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아주 푹 자고 일어났다. 어젯밤에는 맥주도 한잔 마시지 않았다. 안 마신 게 아니라 못 마신거다. 이 식당에는 500ml짜리 병맥주가 없다. 냉장고에는 2리터에 가까운 커다란 페트병에 담긴 맥주만이 진열되어 있다. 그 많은 양을 혼자 먹다가는 사막에서 술병이나서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냥 잠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아주 개운하다. 시간은 오전 7시. 출발하자마자 17km에 걸친 공사구간이 나타났고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차량들이 보인다. 사막의 공사현장을 오가는 많은 트럭들.
비록 푸른 생명력과는 거리가 멀겠지만 이 사막 역시 흔히 말하는 대자연의 일부다. 아프리카의 초원이나 남미의 정글을 보호하는 것처럼 이 사막도 보호해야하지 않을까. 메마른 사막 그 자체가 인간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하다못해 이 사막은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는 것도 어렵다.
사람들이 산이나 바다는 많이 찾아가도 사막에는 거의 오지 않는다. 무더위와 건조함을 만끽하기 위해서 사막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얼마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대자연'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과 시원함이 없다. 시원함은커녕 혼자 멋모르고 사막에 들어갔다가는 까마귀밥이 될 가능성도 있다.
혼자 사막을 걷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광활한 키질쿰 사막에서 혼자 걷는 여행자. 그것은 넓은 도화지 위에 찍은 작은 점 하나만도 못한 미미한 존재다. 내가 이 사막에서 말라죽더라도 아마 500년 동안은 아무도 그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사막을 보존해야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바라보면서 인간이 느낄 외경과 두려움 때문이다. 인간이 모든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삭막한 사막을 바라보면 깨닫게 된다. 인간의 접근을 거부하는 황량한 자연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황량함에 이끌려서 지금 여기까지 왔다. 나를 부른 것은 사막의 열기다. 메마른 사막의 뜨거운 열기가 이미 식어버린 내 가슴에도 불을 지르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광활한 사막의 매력은 무엇일까
사막을 걷는데 가장 어려운 점은 더위와 햇볕이 아니다. 아무리 뜨거운 날씨라도 2시간 걷고 20-30분 쉬는 패턴을 유지할 수 있다면 괜찮다. 진짜 문제는 쉴 곳이 없다는 점이다. 그늘도 없고 앉을 만한 장소도 적당하지 않다. 물을 마실 때도 태양을 등지고 선 채로 그냥 들이키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정처없이 걷다가 그늘을 발견하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그 그늘 아래에 앉거나 누울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금상첨화다. 그런 그늘을 만들어주는 것은 커다란 트럭이거나 인공으로 만들어놓은 구조물이다. 하다못해 버려진 컨테이너 또는 공사중인 건물도 상관없다. 뭐든지 나한테는 아주 훌륭한 휴식처로 변한다.
오래 전에 육상 실크로드를 통과했던 상인들은 이런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을지 궁금하다. 태양의 열기는 그때도 지금처럼 뜨거웠을테고 그늘은 지금보다 더 없었을 것이다. 낙타를 몰고 가다가 쉬는 시간이 되면, 낙타가 만들어주는 그늘에 들어가서 쉬었을까.
또다른 어려운 점은 앞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몇 킬로미터 앞에 잠잘 만한 곳이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걸어야 한다. 이런 점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아무리 물과 식량을 챙기고 1인용 텐트도 있다고 하지만 불안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무지는 인간을 병들게 한다던가. 그렇다면 사막에 대한 무지는 도보여행하는 인간을 골병들게 만든다. 뙤약볕 속에서 몸은 점점 지쳐가는데 앞에 뭐가 있는지도 모른채, 난파선의 선장이 된 심정으로 계속 걸어가야만 한다.
사막에서 만난 서양 관광객들뒤쪽에서 승용차 한 대가 다가오더니 도로 한쪽에 멈춰선다. 뒷좌석의 창문이 밑으로 내려지면서 한 서양인이 나한테 말을 건다.
"어디 가는 거야?"나는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궁극의 목표는 타쉬켄트지만, 오늘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 서양인은 차에 앉아서 손짓으로 나를 부른다. 도로를 건너서 그곳으로 갈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저 서양인은 분명히 나에 대한 호기심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가 나한테 와야지 왜 내가 저쪽으로 가야 하나. 안 그래도 걸어오느라 힘들고 지쳤는데. 자기는 편하게 승용차에 앉아 있으면서.
나는 손사래를 치고 계속 걸었다. 나에 대해서 궁금하면 당신이 이리 와라. 난 당신한테 궁금한 것도 없고 솔직히 대화를 하기도 귀찮을 만큼 지쳤다. 나는 묘하게 심술맞은 기분이 돼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차문이 열리더니 서양인 2명이 내려서 나에게 다가온다. 이들은 분명히 역사 도시 히바에서 부하라로 가는 관광객일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질문을 퍼붓는다. 힘들고 귀찮지만 성격좋은 내가 상대해줘야지 어쩌겠나.
"누쿠스에서 타쉬켄트까지 걸어가는 거야.""잠은 어디서 자고?""도로변에 있는 식당이나 현지인들 집에서.""사막에서 잔 적은 없어?""사막에서는 딱 하루만 잤어.""왜 이런 일을 하는 거야?""그냥 도보여행하는 중이야. 이 길이 고대의 실크로드니까."이들은 네덜란드에서 온 관광객들이다. 내 사진을 몇장 찍고나서 승용차로 돌아가며 말한다.
"꼭 성공하길 바랄게!"그래, 정말 고맙다. 나는 멀어져가는 승용차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다시 걸었다. 지루한 도보여행길에 이렇게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이라도 있으니 덜 심심하다. 그렇게 걷다보니 커다란 식당이 나온다. 시간은 오후 3시. 오늘도 비교적 일찍 목적지에 도착한 셈이다.
큰 식당에 도착해서 맞이하는 휴식
식당으로 들어가서 하룻밤 재워달라니까 마당에 있는 넓은 평상 하나를 가리킨다. 오늘은 꼼짝없이 야외에서 자게 생겼다. 뭐 침낭이 있으니까 그리 춥지는 않을 것이다. 마당 가운데에 커다란 TV를 틀어놓았고, 큰 식당이라서 그런지 트럭들이 연신 들락거린다. 밤에도 이렇게 소란스럽다면 제대로 잘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나는 평상에 앉아서 짐을 풀고 내일 일정을 준비했다. 이곳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여기서 40km를 가면 식당이 있단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할텐데 이 식당이 아침에는 몇시부터 음식을 파는지 모르겠다. 우선 오늘 식량을 챙겨두기로 정하고 빵을 두 개 사고 계란을 두 개 삶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생수도 2리터 샀다.
가만 생각해보니까 돈이 부족할 것 같다. 부하라에 도착하면 공식 환전소가 있겠지만, 그때까지 지금 가지고 있는 우즈베키스탄 돈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식당에서 잠은 공짜로 자니까 상관없고 먹는 비용만 줄이면 될 것도 같은데. 하지만 중간에 또 어떤 돌발사태가 생길지 모른다.
혹시 이 식당에서 환전할 수 있을까. 아니 환전하더라도 지금보다는 내일 아침에 환전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지금 환전하면 내가 달러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현지인들에게 광고하는 꼴이 된다.
그럼 오늘밤을 무사히 보내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일 아침에 이들이 몇시에 일어날지 알 수가 없다. 늦어도 7시에는 출발해야 하는데 그때까지 이들이 깨어나지 않으면 환전은 물 건너 가게 된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오늘 환전하자. 위험이 닥친다면 오늘이나 내일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종업원에게 환전할 수 있느냐고 하니까 그가 나에게 되묻는다.
"얼마 환전하려고?""100달러."그는 안으로 들어가더니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물어본다. 그리고 나를 부른다. 중년의 한 남성이 계산기를 꺼내서 버튼을 막 누르더니 나에게 보여준다. 130,000. 공식 환율은 1달러에 약 1370숨(우즈베키스탄 화폐 단위)이다. 이들의 요구대로라면 나는 약 7000숨 가량을 손해보는 것이다.
식당에서 환전하면 손해를 보려나그 돈이면 1리터짜리 탄산음료 18병을 살 수 있다. 혼자 도보여행하면서 이것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이번에는 내가 계산기를 눌렀다. 135,000. 그러자 이들은 안된다고 고개를 젓는다. 이걸 어쩌나, 환전을 못하게 되면 나만 아쉬워지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손해를 보면서까지 여기서 환전할 필요가 있을지도 의문이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갈등. 나는 다시 계산기를 눌렀다. 133,000. 이들은 이 금액으로도 안된단다. 그렇다면 할 수 없다. 나도 여기서는 환전 못한다. 필요없다고 말하고 돌아서자 이들이 나를 잡는다. 그러더니 이 금액으로 해주겠단다. 약 4000숨 정도 손해지만 어쩔 수 없다.
이들은 두툼한 뭉치돈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우즈베키스탄 지폐 중에서 가장 큰 단위가 1000숨이다. 이들은 1000숨과 500숨짜리 지폐를 섞어서 133,000숨을 만들어 주었다. 지폐가 족히 150장은 되어보인다. 내 가방이 갑자기 묵직해졌다. 우즈베키스탄 현지인들의 월 수입은 약 100-200달러 사이다.
그 금액을 현지 지폐로 받으면 꽤나 지폐의 양이 많을 것이다. 월급봉투가 아니라 월급상자가 있어야 할 판이다. 나는 불룩해진 가방을 메고 다시 평상으로 돌아왔다. 배낭여행만 오면 왜 돈에 이렇게 민감해지는지 모른다. 물론 한국에서도 돈에 민감하긴 했지만. 아무튼 당분간은 환전에 대한 생각없이 맘편하게 걸을 수 있겠다. 그러면 된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