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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책 서평을 연재하면서 이렇게 특이한 여행서적을 만나게 된 것도 처음이다. '핼리팩스에서 생긴 일'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서 캐나다의 어느 작은 도시 여행 이야기 정도로만 생각하고 책장을 펼쳤던 나는 예상과는 다른 특이한 색깔의 여행 이야기에 감동이 생겼다.

 

"이 글은 나를 위한 기록이다. 다른 누구보다도 스스로를 위해 나는 남겨 두어야 했다. 내 이십대의 한가운데 그러한 나날이 있었음을. 가장 화려하게 빛났고, 아주 많이 아팠으며, 살아오며 흘린 것보다 더 많은 양의 눈물을 쏟아낸. 내 눈빛의 일부가 된 그런 뜨거운 여름이 있었음을. 나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날 이후의 나는 같은 사람일 수 있을까."

 

이렇게 시작하는 글은 캐나다 로키산맥을 트레킹하는 저자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저자는 고시 공부라는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 합격의 영광을 얻는다. 그 후 그녀가 찾은 것은 여러 나라를 향한 여행이다.

 

마음껏 음악을 듣고, 온 힘을 향해 달리고, 한없이 몸을 혹사시키기 위해 떠난 여행. 그러면서 그녀는 평범한 일상의 탈출을 시도한다. 블로그에 여행에 대한 기대를 남기고 캐나다로 떠났건만 그녀의 소식은 감감하다. 걱정이 된 지인들은 그녀의 행방을 묻지만, 정작 저자는 자신의 상황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했다.

 

심지어는 부모님에게조차 거짓말을 할 정도의 극한 상황은 무엇일까? 저자는 캐나다의 핼리팩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가 부러지고 장기가 파열되며 턱이 나가는 상처를 입는다.

 

앰뷸런스에 실려가서 두 번의 큰 수술을 받고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그녀는 스물 몇 해라는 짧은 자신의 삶과 여행을 회상한다. 책의 구성은 캐나다 여행 이야기와 병원에 누워 있는 두 달간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방식이다.

 

턱 이식 수술을 하고 배와 다리, 턱 등에 보기 싫은 흉터를 얻었음에도 현재의 그녀는 씩씩하다. 비록 외모는 예전의 모습에서 완전히 바뀌었지만 마음은 더 큰 바다를 얻었다고 할까.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수도 없이 눈물을 흘리고 마음 아파하는 과정을 거쳤다.

 

아무리 여행이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즐기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고라는 극한 경험은 웬만하면 겪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고시 공부와 마찬가지로 여행도 극기훈련 하듯이 빡빡하게 다녀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은 예기치 못한 사고를 불러온다.

 

처음에 그녀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 끝없이 절망하고 하늘을 원망했다. 전에는 뭐든지 다 가질 수 있었던 자기의 처지가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조금 마음을 늦추고 한 번 더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캐나다 오지의 병원에서 그녀는 원망만 할 게 아니라 살아있음을 기뻐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발벗고 도와준 착한 사회복지사, 무료로 수술을 해 준 외국 병원의 사람들, 식사 시간마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제공해 주는 호텔의 주방장 등 캐나다도 우리나라처럼 도움을 주는 이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큰 분노와 억울함으로 주변 이들에게 짜증을 부리고 싶었던 그녀도 차츰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퇴원을 하고 다시 걸을 수 있게 될 때까지 병원 근처의 호텔에서 요양을 하던 중 한 청소부가 말을 던진다. 어쩌다가 그렇게 큰 상처를 입게 되었느냐는 물음에 여행을 하다가 다쳤다고 답하는 그녀. 다시는 캐나다에 오고 싶지 않겠다고 위로를 던지는 청소부의 이야기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글쎄요. 그렇진 않아요. 오히려 다시 와야만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특히 사고가 난 다리에는 꼭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보고 싶어요. 내 인생이 갑작스레 멈춰 선 그 장소가 과연 어떤 곳인지. 언젠가 반드시 할 거예요. 그 다리에서부터 중단된 여행을 다시 시작해 목적지였던 플레이즌트 베이까지 갔다가 핼리팩스로 돌아오는 것. 그렇게 해야만 이번 사고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는 두 달의 해외 투병 끝에 목발을 짚고 얼굴에 흉터를 남긴 채 귀국하게 된다. 공항에서 그녀를 맞이하는 가족들은 180도 변한 저자의 모습에 눈물만 흘린다. 한국에 와서도 투병 생활은 여전하다.

 

목발 짚고 걷기를 6개월, 다시 한 번의 수술을 경험하고 나니 상처받은 것은 몸뿐만이 아니다. 마음 구석구석도 큰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듯한 상처에 몸서리쳤다. 저자는 몸을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답답함, 가족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죄책감보다 자신을 힘들게 한 건 예전 모습을 찾아볼 길이 없을 정도로 변한 얼굴과 끔찍한 흉터가 남은 몸이라고 말한다.

 

겨우 스무 살 초반의 여성에게 얼굴과 몸에 남은 깊은 상처란 치유되기 어려운 아픔일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다행스럽게도, 그리고 놀랍게도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정신적으로 아주 건강한 사람이었다. 캐나다 병원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심리 치료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는데, 의외로 행복에 대한 욕망이 다시 꿈틀거렸다.

 

이제 그녀는 캐나다 여행을 떠나기 전과 매우 다른 모습으로 세상을 살고 있다. 거추장스러운 목발과 깁스도 작별했지만 몸에 남은 상처처럼 그녀의 사고 경험은 커다랗게 각인되어 마음에 남았다.

 

여행 중 발견했던 새로운 자아는 비관에 젖어 눈물만 흘리는 못난 모습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예상치 못한 인연과 기회가 수시로 찾아오는 것이 인생이라는 확신, 나는 많은 복을 가진 사람이라는 감사, 삶에 대한 긍정과 정열을 잃지 말자는 결심까지, 비록 사고가 있었지만 그녀는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또 경험했다.

 

이렇게 얻은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일에 주력하기 위해 그녀는 다시 사법 연수원에 나가고 공부를 하며 세상을 돌아보고 있다. 책의 마지막에서 그녀는 말한다. 자신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날 이후의 자신은 같은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내 아픔의 역사에 감사한다. 다시금 허락된 생이 너무나 간절해졌으므로."

 

이렇게 끝나는 글은, '사람은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누구나 아픔을 두려워하지만 인간은 그걸 극복할만한 충분한 긍정의 힘이 있다고 믿고 싶다.


여름을 건너다 - 핼리팩스에서 생긴 일

남혜영 지음, 강(2008)


태그:#여행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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