며 바닷바람이 가져다 준 시원함에 밀려 성을 빠져나왔다.

 

그나저나 J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태그:#쿠바, #자전거 세계여행, #모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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