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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점 화려한 문양의 인디오 전통 천을 파는 가게들.
▲ 상점 화려한 문양의 인디오 전통 천을 파는 가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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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어떤 안내 팸플릿이었는지 모르겠다. 오아하까 외곽 중 가 볼 만한 곳에 미뜰라(Mitla)가 강하게 뇌리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숱하디 숱한 멕시코의 유적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인데도 불구하고 지도 위에 미뜰라를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엔 살짝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여기를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을 정도였으니 도대체 언제 그렇게 세뇌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오아하까에서 치아파스로 가는 190번 도로를 45km정도 타고 다시 샛길로 4km가량 더 들어가야 볼 수 있는 신전. 머리에 남아있는 정보를 되새겨보면 제사장들이 살았던 주거 유적과 성당이 볼 만하고 인디오들에 대한 얘기도 잠시 언급된 것 같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는 폭염에 지쳤기도 하거니와 다음 도시 마따뜰란(Matatlan)에 있는 멕시칸 친구 집에 가기로 되어 있어서 서둘러야 했다.

큰 길을 벗어나 샛길로 들어서 미뜰라로 향하는 길. 설다룬 듯 울퉁불퉁 돌들로 박힌 아스파트 길을 얇은 타이어로 헤칠려니 여기서 쿵쿵 저기서 콩콩, 쇼바가 달렸음에도 안장이 들썩거린다. 요란한 움직임은 사람들의 시선을 모아 낸다.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손을 들어 인사하는 멕시칸들의 그 시선에 '올라(Hola)'를 외치며 밝게 웃어주면 마음이 더 들썩들썩해진다.

까떼드랄 미뜰라에서 바라 본 풍경.
▲ 까떼드랄 미뜰라에서 바라 본 풍경.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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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보자. 이 때쯤이면 뭔가 거대한 유적물이 나와야 하는데. 거의 다 온 거 같은데 코빼기도 안 보이네.'

지도에 나와 있는 미뜰라에 도착했지만 테오티우아칸이나 몬테 알반과 같은 거대한 유적지의 형상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최소한 뾰족하니 나와있는 신전의 끝부분이나 하다 못해 터라도 불쑥 드러나야 하는 건데 전혀 그런 풍경이 아닌 것이다.

"저기 아저씨 잠깐만요, 여기 미뜰라가 어디 있나요?"
"마을에서 좀 더 위로 올라가야 해요."

몇 명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다행히 신전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자전거를 이끌고 사람들이 가리켜 준 그리 높지 않은 마을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작은 성당과 그 옆에 인디오들이 장사하는 작은 시장이 있을 뿐 신전은 여전히 시야에 나타나지 않았다.

'무슨 유적지가 눈에 뵈지도 않냐….'

갈수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영문도 모른 채 여기저기 작은 공간을 두리번거린 끝에 드디어 시장 한 구석에 가려져 있던 미뜰라의 입구를 찾아냈다. 입구 바로 앞에 신전이 자태를 드러내며 나를 반기는 순간 그만 떨떠름한 헛웃음이 나왔다. 

미뜰라  '미뜰라'의 어원은 고대 멕시코어의 'Mictitla'(죽은 자의 장소)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 미뜰라 '미뜰라'의 어원은 고대 멕시코어의 'Mictitla'(죽은 자의 장소)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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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이게 다야? 장난해 지금?"

건물 2층 정도나 될까말까한 높이에 유적지치고는 협소한 면적. 하지만 받을 건 받겠다는 심보의 다른 유적지와 별 차이 두지 않은 입장료 35페소.

'대단하군.'

이걸 보기 위해 메인 도로를 이탈해 여기까지 왔나 싶었다. 다행히 양심은 살아있어 국제학생증으로 무료 통과했으니 그것으로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딱 20분. 미뜰라를 다 도는데 걸린 시간이다. 물론 유료 가이드를 즉석에서 채용해 이 유적의 배경에 대한 만연체의 건조한 설명을 들었다면 시간은 좀 더 늘릴 수 있지 모르겠지만 그럴 필요도 그럴 당위성도 내겐 없었다.

미뜰라 외관 이곳은 사포테카인이 몬테 알반을 떠난 이후, 종교의 중심지로서 제사장들이 살았던 주거유적이다. 내부에는 돌기둥과 땅, 하늘, 뱀 등을 형상화한 기하학 무늬가 있다.
▲ 미뜰라 외관 이곳은 사포테카인이 몬테 알반을 떠난 이후, 종교의 중심지로서 제사장들이 살았던 주거유적이다. 내부에는 돌기둥과 땅, 하늘, 뱀 등을 형상화한 기하학 무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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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과 더불어 어쩐지 회유에 가까운 권유다 싶던 바로 옆 성당도 늘 보던 그 양식 그대로 눈에 들어오니 이 어찌 마땅히 지루해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십 개의 멕시코 마을을 방문하며 이미 패턴을 꿰뚫고 있는 나에게 더 이상 흥미를 끌어들일 만한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준다는 건 이젠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았다.  

'이제 어쩐다?' 

이대로 돌아서기엔 그래도 뭔가 아쉬웠다. 안내 책자에 낚여 오긴 했지만 그냥 가버린다면 이곳에 대한 기억이 비워질 것이 뻔한데. 그저 여행 설명서의 글 안에만 머무르는 발걸음은 뜻하지 않은 에피소드로 중무장한 여행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다.

나는 바로 걸음을 바삐 돌려 5분 만에 시장을 한 번 훑고 나서는 무턱대고 학교에 들어가 뒤에서 수업을 참관했으며 호기심으로 들끓은 아이들에게 일일이 손을 흔들어 주는 허장성세의 빵빵한 센스도 놓치지 않았다(실은 상가 건물로 착각하고 들어갔는데 다행히 선생님이나 아이들 반응이 좋았다).

수업 중인 교실 외관만 보고서 상가 건물로 착각하고 들어갔는데 따로 교실이 없는 오픈된 학교였다. 다행히 큰 동요없이 아이들하고 손 한 번 흔드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 수업 중인 교실 외관만 보고서 상가 건물로 착각하고 들어갔는데 따로 교실이 없는 오픈된 학교였다. 다행히 큰 동요없이 아이들하고 손 한 번 흔드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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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렇게 해도 기대했던 내 마음을 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작은 동네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한계가 있었다. 더 이상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자 그만 체념하고 터덜터덜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마을 아래쪽 작은 시장을 보았다. 그곳에는 생기 넘치는 인디오들이 물건을 사고팔고 있었다.

그 때였다. 물건을 주고받는 찰나 벌어지는 짤막한 미소를 바라본 그 때, 별안간 그들과 살갑게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형형색색의 고유한 전통의상을 입은 채 당당히 활보하던 종족들이지만 혼이 빠져나간다는 영적인 이유로 매번 사진도 피하고 가끔은 무거운 침묵으로 대화의 포문을 열기도 버거웠던, 내게는 유난히 멀게만 느껴진 인디오. 그래서 늘 마음속에 아쉬움이 잔존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찰나에 그들이 작은 시장에서 거래하는 것은 물건 뿐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눈앞에 스쳤다.

인디오 아이들 인디오만의 독특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동생을 안은 형. 역시나 아이들은 웃을 때가 가장 귀엽다.
▲ 인디오 아이들 인디오만의 독특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동생을 안은 형. 역시나 아이들은 웃을 때가 가장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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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고기 굽는 인디오 냄새가 폴폴, 침이 꼴깍.
▲ 시장에서 고기 굽는 인디오 냄새가 폴폴, 침이 꼴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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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련함으로 장사수완을 발휘할 아줌마보단 그래도 더 순수해 보이는 아이들이 좋아 아이가 지키는 노점으로 갔다. 날도 덥고 입맛은 없어 상큼한 열대 과일을 먹을 심산이었다.

향과 맛을 겸비한 각종 과일이 싼 값에 제공되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생각해 보면 손바닥만한 타코 하나가 10페소인데 반해 파인애플이나 망고, 수박, 딸기 등은 엄청나게 많이 먹을 수 있으니 같은 가격이라면 양에서 또 맛에서 그리고 영양에서도 과일이 동급최강이 아닌가 싶다.

아침에 좋아하는 키위를 먹었으니 이번엔 다른 좋아하는 열대과일인 큼지막한 파인애플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러다가 해맑게 웃는 아이가 들고 있는 수박에 그만 홀라당 마음을 뺏겨 급히 마음을 돌려 수박을 구입, 그 자리에서 사각사각 씹을 틈도 없이 순식간에 해치워버렸다.

이런 모습이 웃긴 건지 아이들도 주변에 상인들도 함께 자지러지며 나에 대한 경계심을 푸는 듯 했다(그 전까지만 해도 무뚝뚝하게 그저 장사를 위해 '곤니찌와'하고 인사하던 그들이었다).

이 때다 싶어 만지작거리며 타이밍만 노리던 사진기를 들어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빵빵 터트렸다. 모두들 전혀 개의치 않는 분위기.  

수박 파는 아이 너무나 해맑게 웃는 아이 덕에 즉석 해서 수박과 파인애플을 사서 먹었다.
▲ 수박 파는 아이 너무나 해맑게 웃는 아이 덕에 즉석 해서 수박과 파인애플을 사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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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몸짓만으로도 그들과 나의 '다름'이 아닌 이 자리에 우리가 '함께'라는 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원래 목적이었던 파인애플까지 한 통을 즉석 해서 까서 다 먹어버리고는 포만감에 매우 흡족해 하며 '무이 부에노'를 연발했다. 내친 김에 허리띠를 풀고 망고에까지 도전해 보고 싶었지만 슬슬 해가 지고 있었으므로 여기서 참아야 하는 게 아쉬움이라면 아쉬운 대목.

저울 정이 많은 인디오들, 서로 웃음을 주고 받으며 살가운 교제의 매개가 된다.
▲ 저울 정이 많은 인디오들, 서로 웃음을 주고 받으며 살가운 교제의 매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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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저울을 바라보았다. 저 저울의 눈금이 가리키는 무게가 무거울수록 그들의 삶의 무게는 가벼워지리라. 저울을 사이에 두고 흥정을 하는 것만큼 기다림이 즐거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 모두 그 저울의 의례를 거친 저녁 나기는 참으로 따뜻할 것이다. 때론 냉정한 기준이 되어야 할 눈금이 한 두 칸 비껴가더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는 삶을 알기에 주름진 눈가에 웃음 한 번으로 넘어가는 정.

생각해보면 언제부턴가 계산대를 사이에 두고 우리의 눈빛은 마주치는 기회조차 스스로 부여하지 않고 있다. 디지털 바코드로 에누리 없이 계산하는 차가운 기계 냄새가 상대방을 바라보는 마음의 풍요를 질식시켜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아날로그 저울을 사이에 두고 거래 이상의 마음을 나누는 곳 또한 여전히 존재함을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할머니 손을 잡고 가던 5일장의 그 따스한 사람 냄새가 느껴지는 왁자지껄한 시장터. 역사적 가치도 관광요소도 없기에 안내 팸플릿에 기재되어 있진 않았지만 내게 오늘의 명소는 미뜰라 신전 대신 단연 이름없는 작은 인디오 시장거리였다. 

간단한 구경을 마치고 돌아나오는 길. 오른편에 부서지는 금빛 햇살에 눈부심이 더하다. 그렇게 달려 만난, 활짝 웃는 멕시칸 친구의 얼굴에는 신전보다 더 웅장한 크기의 반가움이 내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멕시코#자전거여행#세계일주#라이딩인아메리카#미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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