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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곡을 기름지게 하는 비가 내린다(아니, 내려야 한다)는 곡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상 기온에 봄인지 여름인지 구분하기 어려운데 때마침 '곡우비'가 내렸습니다. 미세 먼지로 목도 마음도 칼칼한데 내린 비는 '단비'였습니다. 옛 사람들이나 농사 짓는 사람들은 이즈음 내리는 비를 농사일에 쓰는 단비로 생각하겠지만, 회색 도시에 갇힌 우리네는 더러운 먼지 쓸어내릴 '청소비'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곡우비 내리는 숲길, 우중산책 곡우 즈음 숲은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진다. 때마침 내린 비를 달게 맞으며 마을길과 숲길 산책을 나섰다.
▲ 곡우비 내리는 숲길, 우중산책 곡우 즈음 숲은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진다. 때마침 내린 비를 달게 맞으며 마을길과 숲길 산책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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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우 즈음이 되면 숲이 하루가 멀다하고 달라집니다. 마을 곳곳의 나무들에서 시작한 초록 물빛은 북한산 기슭부터 물들이더니 어느새 저만치 물러나 이제 꼭대기 부분만 남았습니다. 이 곡우비가 그치면 더 푸르른 빛 가득하겠지요. 그래서 옛사람들은 잔뜩 물오른 나무의 수액을 받아 '곡우물'이라며 마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보다 더 맛좋은 음료들이 많으니 애꿎은 나무를 볼모 삼을 필요는 없겠지요.

아이들과 함께 곡우 절기에 맞는 속담을 찾아 보았습니다.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 자나 마른다.

산내린 바람(높새바람) 맞으면 잔디 끝도 마른다.

곡우에는 눈이 와도 풍년이 든다.

곡우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

'곡우(穀雨)'라는 이름에 걸맞게 모두 농사와 '비'에 대한 속담이었습니다. 곡우네는 눈이 와도 풍년이 든다니 그만큼 '물'이 필요한 봄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생활에 맞는 새로운 속담도 지어 보았습니다.

곡우 즈음 프로야구 때문에 울고 웃는다.

곡우가 되니 숲이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진다.

곡우 즈음 날씨가 변덕이다.

곡우비에 잠바 다시 꺼내 입는다.

곡우가 되면 지구의 날 생각난다.

곡우비가 안오면 길바닥과 자동차에 모래먼지 가득하다.

곡우비가 안오니 목이 붓고 따끔따끔 아프다.

지난주까지 만해도 하루 최고 기온이 25도를 넘더니만, 뚝 떨어져 14도 안팎입니다. 비까지 오고 해서 산책하기 모두 어렵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겠지만, 함께 '우중 산책'을 나섭니다. 오늘 벼리활동 주제는 '미국 제비꽃과 중국 꽃매미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날마다 푸르러지는 마을과 숲속에 나타난 놈들입니다.

어느 새 우리 마을과 숲길을 점령해버린 미국 제비꽃 크고 소담한 꽃송이지만, 원산지가 북아메리카라는 이유 때문인지, 왕성한 번식력 때문인지 반갑지 않은 봄손님이다.
▲ 어느 새 우리 마을과 숲길을 점령해버린 미국 제비꽃 크고 소담한 꽃송이지만, 원산지가 북아메리카라는 이유 때문인지, 왕성한 번식력 때문인지 반갑지 않은 봄손님이다.
ⓒ 한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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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제비꽃은 해방 전후 우리나라에 들어온 귀화식물이라고 합니다. '종지나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나물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을 보니 어린 순을 나물로 먹기도 하나 봅니다. 그런데 이 놈이 우리 마을과 숲속 곳곳을 장악해 버렸습니다. 제가 이곳에 자리잡고 아이들과 생태 놀이 활동을 2003년부터 했으니 7년이 되었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 제비꽃은 없었던 놈입니다. 그런데 3, 4년 전부터 하나 둘씩 보이더니 이제 온통 미국 제비꽃밭입니다. 그 왕성한 번식력은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 마을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생각하면서 찾아낸 것이 바로 원예 식물입니다. 잘 가꾸어진 정원 앞 화분에 봄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팬지와 같은 원예용 식물들 중 하나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중 가장 번식력이 뛰어나고 꽃도 크고, 잎도 큰 이 놈이 숲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지요. 이런 과정을 생각해보면서 의문이 났던 것은 원예용 꽃으로 요즘에는 우리 야생화도 많이 심습니다. 금낭화나 매발톱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7년 전 화단에도 있던 매발톱이며 금낭화는 개체수가 그다지 늘어나지 않습니다. 번식이 이루어지는 장소도 한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 제비꽃, 밟아버려! 아이들이 꽃을 밟아버리고 싶어 한다. 뭇 생명이 다 소중할 터인데, 토착 식물을 다 몰아내는 미국산 제비꽃이라 하여, 숲과 나무를 고사시키는 중국산 꽃매미라 하여 죽이고 없애야 할 대상이라고 가르쳐야 하는 것인지 고민이다.
▲ 미국 제비꽃, 밟아버려! 아이들이 꽃을 밟아버리고 싶어 한다. 뭇 생명이 다 소중할 터인데, 토착 식물을 다 몰아내는 미국산 제비꽃이라 하여, 숲과 나무를 고사시키는 중국산 꽃매미라 하여 죽이고 없애야 할 대상이라고 가르쳐야 하는 것인지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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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우산을 들고 미국 제비꽃을 찾아 보았습니다. 길목 곳곳, 아스팔트 틈 사이에도 미국 제비꽃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흰제비꽃이 있던 곳에도 위풍당당하게 미국 제비꽃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다 뽑아 버릴거야' '우리 밟아 버리자'합니다. '잠깐' 다급하게 외칩니다. '그래도 생명인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한 번 더 생각해 본 후에 하자'는 저의 제안이었지요. 사실 다급히 아이들 행동을 저지했지만 저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중국 꽃매미 알집을 긁어낸 나무의 상처 애벌레로 깨어나기 전에 잡지 않으면 여름에는 감당할 수 없다는 꽃매미 방제 작업의 흔적
▲ 중국 꽃매미 알집을 긁어낸 나무의 상처 애벌레로 깨어나기 전에 잡지 않으면 여름에는 감당할 수 없다는 꽃매미 방제 작업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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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는 숲에서 나무 껍질을 파내고 있는 할아버지들이 계셔서 무얼 하고 계시나 봤더니 중국 꽃매미(주홍날개꽃매미) 알집을 찾아내서 나무에서 긁어낸 뒤 모아서 태우고 계셨습니다. 애벌레로 깨어나기 전에 잡지 않으면 여름에는 감당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곡우비에 땅에 떨어진 개나리꽃을 주워 목걸이를 만드는 아이들 시멘트 바닥에 떨어져 쓰레기 신세가 될 뻔한 개나리 꽃들이 아이들 손을 통해 개나리꽃 목걸이로 다시 태어난다. 물론 하루 지나면 마른 개나리 목걸이가 되겠지만, 꽃 하나 꺾기보다 자연이 주는 선물을 쓸모 있게 느끼는 법을 가르치고 싶다.
▲ 곡우비에 땅에 떨어진 개나리꽃을 주워 목걸이를 만드는 아이들 시멘트 바닥에 떨어져 쓰레기 신세가 될 뻔한 개나리 꽃들이 아이들 손을 통해 개나리꽃 목걸이로 다시 태어난다. 물론 하루 지나면 마른 개나리 목걸이가 되겠지만, 꽃 하나 꺾기보다 자연이 주는 선물을 쓸모 있게 느끼는 법을 가르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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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우비가 내리지 않으면 온갖 미세먼지로 기관지 계통에 염증이 생기는 시절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비'를 생명을 내리는 숨길이 아니라 '청소용' 정도로만 인식할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돌고 도는 세상에 '생명'을 대하는 우리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뭇 생명이 다 소중할 터인데, 토착 식물을 다 몰아내는 미국산 제비꽃이라 하여, 숲과 나무를 고사시키는 중국산 꽃매미라 하여 죽이고 없애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 문제를 집에서 생각해보는 '숙제'를 내 주었습니다.

마을에 유난히 화단을 잘 가꾸며 텃밭 농사를 잘 지으시는 할머니가 계십니다. 지나다 보니 미국 제비꽃 싹을 뽑아내고 계셨습니다. "이 놈이 어찌나 질긴지 조금만 손을 안봐도 금방 비집고 올라와. 올라오면 여기 다 덮지, 이 놈이랑 서양 민들레, 그 노란 민들레랑." 저는 속으로 '아, 그래서 할머니 화단과 텃밭에는 미국 제비꽃이 없었구나!' 생각합니다.

잡초는 없다고 했습니다. 해충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인간의 관점에서 만들어놓은 잣대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수억 년을 이어온 진화의 역사에서 생태계를 뒤흔드는 이런 외래종의 등장이 토착 생명들에게는 또 하나의 도전이 될 수 있을까요?

덧붙이는 글 | 아름다운마을학교 춤추는방과후배움터는 북한산 자락 인수동에 자리잡은 대안학교입니다. 매주 수요일 절기 공부를 하며 우주에 대한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이 절기 공부는 교보생명교육문화재단의 환경교육현장지원 프로젝트에 선정되어 지원을 받고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개나리꽃목걸이#곡우#미국제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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