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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나절, 아주 느린 걸음으로 저희 집 앞을 산책하는 유리재의 조규석 선생님을 요즘 더욱 자주 봅니다. 오늘은 저와 마주친 조 선생님이 요즘 더욱 자주 산책에 오르는 이유를 말했습니다.

 

"저는 1년 중 4월의 지금이 가장 좋아요. 지난 겨울동안 온 대지에 생명이라곤 없는 듯 잿빛이었다가 지금 온갖 새순들이 돋고 있거든요. 온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활'의 기적을 목도하는 듯합니다."

 

 모티프원 정원의 땅을 뚫고 순을 내민 옥잠화. 조규석선생님은 이 광경들을 '찬란한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모티프원 정원의 땅을 뚫고 순을 내민 옥잠화. 조규석선생님은 이 광경들을 '찬란한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 이안수

 

밤이 이슥한 시간 앞집의 한미란 선생님께서 조도가 낮은 등이 켜진 저의 서재로 오셔서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보여드릴게 있다고 저를 재촉했습니다. 늦은 밤 한 선생님께서 이렇게 서두를 수밖에 없는 그 일이 부디 염려할 만한 '별일'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뒤를 따랐습니다.

 

"이것 좀 보세요. 흰제비꽃입니다. 씨를 뿌린 적도 없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예쁘게 꽃을 피웠습니다."

 

한미란 선생님은 청향재 집 모퉁이 블록 사이에 피어난 흰제비꽃을 가로등 아래에서 발견하고 그 기쁨을 가눌 길 없어서 다급하게 저를 찾았던 것입니다. 조규석 작가님에게 봄은 작업실에 몸을 둘 수 없도록 안달 나게 하는 '가슴 벅찬 부활'이고, 한미란 선생님에게 봄은 '다급한 기쁨'입니다.

 

 한미란 선생님을 늦은 밤에 거의 울먹이게 만들었던 흰제비꽃
한미란 선생님을 늦은 밤에 거의 울먹이게 만들었던 흰제비꽃 ⓒ 이안수

 

작년 4월 초, 바로 이맘 때 야생화전문가를 모시고 파주 광탄면의 소령원(昭寧園)과 보광사로 야생화답사를 갔었습니다. 조선 제21대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묘소인 소령원 주변은 큰 전나무 숲 사이로 갓 봄기운이 돌았습니다. 숲에는 겨울바람에 휩쓸리며 부서진 낙엽과 썩어 절로 떨어진 잔가지들만이 뒹굴고 있었습니다. 영조께서 지극한 효심으로 조성하고, 문화재의 보존관리를 위하여 학술답사외에는 공개를 하지 않는 소령원의 넓은 잔디밭도 여전히 누른빛이었습니다.

 

 파주 광탄면의 소령원
파주 광탄면의 소령원 ⓒ 이안수

 

봄 야생화를 관찰하기에는 이미 한 주가 늦었다며 다급해하시는 선생님의 재촉이 도대체 믿기지 않았습니다. 야생화는 차치하고 도대체 어디에서 푸른 순이라도 관찰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습니다.

 

 파주 광탄의 소령원 숲. 여전히 부서진 낙엽만 뒹구는 갈색 숲이다.
파주 광탄의 소령원 숲. 여전히 부서진 낙엽만 뒹구는 갈색 숲이다. ⓒ 이안수

그런데 허리를 굽히고 누런 낙엽사이에 눈의 초점을 맞추자 찬 기운을 머금은 순한 바람에도 몸을 떨고 있는 들꽃들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것은 지난 밤 한미란 선생님의 흰제비꽃의 발견처럼 제게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제가 여전히 겨울이라고 믿었던 3월부터 산과 들에서 온갖 들꽃들이 이미 꽃을 피우고 수정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생화는 몸을 낮추어야 더 잘 보인다.
야생화는 몸을 낮추어야 더 잘 보인다. ⓒ 이안수

 

저는 이 야생화탐사에서 적지 않은 새로운 발견을 했습니다. 들꽃은 생각보다 몸집이 훨씬 작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허리를 깊숙이 굽히거나 대지에 무릎을 굻어야 모습을 드러내고 꽃은 돋보기의 힘을 빌려야 온전히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이른 봄 일찍 꽃을 피우고 수정을 한 다음 꽃을 지우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시치미를 뚝 뗀다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저처럼 게으른 사람이 날씨가 포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이른 봄의 소박한 들꽃을 구경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그 이름이 소박하고 아름답습니다. 얼음새꽃, 꿩의바람꽃, 중의무릇, 노루귀, 개불알풀꽃(봄까치꽃), 별꽃, 얼레지, 괭이눈, 깽깽이풀, 꽃마리, 솜방망이, 각시붓꽃, 돌양지꽃….

 

 들꽃은 낙엽 한장 보다도 훨씬 몸집이 작은 것이 많다
들꽃은 낙엽 한장 보다도 훨씬 몸집이 작은 것이 많다 ⓒ 이안수

 이른 봄의 새 순
이른 봄의 새 순 ⓒ 이안수

 

이 날 야생화 선생님을 따라나서지 않았더라면, 이미 발밑으로 몰래 온 봄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여태 몸집이 한 길쯤은 넘는 진달래와 개나리, 벚꽃이 활짝 피어야만 봄이 오는 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생화 탐사
야생화 탐사 ⓒ 이안수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에도 포스팅됩니다.


#야생화#소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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