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영흥에 있어야 할 존재.. 나보단 역시 천종훈이 영흥에 있어야 할 존재라고 모두들 얘기할 테니 .. 《산바치 카와/정선희 옮김-4번 타자 왕종훈 (31)》(서울문화사,1997) 9쪽“나보단 역시(亦是)”는 “나보단”으로 손봅니다. 또는 “나보단 아무래도”로 손보고요.
┌ 영흥에 있어야 할 존재라고 │ │(1)→ 영흥에 있어야 할 선수라고 │(1)→ 영흥에 있어야 할 사람이라고 │(2)→ 영흥에 있어야 한다고 └ …보기글은 야구경기를 치르는 사람 입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선수’라는 말로 고쳐쓸 때 한결 또렷합니다. 천종훈이든 ‘나’이든 경기를 하는 선수, 곧 ‘사람’입니다. 한편, 아무 말도 넣지 않고, “영흥에 있어야 한다고 모두들 얘기할”처럼 적어도 좋아요.
‘存在’ 한자 풀이를 보면, ‘있을 존 + 있을 재’입니다. 보기글을 보면 “있어야 할 존재”, 곧 ‘있다’가 겹으로 쓰였다고 볼 수 있어요. ‘있다’가 겹으로 쓰이는 일이 달갑지 않으면 (2)처럼 적고, 경기장에 서 있는 아무개를 힘주어 가리키고 싶으면 (1)처럼 적어 줍니다.
ㄴ. 땅에 코를 박고 사는 동물적인 존재.. 예수도 우리네 일개 소시민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렀다. 개나 돼지와 똑같이 땅에 코를 박고 사는 동물적인 존재가 거룩한 하나님이라고? .. 《육명심-사진으로부터의 자유》(눈빛,2005) 37쪽‘일개(一介)’는 ‘보잘것없는’이나 ‘한낱’이나 ‘하찮은’으로 다듬습니다. ‘소시민(小市民)’은 “작은 시민”이란 소리인데, 앞말과 묶어 “우리네 보잘것없는 사람들”쯤으로 풀어내면 어떨까 싶습니다.
┌ 동물적인 존재 │ │→ 짐승 같은 사람 │→ 짐승처럼 보잘것없는 우리 │→ 짐승처럼 하찮은 사람 │→ 짐승과 같은 목숨 └ …이 자리에서는 ‘짐승(동물)’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짐승과 같은 대접을 받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사람들한테 짐승이란 귀염둥이처럼 목아지에 사슬을 달고 먹이 주며 키우는 놀이감이거나, 잔뜩 살찌워 고기를 얻어내도록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먹을거리일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짐승을 짐승으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짐승한테도 보금자리가 있으며 짐승한테도 삶이 있음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짐승이 살 들판과 산과 바다와 내를 모조리 무너뜨리거나 허뭅니다. 이 나라 이 땅에는 범과 곰이 살 터전이 없을 뿐 아니라 토끼와 너구리가 살 터전마저 없습니다. 멧돼지가 산에 안 살고 농삿집 텃밭을 망가뜨리는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람쥐가 호두 열매를 모조리 갉아먹는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희도 살려고 아득바득입니다.
┌ 짐승 대접을 받는 밑바닥 사람 ├ 짐승 대접마저 못 받는 맨바닥 사람 ├ 짐승 대접조차 고마운 떨꺼둥이 └ …사람이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사회가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눈에 보이는 계급이 있었고, 오늘날에는 눈에는 안 보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나누는 또렷한 계급이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계급은 지난날보다 훨씬 끔찍할는지 모르고, 앞으로는 더욱 끔찍할 계급나눔이 이루어질는지 모릅니다.
집안과 족보에 따라 나누기도 하는 계급은, 말에 따라 나누기도 하고 돈에 따라 나누기도 하며, 얼굴 생김새와 몸매에 따라 나누기도 합니다. 가방끈에 따라 나누기도 하며, 굴리는 자동차에 따라 나누기도 하는데다가, 옷차림에 따라 나누기도 합니다. 사는 집과 동네에 따라 나누기도 하고,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나누기도 합니다. 영어를 잘할 줄 아느냐를 놓고도 나누고, 키에 따라서도 나누며, 주먹힘으로도 나눕니다. 똑같이 책 만드는 일을 해도 일터에 따라 나누어지며, 똑같은 일터에서 일하더라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는 가운데, 이주노동자냐 아니냐로도 나눕니다.
사랑을 나눈다면 좋을 텐데. 믿음을 나눈다면 반가울 텐데. 그렇지만, ‘사랑나눔’이 아닌 ‘계급나눔’, 곧 ‘계급가르기’입니다. 함께하는 사랑이 아니라, 외곬로 차지하려는 사랑입니다. ‘믿음나눔’이 아닌 ‘자리나눔’, 곧 ‘자리가르기’입니다. 함께하는 믿음이 아니라, 홀로 차지하고 누리려는 믿음입니다.
┌ 못난 사람 ├ 밑바닥 사람 ├ 꾀죄죄한 사람 ├ 어수룩한 사람 ├ 잊혀진 사람 ├ 따돌림받는 사람 ├ 내팽개쳐진 사람 └ …앞으로는 달라질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라도 나아질 수 있을까요. 차츰차츰 새로워질 수 있을까요. 혼자만 잘살기보다 다 함께 잘살 수 있도록. 혼자만 알아먹는 말이 아니라 다 함께 선선히 헤아리는 말이 되도록. 혼자만 뽐내고 으스대는 매무새가 아니라 다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한 발자국씩 아름다움으로 옮아가는 몸짓이 되도록.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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