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현은 틈나는 대로 1층 서점으로 내려가 보고는 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모차르트와 프랑스의 앙리 마티스를 알고 있었다. 일제 말기 평양 서문여고를 다녔던 그녀는 학과 공부보다는 음악과 미술을 더 좋아했다. 그런데 그녀는 해방 후 당 혁명 간부를 육성하는 만경대학원을 다녀야 했다. 그것은 자의반 타의반의 선택이었다.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야 했기 때문이었다.
서점에는 갈수록 남한 민간인들의 출입이 많아지고 있었다. 이념 서적을 찾는 지식인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공산당 서적은 책이 동날 지경이라고 했다. 그래서 당원에게만 팔기로 했다고 서점 관리자가 귀띔해 주었다. 아마도 서점 관리자는 그녀가 공산당 이념 서적을 찾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음악이나 미술 서적이 있나 해서 내려와 본 것이었다. 그녀는 음악이나 미술 서적이 있는지를 물어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당최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까부터 조수현의 눈길을 끄는 한 청년이 있었다. 복장과 머리 모양은 어수룩해 보이지만 청년의 눈빛은 기묘한 맑음과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 청년도 두리번거리기만 할 뿐, 그녀처럼 책을 선택하지 못하고 있었다. 호기심이 당긴 그녀는 청년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서 간간이 청년의 기색을 살폈다.
청년은 끝내 책 고르기를 포기하는 것 같았다. 그는 출입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출입문 가까이 갔을 때였다. 별안간 공습 사이렌이 울렸다. 청년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뒤돌아섰다. 그러자 청년의 눈빛이 조수현의 시선과 맞닥뜨려졌다. 순간 조수현은 선 채로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정신을 추스렸다. 그러고는 서점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제 안내를 따라 주십시오. 지하에 안전한 대피소가 있습니다.”
청년은 얼른 조수현 앞으로 다가왔다. 조수현은 30명 가까운 민간인들을 신속하고 예의 바르게 지하 대피소로 안내했다. 모두들 질서정연하게 따라 주었다. 대부분 중년 이상으로서 지식인들 같아 보였다. 대피소에 들어선 그들은 한두 권씩의 책을 가슴에 안고 숨을 죽인 채 서 있었다. 사실 대화를 나누어도 되는 정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는 대놓고 대화를 나누어도 괜찮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청년은 조수현의 앞에 붙어 서 있었다. 손질하지 않은 머리칼이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다. 중키에 이목구비가 제대로 갖추어진 청년이었다. 청년은 사색을 많이 해야 얻을 수 있는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조수현은 청년에게 말을 붙여 보기로 했다.
“책, 못 고르셨지요?”
청년은 처음 어리둥절해 하더니 조수현의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 사실은 전쟁 전에 외국에 주문해 놓겠다고 했는데 오늘 와서 보니 없군요.”
“어떤 책인지 물어도 되나요?”
“지금 묻고 있잖습니까?”
청년은 대범하게 말하더니 환히 웃으면서 말했다.
“‘외계행성’이라는 제목의 미국 책입니다.”
“......전공이신 모양이군요?”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그는 조수현의 명찰을 읽으며, “저는 이두오라고 합니다.”라고 자기 이름을 말했다. 그녀도 살짝 머리를 숙이며 “조수현입니다.”라고 다소곳이 자기 이름을 댔다.
이윽고 공습 해제 사이렌이 난 후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 뒤 조수현은 이따금씩 남한 청년 이두오를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날에는 근무 중에도 이두오의 더벅머리와 서글서글한 눈빛이 서류 위에서 맴돌고는 했다.
조수현은 남한에 와서 겪은 두 남자 이두오와 이명준을 비교해 보았다. 이두오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모든 것이 이명준과 크게 달랐다. 그는 자연스럽고 상냥했다. 그에게는 세속적인 때가 없어 보였다. 일면 어수룩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는 묻는 말에 선선히 대답하는 예의도 갖춘 청년이었다.
그에게는 이명준처럼 일부러 유식해 보이려고 하는 부자연스러움이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명준처럼 침울하지도 않았다. 조금 불쌍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 말고 이명준에게서는 아무런 인간미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두오는 정반대였다.
두 나라김성식은 학교에 나가 보기로 했다. 전쟁 통에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공부하다 그냥 둔 것을 정리도 해야겠다고 생각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릉 배밭골에 있는 집에서 출발한 그는 구불구불한 아리랑고개를 넘어 돈암동 전차 종점에 이르렀다. 아침부터 날이 무더웠다. 그는 상의를 벗어 들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예상대로 아직 전차는 운행되지 않고 있었다. 그는 한 시간 가까이 더 걸어 학교에 도착했다.
정문에는 낯선 학생들이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었다. 게시판에는 큼지막한 전단이 붙어 있었다. 문리대(文理大) 교수와 학생을 소집하는 내용이었다. 평소 좌익으로 지목 받았던 학생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졸업생 몇과 좌익운동으로 퇴학당한 학생의 얼굴도 보였다. 그 중에서 한 학생이 김성식을 알아보고 달려와 반갑게 인사했다.
“선생님,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김성식은 학생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 조금 미안했다. 학교 버스가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버스에는 ‘문리대학생자치위원회’ 라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교사(校舍) 안에서도 학생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김성식은 먼저 교무과장실로 들어가 보았다. 국문학 이병기, 사학 이병도 등 교수 대여섯 명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김성식은 그들의 비밀스러운 대화에 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곧장 자기 연구실로 가서 책상서랍을 정리하고 최근 꺼내 놓았던 책들을 서가에 꽂았다.
노크 소리가 났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천문학연구소 연구원 이두오였다. 그는 등에 봇짐을 메고 있었다. 이마의 땀을 닦은 그는 예의 그 천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아니 이군이 웬 일인가?”
“선생님 무사하셨군요?”
이두오는 전쟁이 나자 충청도에 있는 고향으로 내려가려다 돌아왔다고 했다. 한강 다리가 끊어져서 건널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조금만 일찍 건넜더라면 저는 작고할 뻔했습니다.”
김성식은 농담 같은 어조의 이두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폭파 당시 다리 위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다리를 건너지 말라는 어떠한 예고나 경고도 없이 다리가 폭파되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아치가 끊어졌는데, 익사자는 물론 폭사자의 참상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어린이들이 다리 바닥을 긁으며 엄마를 불렀습니다.”
김성식은 뭔가 착오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두오가 직접 눈으로 본 것이니 믿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물에 빠진 자동차만도 50여 대 이상입니다.”
사실 이두오의 말은 실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강 다리가 폭파된 것은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이었다. 당시 채병덕 국군참모총장은 인민군 탱크가 서울에 진입하기 두 시간 전에 다리를 폭파하라고 공병감에게 지시해 놓았다. 국군이 인민군의 T-34 탱크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육군본부는 한강 이남으로 철수할 것을 결정하고 한강 다리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했다. 국군은 6월 27일 정오부터 일반인의 한강다리 통행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피난민이 계속 밀려오는 상황에서 통행금지령은 먹혀들 수 없었다.
한강 이북에는 아직 수만 명의 국군과 경찰이 남아 있었다. 당연히 그들을 최대한 도강시킨 다음 다리를 끊어야 했다. 그래서 애초에는 6월 28일 새벽 6~7시로 잠정적인 폭파 시간을 정했다.
그런데 새벽 두 시경 한강 이북 용산 방향에서 땅을 울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겁에 질린 부대장은 정신없이 폭파 명령을 내렸다. 그는 한국 기마경찰이 말을 타고 달려오는 소리를 탱크 음향으로 오인한 것이었다. 폭파 당시 인민군 탱크는 청량리를 향하고 있었고 주력 부대는 서울 외곽에 진입하고 있었다.
“혹시 국군의 도강을 막기 위한 인민군 첩자의 소행이 아니었을까?”
김성식은 스스로 근거 없이 의문을 제기한 자신이 조금 쑥스러웠다.
“선생님, 죄송합니다만, 제 짐을 선생님 방에 좀 놔두어도 될까요?”
이두오의 현실적인 말이 김성식의 정신을 되돌려 놓았다.
“물론이지.”
이두오가 자기 짐을 연구실 구석에 놓을 때에도 김성식의 상념은 여전히 한강 다리에 머물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또 찾아뵙겠습니다.”
이두오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순간 김성식은 이두오를 다급히 불러 세웠다.
“이군! 내가 미처 생각을 못 했는데 지금 어디에 거처하나?”
이두오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
“산입니다.”
“산이라고?”
“하늘과 가까워서 좋습니다.”
“우리 동네에도 산은 있으니까 혼자 지내기 어려우면 언제든지 오게나.”
김성식은 이두오에게 주소를 적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