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이엠에프'라고 부르던, 막 한 세기가 저물어가고 컴퓨터가 인식 못하는 날짜가 다가온다고 언론이 나서서 설레발 떨던 그 즈음. 막 바뀐 대통령이 경제회복을 자신하던 때였습니다. 회복 될 것 같지 않은 환자처럼 나를 비롯한 학교의 선배와 후배들이, 그리고 전국의 대학졸업생들이 또는 취업을 준비하던 졸업생들이 마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학교 주변을, 도서관을 어슬렁거리던 시절. 제 인생에 첫번째 전환이었죠.
불황과 함께 온 인생의 전환건축학과. 대학에 입학할 당시만 해도, 당연히 취업은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선배들은 학과 사무실로 밀려드는 설계사무소들의 원서를 주체하지 못해서 여러 장을 들고 뿌려서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집는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취업에 대한 걱정은 없었지요. 오히려 취업후의 도제(徒弟)시스템에서 적응하는 것은 상상 이상이라고 해서 그것에 대한 마음의 준비정도나 하려고 했답니다. 2학년 마치고 군대에 갔습니다.
군 제대후에 복학해서 정말 생각 없이 학점이나 따는데 주력하려 했습니다. 복학해서 달라진 교정문화에 적응하느라 바쁘던 때에 느닷없이 나라가 넘어갔다며 난리들이었고, 정말로 어두운 4학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졸업하고 1년여를 학교를 서성이며 취업을 준비했습니다.
경제불황은 내 인생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걱정 없던 취업을 걱정하게 했고, 졸업 후에도 학교를 서성이는 선배들을 마주칠 때마다 조금씩 가슴 한구석이 허물어져 내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대학원을 등록해서 다니는 동기들을 만날 때에도 편안하지 않았고 부모님께 오히려 더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슬펐습니다. 대학 때까지 부모의 보살핌 속에 자란 영혼이 막 싹을 틔워 홀로서기를 하려는 순간 폭풍에 잎이 잘리고 가지가 꺾여 버린 느낌이랄까. 2년을 더 학교를 다니는 것은 왠지 인생 허비한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취업을 선택했지만 도서관을 들락거리면서 읽지 않은 오래된 책 위에 먼지가 쌓이듯 내 자신이 사는 인생에 대한 의구심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취업은 했습니다. 1년여를 토익성적을 키운 덕택에 영어능력을 필요로 하는 기업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인천으로 출퇴근하다가, 지방 박물관에 가서 현장기사를 하다가, 공조회사에 공무직을 하다가, 통신회사 영업까지. 5년 동안 화려하게(?) 옮겨 다녔습니다. 어떤 회사를 다녀도 답답한 느낌이 가시지 않고, 답답함은 점점 묵직한 상처로 커지는 느낌이었고, 내 상처를 치유할 곳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도서관이 가르쳐준 삶영업을 하러 다닐 때는 틈나는 대로 찾은 곳이 도서관이었습니다. 보이면 들어가서 집어든 책. 책은 저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지는 않습니다. 책 읽는 시간에 사람을 만나지 못해 실적 없는 경우엔 인센티브도 없었고, 곧 책이 저의 지갑을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삶에 대한 의구심이 밀어내 비워진 가슴한구석을 따뜻함, 뜨거움, 냉철함, 호기심과 열정으로 차츰 채워주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했고, '사는 대로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라'라는 큰 가르침도 얻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환경의 자연을 대상으로 보지 않고 더불어 살아야 하며, 그 곳에서 배우고 얻는 지혜도 배웠습니다. 경쟁하고 재화를 얻는 것만이 '행복한 삶'이 아닐 수도 있다는 본보기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살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빌 게이츠도 오늘날 자신을 만든 것은 동네의 작은 도서관이었다고 하죠. 저도 같은 경우 입니다. 뭐 아직까지는 전혀 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말이죠.
삶의 선택어느 겨울 대학동기들과 망년회에서 저는 선언했습니다. 시골로 내려가겠다고, 술이 취한 친구들은 저거 취했구나 했습니다. 며칠 뒤 고창에 짐을 풀고 연락했더니 화들짝 놀라면서 진짜 였냐고 합니다. 그래도 그다지 믿는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일 년쯤 뒤에 진안 무릉마을에서 결혼식을 올렸더니 그제야 인정합니다. 지금 5년차이고 그네들 중엔 열렬한 지지자도 생겼습니다.
몇 년을 잘 버텨왔습니다. 마을간사를 하는 동안 제 아내는 직장생활을 서울에서 계속 했고, 애를 낳을 즈음이 되서야 이곳으로 내려와 살림을 합쳤습니다. 아이가 커가고 집을 지었습니다. 집 짓는 데에 돈은 다 들어가고. 살기가 막막합니다. 기본적으로 들어갈 돈은 있는데 마땅히 돈이 나올 구석이 없습니다. 주변에서 뭐 해먹고 사냐고 물어도 '그냥 웃지요'였습니다.
지금은 생겼습니다. 뉴스에서도 소개된 대표적인 일자리창출사업의 대표주자인 '숲 가꾸기'의 은공을 입어서 숲 해설사로 전북 대아수목원에 들어왔습니다. 100여만 원의 월급을 받는 일용직 노동자입니다. 지금은 이곳에서 숲 가꾸기 사업으로 뽑힌 이들과 같이 숲 가꾸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사람들이 많아지고 요청이 들어오면 숲 해설을 하게 될 겁니다.
자연과 밀착자네 어때. 사람들이 묻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합니다. 사실 돈이 되는 직업이 아닙니다. 다른 일을 병행할 시간도 없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바람직한 직업은 아닙니다. 그저 자연과 친해질 수 있으니 좋은 겁니다. 나무와 풀들, 산새들, 짐승들과 만납니다. 아마 도시생활하는 인간들이 평생 만나는 횟수래봐야 제가 일주일 정도 이 산속을 돌면 비슷해 질 겁니다.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출발은 아이엠에프. 그리고 또 시작합니다. 이번 불황이 나를 이곳으로 인도했으니까요.
누군가와 친해지는 방법은 많이 만나고 대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들어주어야 합니다. 인간이 아닌 그네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오늘도 산에서 작업을 합니다. 심어놓은 나무에 감긴 온갖 덩굴들과 가시나무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작업하면서 그 나무들에게 말을 걸어 봅니다.
'이봐, 미안한데 여기는 안 되겠어.'
'.......'
그들은 말이 없습니다. 나무에 감긴 덩굴을 잡아 뜯자 씨앗이 사방으로 날립니다. 마치 눈이 내리는 듯합니다. 말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그 많은 꽃씨를 날릴 뿐이지요. 또 하나의 '기회'가 되는 것이지요. 그들에게도.
덧붙이는 글 | '불황이 OOO에 미치는 영향' 응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