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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8일, 서울 흑석동 중대 중앙문화예술관에서 열린 졸업식 장면.
지난 18일, 서울 흑석동 중대 중앙문화예술관에서 열린 졸업식 장면. ⓒ CAU

그러고 보니, 지난 18일은 절친한 친구 2명의 대학 졸업식 날이었다.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뉴스에 어린 '중·고딩'들의 엽기적인 졸업 신고식 모습이 보도되는 걸 보면서 껄껄댄 기억은 있다. 그런데 정작 가장 가까이 있는 녀석들 졸업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무심한가? 그런 측면도 없진 않지만, 오해는 말라. 보기엔 이래도 마음 씀씀이는 나름 세세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친구들이, 그것도 'Best'라 부르는 녀석들이 졸업을 하는데 축하 문자메시지 하나 안 보낸 건 아무리 봐도 심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핑계가 없는 건 아니다. 나뿐아니라 졸업 당사자인 친구들조차도 자신들의 졸업에 무심했으니 말이다. 요즘 들어 친구 J는 항상 입버릇처럼 말했다.

"무슨 졸업식이냐. 평소와 다름없는 날처럼 도서관에나 가야지 뭐. 나중에 졸업장 필요하면 그거나 받으러 오면 되지, 뭐하러 가운입고 억지웃음을 짓고 있어…."

억지웃음이라. 이제 막 졸업을 한, 그래서 백수로 신분을 변경한 젊은이들은 금방 이해할거다. 불황 중 맞는 졸업은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터널의 출발선에 선다는 의미와 같다. 이들에게 학창 시절의 추억을 더듬어볼 여유가 있을까? 실업한파의 한복판에 내몰린 청년들에게 졸업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졸업? 갈 곳도 없는데 뭐가 자랑스럽다고..."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명지전문대학 캠퍼스에 내걸린 졸업 축하 현수막.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명지전문대학 캠퍼스에 내걸린 졸업 축하 현수막. ⓒ 송주민

"그래도 졸업식인데 하루만큼은 시간 내봐."

애써 J에게 말했다. 아무리 팍팍해도 그 정도 삶의 여유는 갖고 살자고. 평생 언제 또 학사모 써 보겠냐고. 나중에 자식들에게 아빠의 젊은 날 졸업사진 정도는 보여줘야 하지 않겠냐고.

그런데 친구는 손사래를 치며 '밀가루 뿌리러가겠다'고 농치는 나를 극구 만류했다. "이미 지방에 계신 부모님들한테도 오지 말라고 얘기해놨어. 뭐가 자랑스럽다고 노인네들 왔다갔다 귀찮게 해"란 말과 함께. 

이런 거 보면 친구의 졸업 날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과 축하한다는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한 게 비단 나의 무심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당사자들조차도 '빛나는 졸업장'은커녕 "나중에 필요하면 자동인쇄기에서 졸업증명서나 떼면 되지 뭐"라고 얘기하는 판에 내가 어떻게 나서서 녀석들의 졸업을 챙겨줄 수 있었을까.     

가까운 친구들뿐만이 아니다. 주위 어디를 둘러봐도 마찬가지 분위기다. '평생 자유를 방어해야 하는 무거운 책무를 부여 한다'는 의미로 입고 쓴다는 검은색 학사모와 졸업가운은 극심한 취업한파 앞에서 그 뜻이 철저히 무력해지고 있다. 졸업이란 단어에 내포된 낭만은 노랫말 속에 등장하는 '언니'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된 것만 같다.    

불과 2~3년 전인 1, 2학년 때만 하더라도 졸업 시즌이 되면, 학생회나 동아리에서 "선배들 축하해주러 가자"고 부산을 떨곤 했다. 후배들이 함께 모여 선물과 꽃, 편지를 준비하고, 교실도 꾸미고 하면서 교문을 나가는 선배를 배웅했다. 하지만 올해는 이런 모습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대학가에 여유가 사라지면서, 선후배간의 조촐하고 따뜻한 관습들도 희미해져 감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경기한파에 구속된 졸업장... 학사모의 가치는 취업 여부에 따라?

 지난 2007년 우리과 졸업식 장면. 매년 학생회에서는 졸업하는 선배들을 위해 조촐한 정성을 보여주곤 했다.
지난 2007년 우리과 졸업식 장면. 매년 학생회에서는 졸업하는 선배들을 위해 조촐한 정성을 보여주곤 했다. ⓒ 사회복지학과 학생회

졸업이 주는 의미가 뭔지 되짚게 하는 요즘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대학을 다녔을까? 공부? 취업? 인간관계? 연애? 자아실현? 아마 여러 가지 꿈을 앉고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은 우리가 꿈꾸듯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뜻을 펼치기엔, 우리가 떠안아야 할 사회적인 짐이 너무 많았다. 다시 우리는 고3 수험생이 된 것마냥 취업입시준비를 해야 했다.
 
극도로 위축된 대학사회 속에서 우리가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대학 졸업장을 앞세워 좋은 직장에 입성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혹독한 불황이 밀어닥쳤다. 자기소개서 수십 개를 뿌려도 조건 좋은 기업은커녕 내 한 몸 받아주겠다는 회사 하나 없다.

올해 졸업생 중 60% 가량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고 하는 걸 보니, 엄살 떠는 말이 아닌 건 분명하다. 네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고, 저들의 절망이 아닌 우리의 절망임이 가까이에서 느껴진다. 오직 하나의 꿈과 욕망만을 강요받았던 대학생활, 그 바람과 꿈이 투영되지 않은 졸업장이 한낱 종잇조각처럼 하찮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을까?    

취업에 구속된 졸업장, 경기한파에 작아지는 졸업장이라, 쓴웃음이 흘러나온다. 대학이 취업학원화됐다는 말은 지겹도록 들어왔지만, 지금처럼 피부에 닿게 느껴진 때도 없었다. 학사모가 갖는 가치마저 취업여부에 따라 달라지고 종속되는 상황이라니, 막장까지 치달은 느낌이랄까. 1백만 청년실업시대에서 졸업 그 자체가 갖는 독립적인 의미는 무엇인지, 있기나 한 건지, 우리들의 학창생활은 무엇이었는지, 혼란스럽다.

내년 졸업식 때 나는 웃을 수 있을까? 

내년이면 나도 졸업이다. 지난 시간을 회고하면, 회색빛 대학 문화에 실망한 나머지 그 틀을 탈피해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자 여러 '뻘짓'을 궁리하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보면 얽매임 없이 대학을 다녔다. 쓴말 단말, 하고 싶은 얘기 하고, 마음 울리는 현장, 부담 없이 발발거리며 쫓아다녔다. 다르게 한 번 살아보고 싶었고, 젊은 사람으로서 나름의 부채의식도 있었다. 철없는 대학생이기 때문에 용서돼는 행동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 4학년, 최악의 고용대란 직격탄을 맞은 시기, 어떻게든 처절하게 내 밥줄을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점차 압박이 밀려온다. 캠퍼스를 떠나면, '생존경쟁'이란 말은 더 이상 비판의 대상만이 아닌 게 되기 때문이다.
 
1년 후 졸업식에서 나는 여전히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을까? 졸업장을 앞에 두고도 시니컬하게 자유로움과 낭만을 마음에 품을 수 있을까? 안쓰러운 곡소리만 들리는 주위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레 겁부터 난다. 벌써부터 청승떨긴 이르지만, 혼란스러운 요즘이다. 

덧붙이는 글 | '불황이 OOO에 미치는 영향' 응모글



#졸업식#청년실업#대학#졸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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