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우리는 살아가면서 의무라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성장시켜 주는 지를 깨닫고 새삼 놀랄 때가 많다.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탄줘잉 편저, 김명은 옮김)라는 책은 일찍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광고도 요란했지만 시류에 이끌려 책을 고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성격 때문에 서점에 가더라도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다가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 권장도서 가운데 하나인 이 책을 구입했다.

 

별로 내키지도 않는 책을 의무감으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에 내심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도종환 시인의 추천사와 저자의 편지를 차례로 읽어내려 가면서 나도 모르게 서서히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두려움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는 저자의 고백은 나의 감성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내게 있어서도 삶은 늘 두려운 것이었다. 미래가 불확실한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은 때로 공포이기도 했다. 나는 그 두려움과 공포를 마주 대하고 헤쳐 나가면서 예기치 못한 기쁨과 슬픔을 맛보며 삶의 경이로움을 체험하고 있다.

 

저자가 잔잔한 목소리로 전해주는 따뜻한 이야기들은 내 삶에서도 일어나는 일상사들이 많아 깊은 공감을 자아냈다. 몇 해 전 나는 중학교 동창모임을 주선했다. 헤어진 지 30년이 넘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나의 온 에너지를 다 쏟아서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친구들을 하나하나 찾아냈다. 그 일은 힘들면서도 보물을 찾아내는 것처럼 즐겁고 행복한 작업이었다.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친한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고 애통해하던 친구의 남편 때문이었다. 그리운 친구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서로 만나게 해주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싶었다.

 

5분 거리의 한 동네에 살면서도 모르고 지내던 친구들, 서로를 궁금해 하면서도 가슴으로만 그리다가 만난 친구들은 무척이나 행복해하면서 고마워했다. 그러나 정작 고마웠던 것은 나였다. 연락을 받고 먼 곳에서 달려와 준 그리운 친구들, 곳곳에서 조용히 자기 몫을 다하며 살아온 그들이 있어 행복했다. 그렇게 시작된 동창들의 행복한 만남은 해마다 이어지고 있다. 저자도 그런 경험을 했던 모양이다. 20년 후,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친구를 목마르게 기다렸지만 결국 오지 못하고 말았다. 깊은 공감을 자아내는 대목이었다. 그건 깊은 슬픔이었다.

 

이 책 속에는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들도 많이 들어있다. 그러나 일상에서 놓치고 있는 귀한 이야기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실천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해주어 고마웠다. 그 중에서 나에게 가장 깊은 감동을 주었던 이야기는 "은사님 찾아뵙기"였다. 어릴 때 다니던 학교 사택에 아직도 살고 계시는 선생님.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는 제자들에 대한 기사와 사진을 벽 가득 붙여놓고 있는 마리아 선생님. 그 선생님을 찾아온 제자가 돌아가는 길에 보낸 단 한 줄의 전보 글은 나를 한없이 울게 했다.

 

"선생님, 저희를 용서하세요."

 

마리아 선생님은 내가 갈 길을 제시해 주셨다. 나는 지금 가족을 떠나와서 살고 있다. 텅 빈 방안을 바라볼 때마다 무엇으로 채울까 고민했다. 그런데 마리아 선생님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 살아있는 동안 내가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내가 만난 아이들을 사랑으로 가르치고 떠나보낸 다음에도 하나하나를 그렇게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건 교직에 있는 우리들만의 특권일 것이다. 내게 맡겨진 아이들은 내 인생의 작품이다. 나의 온 힘과 온 정성을 다하여 사랑으로 곱게, 아름답게 빚어내리라.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기술이다. 가족 외에는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을 것이며 좋아해 줄 사람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언청이 제자의 귀에 대고 "네가 내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해 주는 선생님.

 

선생님의 그 한마디가 상처받았던 어린 영혼을 따스한 햇살처럼 비추어주고 어루만져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주는 이 신비는 교사인 내 역할의 무거움을 새삼 실감하게 해주었다. 교사는 지식보다도 사랑을 먼저 가르쳐주어야 함을. 나 역시 존경하는 은사님께서 건네주신 "넌 할 수 있을 거야." 라는 한마디로 힘든 고비마다 좌절하지 않고 일어설 수 있었다.

 

"일기와 자서전 쓰기"에서 42년의 결혼생활이 오롯이 담겨있는 아내의 일기장은 내게 회한으로 남아있는 기억을 떠올려주어 가슴이 저렸다. 시작해서 몇 달 만에 그쳐버렸지만, 아이들에 대한 일기는 소중한 삶의 궤적이었다. 지금은 조각으로 남아있는 것들을 읽다보면 행복한 기억들로 눈물이 솟는다. 그때 왜 계속하지 못했을까. 아니, 더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다시 시작해야겠다.

 

"정성이 담긴 선물하기"에서는 아버지가 간직하고 있는 선물들이 깊은 공감으로 가슴을 울렸다. 나는 특별한 날에 아이들이 나에게 보내준 편지를 모두 간직하고 있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편지는 큰아이가 글을 막 깨우치고 처음으로 써주었던 편지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엄마, 아빠. 나를 똑똑하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이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꼈던 모양이다. 나는 부끄럽게도 부모님에게 편지 한 장 써드린 기억이 없다.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 그 경험이 나의 미래와 현재에 골고루 영향을 미친다는 것, 이런 것을 생각하면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사는 일상들, 내가 듣는 소리들, 내가 보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가. 이 책은 한 사람의 좋은 제자로, 좋은 자녀로 커나가는 데 있어 좋은 스승과 좋은 부모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지도 새삼 깨닫게 한다. 아이들에 대한, 부모에 대한, 배우자에 대한, 스승에 대한, 친구에 대한, 자신에 대한, 자연에 대한 그리고 이웃사람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귀한 글들은 읽는 내내 가슴에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책은 저자와 독자가 함께 완성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독자가 화답하지 않는 책은 절반의 성공밖에 되지 않는다. 저자가 들려주는, 내 일기장을 채울 일상의 조각들인 따뜻한 이야기들은 독자인 내가 받아서 꽃피울 때 비로소 그 생명력이 살아날 것이다. 가슴으로 깊이 음미했던 저자의 이야기들을 이제는 내 삶에서 하나하나 실천해 보리라. 그동안 일상에 쫓겨서 잊고 있었던 소중한 것들을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을 때에야 너무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후회하지 않도록 온 가슴으로 사랑하며 살리라. 그것이 살아있는 동안 내가 꼭 해야 할 일들이 아닐까 한다.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 (양장) - 우리의 일기장을 채울 따뜻한 일상의 조각들

탄줘잉 엮음, 김명은 옮김, 위즈덤하우스(2007)


#선생님#제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