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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해, 새해 인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그림 안백룡 화백)
소의 해, 새해 인사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그림 안백룡 화백) ⓒ 안백룡

 둠벙 위쪽 풀 많은 개울가 그늘에 매어두면 소는 한참을 먹다 고개를 들고 ‘음메에’ 소리를 합니다. 큰 눈 껌벅이며 천천히 히죽 웃습니다. 착한 표정입니다. 정지용 시인은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라며 ‘운다’고 그렸지만, 필자 기억으로는 웃는 것입니다.

 

 소치는 아이가 막대기로 화풀이나 심심풀이 삼아 때리거나 하지 않으면 소는 울지 않습니다. ‘음메에’는 새끼를 부르거나 자기들끼리 의사표시를 하는 수단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는 기분이 좋다는 뜻이고, 웃음이지요. 석양을 메아리치던 이 고운 소리, 요즘 들판에서는 들을 수 없습니다.

 

 ‘소가 웃을 일’이란 말을 아무개가 했다는 글이 신문에 많이 실립니다. 황당하여 말이 안 되는 일을 겪을 때 흔히 쓰는 말인 듯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 말을 쓰는 분들이 소의 웃음을 본 적이 있을까요? 웅숭깊은 느낌까지 주는 소의 웃음이 이렇게 경박한 비유로 활용될 이유가 없습니다. 몰라서, 본 적이 없어서 그런 말을 함부로 쓰는 것이겠지요.

 

 예전에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 부르기도 했지요. ‘소까지 팔아야’ 보냈지요. 지금은 ‘똥값’이라지만 그 때 소는 한 재산 했습니다. 큰 아들 ‘합격’ 소식에 아버지는 외양간 문 걸어 잠그고 한참 있다가 눈이 퉁퉁 부어 나오셨지요. ‘머슴’ 역할까지 듬직했던, 식구나 다름없는 소와 이별이 쉬웠을까요? 팔려가며 소도 울었답니다. 우리와 소의 관계는 이렇듯 살뜰했습니다.

 

 소의 우직한 품성에 주눅 든 일부 심성 얄팍한 사람들이 ‘쇠 귀에 경 읽기’니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다’ 따위의 말로 소를 깎아내리려고 했으되, ‘황소고집’으로 소는 제 자리를 지킵니다. 대체 어떤 소가 인간의 경 소리 듣기를 청했으며, 쥐 잡고자 뒷걸음을 쳤습니까? 인간의 오해이자 억지지요, ‘소가 웃을 일’처럼 말입니다.

 

 새해 2009년 기축(己丑)년 소띠 해. 근면(勤勉)과 유유자적(悠悠自適)의 미덕으로 인간과 더불어 살아온 소의 본성을 지닌 해입니다.

 

 미국 섬기는 사대(事大)의 논리를 ‘경제’로 포장하여 하늘같은 국민을 강박(强迫)한 광우병사태로 상처를 입은 소, 미국산 사료 값 폭등으로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소, 송아지 값이 등심 1인분보다 못하다고 화제가 되는 소, 소의 굴욕이 처연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돌고 도는 것, 소의 본성을 잊거나 잃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새해 아침입니다.

 

 소는 벽사(辟邪)와 기복(祈福), 요사스러움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영험(靈驗)의 동물로 오랜 세월 우리 민속에 새겨져 왔지요. 아예 풍요와 힘을 상징하는 농사의 신(神)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신석기시대 이래 가축으로 소를 길렀고, 제사를 지낼 때 제의용(祭儀用) 또는 순장용(旬葬用)으로 활용했다는 기록이 고대 문서에서 발견됩니다. 소를 잡아 발굽 모양을 보고 길흉(吉凶) 또는 싸움의 승패(勝敗)를 점치기 위한 중요한 도구이기도 하였지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소는 달구지를 끌거나 한가로이 여물을 먹는 모습으로, 또 은하(銀河)와 견우직녀 이야기를 그린 그림에서 견우가 끄는 동물로 등장하지요. 소를 끈다는 견우(牽牛)와 베를 짜는 직녀(織女)의 이름이 농사 설화의 한 상징이지요. 신라의 흙 인형 토우(土偶) 중에는 물소와 같은 큰 뿔을 가진 소도 있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왕 5년(서기 84년)에 ‘고타군수가 푸른 소(靑牛)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답니다. 푸른 소는 중국 문헌에 노자(老子)가 타고 다니는 동물로 묘사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한 언론인은 썼더군요. 소가 신선과 함께 선계(仙界)를 노니는 동물이라는 상징이지요.

 

 그 후로도 소는 우직하고 순박하며 여유로운 천성으로 선비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지요. 소를 소재로 한 시문(詩文)이나 그림, 고사가 많은 점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김제 이경윤 김식 윤두서 조영석 김두량 김홍도 최북 등의 화가가 소를 잘 그린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오래된 그림 중 소 등을 탄 사람을 그림 김식 최북 등의 기우도(騎牛圖)는 소와 인간의 친밀감과 함께 세사(世事)나 권력에 민감하게 굴거나 졸속하지 않고 여유롭게 노닌다는 도사나 선비의 정신을 보여줍니다.

 

 도교에서의 소의 유유자적 이미지처럼 유교에서의 소의 이미지는 의(義)입니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서 호랑이와 싸워 주인을 구하고 죽은 소 이야기, 의로운 소의 무덤 의우총(義牛塚)에 관한 전설 등도 이러한 유교적 배경 속에서 전해져 왔다고 볼 수 있지요.

 

 불교에서는 사람의 진면목을 소에 비유하였습니다. 절집 외벽에서 흔히 보는 십우도(十牛圖) 심우도(尋牛圖)는 선을 닦아 마음을 수련하는 순서를 표현한 것입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만년에 그의 자택을 심우장(尋牛莊)라고 한 것도 이런 뜻이지요.

 

 국립민속박물관 천진기 민속연구과장은 “소의 특성과 농경문화 중심의 우리 민족과의 관계는 전국 각지에 소와 관련한 다양한 민속의 모형을 구축했다”고 설명합니다.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이 같은 다양성과 역사성은 지구촌에 영감을 줄 콘텐츠로서의 ‘우리 소’의 기능성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생명의 이치’보다 ‘이끗의 논리’를 귀하다 하는 무리들 때문에 상처 입은 우공(牛公)이 소의 해, 새해에는 화를 막고 복을 부르는 힘센 존재로 다시 우뚝 서기를 기원합니다. 소의 본성처럼 여유와 평화를 누리시기 바라며 원로 시사만화가 안백룡 화백의 새해 축하 그림을 여러분에게 선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여의도통신과 자서전학교(www.mystoryschool.com) 홈페이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소#기축년#소의 해#광우병#송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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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등에서 일했던 언론인으로 생명문화를 공부하고, 대학 등에서 언론과 어문 관련 강의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얻은 생각을 여러 분들과 나누기 위해 신문 등에 글을 씁니다. (사)우리글진흥원 원장 직책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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