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일차] NAVARETTE - AZOFRA 22.8km 기다릴줄 아는 사람이 나는 좋다….
며칠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다.
길 위에서의 비는 걷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그다지 반가워할 일은 아닌데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을 때면 가끔씩 비를 기다리게 되는데 그건 아마 내가 비를 좋아하기 때문이리라.
한국에서도 집에 있을 땐 비가 오면 슬그머니 먼 여행길에 서고 싶어지는데 헤진 신발에 비록 정해진 목적지조차 없어도 가다보면 종내는 필시 어디쯤엔 닿을 것이기 때문에 베란다 구석 한 켠에 놓인 들어있을 만한 것들은 다 들었을 배낭만 믿고서 말이다.
마음 맞는 친구나 애인이 없어도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 훔쳐보며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만 들어도 딱히 술 아니라도 한 잔 차에도 마음은 고즈넉해질 테니까.
나는 늘 비를 기다리며 살았고 곁에 있어주었으면 싶은 슬그머니 훔쳐보고 싶은 여자를 기다리며 살았고 먼 여행을 떠나는 그런 순간을 늘 기다리며 살았다. 유년이 조금 지난 청년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나는 또 못 가본 곳이 너무도 많았는데 아프리카도 히말라야도 가보질 못했고 남극이나 북극은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다소 멀리 떨어진 곳이라고 해도 아예 외국이라고는 나가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 내가 첫 외국여행지를 산티아고로 가게 됐으니….
간밤 우리가 묶었던 알베르게는 최악의 향기가 있었다. 처음엔 나 역시 그저 긴가민가 했었는데 차츰 그 농도가 심해지면서 한국 여성들이 발냄새라고 하기에 진지하게 그 향기의 근원지를 찾기 시작했는데 아뿔싸… 나와 한 알베르게 들게되면 언제난 내 침대 근처에다 자리를 잡곤 하던 미국인 친구 J.T 가 바로 그 야릇한 향기의 발산지일줄이야.
그는 언제나 침대 주위에다 대형 숄더 같은 것으로 빙 둘러 커텐처럼 막을 치고 자는데 그냥 보면 인상보다는 상당히 깔끔한 미국인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가 지나다니는 곳마다 그 향기를 퍼뜨리고 다녔던 것이다.
그 후로 한국 여성들은 내 친한 친구 J.T를 멀리하려고 했었는데 나야 뭐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갔다오는 군대를 갔다왔었기에 잘 참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발냄새 정도라면 남자끼리 대수랴,
아직도 시차 적응이 덜 된 것인지 국토 대장정 때 늘 하던 것처럼 몸이 풀리지 않은 것 같고 밤에 쉬 잠이 오질 않는다. 먹을거리 또한 쉽지 않은 고민거리중 하나이기도 하고 간밤에도 그랬다. 3시경 숙소에 도착하고 빨래와 저녁을 일찌감치 해결하고 마을 산보도 다녀오고 그러고 나면 할 일이 없어져서 늦어도 10시에는 잠을 청하게 되는데(사실 알베르게는 10시 소등이고 문을 닫아버린다) 한국에서 평소 새벽 두 시경 잠들던 사람이 10시에 잠을 청한다고 될 법이나 한가,
이리 저리 뒤척이다 깜빡 잠이 들었나보다. 실컷 잤을거라 생각하고 침낭속에서 꼬무락거리다 시계를 보니 겨우 새벽 두시가 아닌가. 벌써 며칠 째 새벽잠을 설치기 일쑤다. 새벽 일찍 점검할 것도 없는 배낭을 다시 꾸리고 아직 다들 잠든 시각 살금살금 부엌으로 가서 우유를 끓여 커피를 한봉지 타서 딱딱한 바게뜨를 뜯어 아침을 해결한다. 동이 트려면 아직 멀었는데 희뿌옇게 밝아오는 여명을 길동무 삼아 길을 나선다.
나헤라 마을을 지날 때 스페인의 도시들이 주는 인상이 여지없이 여기선 더 심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꽤 큰 도시 같은데 마치 유령의 도시처럼 도시 곳곳의 건물들이 비었고 상점들이 폐업한 곳들이 많다. 흉해서 사람들이 많이 떠났다고 하는데 한국의 여느 농촌에서조차도 이런 모습은 볼 수가 없을 것 같다. 곳곳에 집이나 가게들을 판매한다는 광고들이 붙어 있은 지 아주 오래인 듯하다.
한낮인데도 그늘진 곳에 들어서면 조금씩 추워지기 시작한는 날씨다. 아마 한국에도 비슷하게 늦가을이 시작되겠지.
NAVARETTE에서 NAJERA까지 17km나헤라를 빠져나가는 곳에 중국인 식당이 하나 있다.
나헤라에서 조금 지나면 ZORA라는 자연 공원이 있고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5,8km 정도를 가면 AZOFRA라는 마을이 나온다.
나헤라에서 아조프라까지 약 23km오늘은 이곳까지만 걷기로 했는데 아조프라의 알베르게가 새로 지은 2인실 숙소이고 시설이 좋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을 중간 우측에 있는 3층 건물이다.
바게뜨도 잘라서 파는 가게도 있고 하룻밤 자는데 5유로에다 슈퍼에 한글 인터넷도 사용 가능한 편리한 곳이다. 이곳에서 꽁지머리를 한 남자를 만났었는데 중국인인 것 같기도 하고 해서 말을 건네지 않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역시 수염이 덥수룩한 나를 보고 같은 생각을 했었단다.
산티아고 길에서 안 사실이지만 한국인들끼리는 반가워 한다거나 편하게 아는 체를 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 먼 이국땅이고 수 많은 외국인들 틈에서 같은 나라 사람들을 만났으니 반가워할 일일 것 같기도 한데 특히나 여성들은 아예 외면을 하려는 분들도 계시고 심지어 방명록에는 같은 한국인을 비하하는 듯한 이상한 글들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겸연쩍게 인사를 시작하게 됐었지만 핀란드에서 살고 있다는 그는 사업도 하고 공부도 한다고 했다. 핀란드에서 평소 만들어 먹곤 하던 음식인 파스타를 만든다고 함께 먹자고 하기에 슈퍼에서 사온 내 저녁거리들을 슬그머니 배낭에다 도로 쑤셔넣어버렸다. 음식거리라고 해봐야 쌀이랑 스프 계란뿐이었지만,
그가 만들어준 파스타가 얼마나 맛있었던지 한국에 돌아온 요즘도 혼자 자주 만들어 먹는데 재료의 문제상 똑같은 맛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럭저럭 괜찮게 만들어지는 것 같다.
오늘은 항상 붙어다니던 나의 카미노 친구들이 보이질 않는다.
아마 오는 길 도중 카페에서 많이 쉰다고 다른 알베르게로 갔는가 보다.
AZOFRA 숙소 모두 2인실 5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