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이요~꿀~ 산지에서 직접 따온 꿀 딸기요~."
샤워하고 후딱 옷 갈아입자마자 마구마구 달려갔다. 한 바구니 3000원을 외치는 아저씨의 산지직송 꿀 딸기 맛을 한 달 전부터 보고 싶었는데 왠지 마지막 기회다 싶은 느낌이 엄습해 온 것이다. 먹고 싶다는 일념으로 동네를 벗어나려던 트럭을 잡아 세웠다.
"어서 오세요."
"이거 전부 3000원이에요?"
"아뇨, 큰 건 5000원이요."
어라? 한 달 전에는 큰 게 3000원 했던 것 같은데... 약간 서운해지려던 찰나, 마침 지나가던 아주머니 한 분이 오셔서 딸기를 구경하신다. 아저씨가 아주머니에게 딸기를 권하는 사이, 한 달 전에 사먹을 걸 잘못했다는 후회가 엄습했지만 어차피 마트보다 싸게 파니 사기로 했다.
"딸기가 실려 있는 게 별로 없네요? 벌써 많이 파신 건가요?"
"그럴 리가요(웃음). 우리가 하우스 딸기 팔기 시작한 게 두 달 전부터인데 지금 다 떨어져가죠. 요즘 나오는 건 끝물 딸기예요."
"하루에 여러 동네를 돌아다니시면 보통 얼마나 파세요?"
"별로 못 팔아요. 사실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 요즘 너무 어려워요."
새벽 4시 반에 일어난다는 아저씨. 팀장이 산지에서 직접 가져온 딸기를 나눠받아 여러 동네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신다고. 잘 가시라는 인사를 하고 아저씨가 특별히 골라준 똘똘하게 생긴 딸기 한 봉지와 함께 거처로 왔다. 끝물 딸기라니... 조금만 더 참았으면 한동안 딸기 못 먹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한 달 전에 집을 나왔다. 제대하고 아르바이트 조금 하다가 영화 시나리오 습작하면서 불러주는 작품 있으면 연출부에 들어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영화판도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 군대 가기 전에는 상승세였는데 '유배지'에서 2년 생활하는 동안 이리도 악화될 줄이야. 제작을 앞두고 엎어지는 영화가 속출하고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아는 어떤 선배는 크랭크인 하는 날 작품이 취소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계속되는 제작비 가뭄.
나도 한동안 집에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하고 싶어 미치겠는데 불러주는 곳이 없어 아무리 열악한 처우라도 각오했건만. 시간만 계속 흘러갔다. 스스로 돈 벌어 공부는 하고 있었지만 나이를 계속 먹어간다는 사실이 가장 큰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언제까지 집구석에 처박혀 있어야 하나. 부모님이 제작자도 아니고. 집을 나오기로 했다. 아무런 대책도 없고 모아놓은 돈도 없이 방 구해서 생활비 10만원 가지고 집을 나왔다. 될 대로 되라지.
어차피 영화인은 작품 없으면 백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평생 몇 작품이나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이렇게 사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일까. 이명박 정부 들어서 가장 웃긴 것은 국민에게 획일적인 노동 패턴을 강요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어이없나. 한나라당 소속 어떤 의원이 전 국토에 망치 소리가 울려 퍼지게 해야 한다고 말했을 땐 뒷목을 부여잡았다. 그럼 시나리오는 누가 쓰고 디자인은 누가 하며 연구 활동 같은 건 또 누가 한단 말인가.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지금 정부가 일자리도 못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일자리가 고작 건설 일용직이냐. 욕 나온다 정말.
생활비 10만원 들고 독립... 어려운 경제 실감
사실 생활비 10만원만 들고 집을 나온다는 건 굉장히 무모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집을 나오기 얼마 전에 경제 포럼에 갔다가 뒤풀이 자리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학자금 대출 이자로 그로기 상태에 빠진 어느 학원 강사분이 있었는데 그분의 동료가 며칠 전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솔직히 나도 그런 심정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니까.
대다수 국민에게 일을 못한다는 것은 빈곤한 생활을 의미한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런 빈곤이 계속되면 정말이지 굶어 죽든가 안 좋은 유혹에 빠질지도 모른다. 미국만 봐도 빈곤 때문에 얼마나 많은 범죄와 마약이 판을 치는지. 또 노숙자들은 얼마나 많아지는지. 결국 빈곤이 역사상 최악의 대량살상 무기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일자리 부족은 빈곤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의 죽음도 불러온다고 봐야 한다. 엠마 골드만은 말했다. 더 이상 꿈꿀 것이 없음은 죽음을 의미한다고. 사회가, 아니 정권이 일자리 창출은커녕 획일적인 삽질 가치관을 강요하며 젊은이들의 꿈과 상상의 힘마저 억누르고 있는 것은 커다란 문제다. 꿈을 꿀 수 없는 사회는 생명력 없는 화석과도 같다. 꿈꾸고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사회적 에너지는 고갈된 것일까. 세상이 이렇다고 무력하게 청춘이 시들어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견딜 수가 있어야지.
사실 집을 나오고 나서 내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는데 변함없이 불황이 계속 이어지다보니 언제 거리에서 노숙할지 모를 극한 상황에 있긴 하다. 얼마 전 <오마이뉴스> 생나무 기사들을 훑어보다가 노숙자 보호소에 계신 분이 올리신 글을 봤는데 그 또한 내 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려 하고 에너지를 쥐어짜다 보니 글도 더 많이 쓰게 되고 무력감은 조금 덜한 듯하다. 우울증은 어쩔 수 없지만.
그러던 중 KBS에서 연중기획으로 <일자리가 희망입니다>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게 뭘까 싶었다. KBS라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프로그램에 참여해보고 싶었다. 노동부 장관이 나와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지도 궁금했다.
생방송 들어가기 전에 나와 비슷한 처지인 백수연대 회원들을 만났다. 우리는 모두 백수라는 동질감에 담배도 같이 피우며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사실 프로그램에서 우리들을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현재 구직을 위해 노력하는 백수들과 일자리 나누기를 시행하는 회사 직원들을 모아놓고 앞으로의 희망을 말해보겠다는 거였다.
두둥. 몇 번의 리허설을 거쳐 방송이 시작됐다. 첫 화면으로 일거리 끊어진 새벽 5시 인력시장을 보여주며 실업자 350만 시대임을 강조하는 내용과 함께 약간의 기대감을 품게 만들면서(취업이 안 되다 보니 구직 단념자가 14만 명을 넘었다는 소식이 흘러나온 지가 작년인데 그동안 정부는 뭘 한 것인지).
그런데 방송이 진행될수록 내용이 가관이다. 현장에 나가 있는 팀이 어떤 시민을 인터뷰 한다고 말하면서 화면이 전송됐는데 일반인인 줄 알았던 사람이 마치 홈쇼핑 판매 직원처럼 유창한 언변으로 막힘 없이 무언가를 읽어 내려가듯 술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노동부 장관 할아버지. 이분은 이날 방송에서 기업이 어려우면 해고도 할 수 있다는 발언을 여러 번 해서 뒷골을 당기게 만들었다.
패널로 나와 발언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정부 정책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경영자 처지에서 당연한 이야기만 할 거라면 노동조합 출신 CEO라는 사람은 뭐 하러 나온 건가. 게다가 자기 회사 이야기를 하면서 은근슬쩍 간접 홍보까지.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시민단체에서 나왔다는 사람도 정부 정책에 대한 신랄한 질책은 하지 않았다. 뭐야, 희망을 말하겠다더니 결국 자화자찬하고 대충 끝내시겠다? 그럼 그렇지. 뻔한 내용들을 늘어놓으면서 지루한 시간이 이어지기 일쑤였고 조명이 너무 밝아 방송이 끝나니 편두통까지 생기고야 말았다.
게다가 청년 백수로 나온 패널들 중에서 발언권을 얻은 사람들도 프로그램 시작하기 전 미리 정해진 채 질문 내용을 파악하고 조율을 거쳐 방송에 나갔다. 물론 만족스럽지 못한 답변과 대안 없음에 일부는 불만에 찬 표정을 지으며 애초 말하기로 한 것보다 더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내기도 했다.
이를테면 젊은이들이 자아를 실현하기 어렵고 생계를 위해 돈의 노예가 되어 하루하루 살며 꿈을 포기해야 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 그러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노동부 대변인의 말이 걸작이다. 앞으로 국가 예산을 들여 적성검사를 더 많이 실시하겠단다. '여기 적성검사 한 번 안 받아본 사람 있으시면 손들어 보세요' 물어보고 싶었는데 참았다. 무슨 농담 따먹기 하러 나온 것도 아니고, 먹고 살기 급급해 자아실현이 안 되는 사회 구조를 말했더니 웬 적성검사 타령인지.
상품권 받기 위해 방송 패널로 출연, 근데 이건 뭐지?
전체적으로 봤을 때 여러모로 황당한 방송이었다. 설문 조사 가운데 앞으로 한국의 기대 산업 중에 3위로 나온 것이 토목 건설이었다. 이게 뭐야? 이것도 삽질 경제를 위한 떡밥인가? 게다가 슬슬 끝나갈 시간이 되면서 튀어나온 내용들은 이 프로그램이 도대체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지금 불황이라 장사 안돼 죽을 것 같다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는 판에 청년 실업 돌파구로 창업을 말하는 것도 웃겼고(창업도 돈이 있어야 하지 나 원 참...), 취업 박람회를 생중계하는 자리에 나타난 사장의 말도 이상했다. 뭐? 본인들은 재취업자를 주로 뽑고 있다고? 그럼... 신규채용은 거의 안 한다는 말인데. 그렇게 방송은 희망을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참여했던 청년 백수들의 가슴에 못을 박으며 끝났다.
열심히 살아라, 희망을 품어라고 말하기 전에 그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정책을 펼 생각은 안 하고 어려운 책임은 다 실업자들이 지라는 건지. 자본주의는 원래 부침이 심해 결국 경기가 살아날 테니 버티라고? 차라리 죽어서 천국 갈 거란 소릴 하시지.
대한민국처럼 사회 안전망이 허술한 나라에서 당장 죽게 생겼는데 뭔 희망의 소리를 전파하나 궁금해 참여했던 방송은 커다란 실망만 안겨줬다. 이날 출연료로 백화점 상품권을 허탈함과 함께 받아들고 방송국 로비를 나오다 보니 어쩌다 KBS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답답해지기까지 했다. 어라, 그런데 이게 뭐지?
벽에 붙어 있는 노조의 대자보와 그 밑에 놓여 있는 소식지들은 지금 KBS가 겪고 있는 진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방송이 소통의 공간이 되기보다 단순한 전달의 도구로 활용될지 모른다는 불안은 이날 프로그램을 통해 증명된 셈이었다.
어쩌면 나는 백화점 상품권을 받기 위해 정권 홍보를 위한 개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아, 이게 다 불황 때문이야. 돈이 없어서 그만…(사실 방송 참여하기 전에도 출연료가 현찰인 줄 알았다). 차라리 그 시간에 국회 앞에나 가 있을 걸... 씁쓸한 후회를 만끽하며 집에 돌아와 아침에 사놓고 간 딸기를 두통약과 함께 먹고 인증샷을 찍은 뒤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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