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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보다 남자'에서 금잔디(구혜선)를 괴롭히는 '진선미' 3인방. 왼쪽이 장자연이다.
'꽃보다 남자'에서 금잔디(구혜선)를 괴롭히는 '진선미' 3인방. 왼쪽이 장자연이다. ⓒ lbs

"모 감독이 태국에 골프 치러 오는데 술 및 골프 접대 요구를 받았다."
"룸살롱에서 술 접대를 시키고 잠자리까지 강요받았다."

탤런트 고 장자연씨가 생전에 연예계의 접대 문화를 고발한 문건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습니다.

문건의 '진본'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KBS가 15일 "문건에 실명이 거론된 사람은 언론계 유력인사, 기획사 대표, 드라마 감독, PD 등 열 명 안팎이고, 상당수는 이름 석 자만 대면 알 만한 사회 지도층 인사"라고 '맛보기 보도'를 한 뒤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장자연 문건'에 거론된 인물들이 누구냐는 것이고, "연예계의 잘못된 관행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언론사들이 리스트를 빨리 공개해야 하지 않냐"는 항의 댓글도 적지 않습니다.

익히 예상하시는 대로 <오마이뉴스>에도 "증권사 사설정보지(일명 찌라시)에는...", "모 언론사가 취재한 바에 따르면…"이라는 식으로 '장자연 리스트'에 포함됐을지 모를 분들의 정보가 흘러들러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이걸 공개하는 게 옳을까요? 언론계의 가장 큰 고민도 이것입니다.

<시사인> 고재열 기자는 블로그에 리스트에 언급되는 사람을 ▲ 일선 드라마 PD와 제작자 등 현업인 ▲ 광고주 ▲ 언론사 경영진 등 세 부류로 나누고 "앞의 두 부류는 업무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연예인을) 부를 수 있는 '최소한의 개연성'은 있지만, 마지막 부류는 그런 개연성이 전혀 없다"며 "언론사주 문제를 정면으로 문제제기하는 언론사가 나오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런 언론사가 없더라도, 기사가 나지 않더라도 유추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며 "이와 관련해서 함구하는 언론사가 있다면 의심의 여지가 생길 것"이라고 한마디 보탰습니다.

 7일 자살한 장자연의 미니홈피. 지난 해 4월 모습을 담은 사진 아래 우울한 글이 실려있어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7일 자살한 장자연의 미니홈피. 지난 해 4월 모습을 담은 사진 아래 우울한 글이 실려있어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 장자연

시사평론가 진중권씨도 진보신당 당원게시판에 "그 명단에는 모 신문사주 아들놈도 들어가 있다고 하고, 국회의원 놈들도 들어가 있다는 얘기도 있고… 들리는 얘기가 심상치 않다"며 "연예계의 노예계약이라는 불법과 관련된 명백한 범죄행위와 관련이 있고, 연기자의 자살이라는 극단적 사태를 결과로 낳은 사건이니만큼, 성 접대 받은 인간들 명단은 반드시 공개해야 할 것 같다"는 주장을 남겼습니다.

아예 대놓고 이렇게 얘기하시더군요.

"'국민의 알 권리' 운운하며 강XX(무죄추정 원칙에 따라 피의자 이름을 임의로 가렸음 - 필자 주)의 얼굴을 공개했던 언론들, 이제야말로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서 그 명단들 공개 좀 했으면 좋겠네요. 이미 모든 언론사에서 그 명단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중략) 불법이라서 안 된다구요? 강XX 얼굴 공개하는 것은 어디 합법이라서 그렇게 했나요. 명예훼손으로 걸릴까봐 겁나서 못하겠다구요? 그렇다면, 강XX 얼굴 깐 것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현행법으로 처벌받을 것을 각오하고 한 장한 행위가 아니라. 그렇게 해도 강XX은 살인범이라 고소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에서 한 얄팍한 행위였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말이 필요 없습니다. 명단들, 갖고 계시죠? 까세요."

다행히도(!) <오마이뉴스>는 연쇄살인 피의자 강XX씨의 이름과 사진을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논란이 되는 사건에 대해 여론에 휩쓸리지 않고 나름대로 일관된 원칙을 지킴으로써 이런 식의 물음에 당당할 수 있다는 게 이 순간 얼마나 고맙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독자들의 기대에 반하는 답변이겠지만, <오마이뉴스>는 이번 사건을 아주 신중하게 보도할 듯합니다. 명예훼손 소송이 겁나서가 아니라 진실이 어느 정도 골격을 갖추지 않는 상태에서 관련자들의 신원을 공개하는 것이 무책임하지 않나 하는 판단입니다.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에는 제가 호의적으로 보지 않는 언론사 고위간부의 이름도 올라 있습니다. 언론계 일각에서는 "이번 기회에 XXXX 일당을 일망타진해야 한다"는 식의 흥분 섞인(?) 반응도 나오고 있지만, 그런 분들의 혐의를 밝혀내지 못한다면 '미운 놈 손봐주기' 이상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

 KBS 월화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조연 써니로 출연했던 장자연 씨.
KBS 월화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조연 써니로 출연했던 장자연 씨. ⓒ KBS
생각할수록 답답한 것은 이번 사건의 진실이 가려지지 않고 영영 미궁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겠죠. 과거에 있었던 일을 유추할 만한 단서들이 남아 있다고 해도 장씨가 이 세상에 없는 상황에서 구체적인 혐의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아닌 얘기로, 당사자들이 "생사람 잡는다, 증거 있냐"고 항변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씨와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의 관계를 용기 있게 고백할만한 '제3자'가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지금까지 돌아가는 분위기로는 이것도 녹록치 않습니다.

"너희들 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냐"고 비난하실지 몰라도 언론사의 취재력에도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이런 건 사실 수사기관의 몫인데….)

이번 사건과 엇비슷한 예로, 2005년 1월 연예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연예인 X파일' 사건이 있습니다.

한 광고기획사가 광고모델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해 사외 전문가들을 심층 인터뷰한 내용이 인터넷에 무차별 유포된 사건으로, 그 내용을 본 사람들에게 '연예계는 그렇고 그런 곳'이라는 환멸을 많이 심어줬습니다.

언론의 실명보도가 없었음에도 알 만한 사람은 파일에 담긴 루머를 다 알게 됐지만, 그 사건은 연예계의 자정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실체도 불분명한 '대중들의 알 권리'는 충족됐을지 몰라도 100여 명 안팎에 이르는 연예인들의 인권은 난도질이 되어버렸습니다.

최악의 경우는 대중들의 알 권리가 충족(?)된 후 여론의 관심이 시들면서 정작 장씨처럼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 배우들'을 보호하기 위한 대안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는 것이겠죠.

'장자연 리스트'에 대한 지나친 관심 때문에 주객이 전도되면서 이런 상황이 빚어지지는 않을까요?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아직도 리스트 공개가 정말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장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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