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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야학 미술반 학생들의 걸개그림 탈시설 워크샵-시설밖으로, 사회안으로
▲ 노들야학 미술반 학생들의 걸개그림 탈시설 워크샵-시설밖으로, 사회안으로
ⓒ photo by 안티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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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4일, 대학로에 자리한 노들 장애인 야학에서 특별한 워크숍이 열렸다.

노들야학, 장애와인권 발바닥행동, 탈시설공투단, 석암비대위, 탈시설정책위와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장애인 시설 수용의 문제점과 탈시설을 고민하는 자리를 연 것이다.

먼저 박숙경 활동가(탈시설정책위원회)가 "인권은 시설보호주의를 넘는다"는 제목으로 장애인 시설의 현황과 문제에 대해 개괄적인 정리를 해 주었다.

이후 석암비대위에서 나온 김동림씨가 시설생활의 문제점을 당사자 입장에서 조목조목 이야기를 해 주었고, 배덕민(노들장애인야학)씨는 탈시설의 경험들을 발표했다.

마지막으로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병권씨가 "탈시설 그  '함께-함'을 사유하기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탈시설 문제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을 시도했다.

이번 워크숍은 발표 외에도 탈시설을 주제로 한 노들야학 학생들의 창작 애니메이션과 연극 상연, 미술전시 그리고  마임이스트 류성국씨의 공연으로 다채롭게 꾸며졌다.

오후 4시부터 밤 10시까지 이어진 장시간의 워크숍을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 활동가와 연구자들이 다양한 활동을 함께하는 이색적인 장이었던만큼 그러한 공간 속에서 '함께-함'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아니었을까 싶다.

우후죽순 민간 주도의 장애인 시설: 국가의 방기

그렇다면 장애인 시설이란 무엇인가? 시설보호란 장애, 빈곤 등에 의해 스스로 거주를 해결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시설에 수용하여 보호, 치료, 휴식 등을 제공하는 사회복지서비스로서, 주로 대규모의 분리된 '사회복지생활시설'에서 집단적으로 사람들을 수용하는 형태를 띤다. 시설은 설립과 운영주체에 따라 공립공영(公立公營), 공립민영(公立民營), 사립민영(私立民營), 사립공영(私立公營)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 한국에는 대략 10만 이상의 장애인이 사립민영(私立民營)의 인간창고(warehousing)시설에 수용되어 있다. 사립민영이란 말 그대로 민간이 시설을 설립하여 독자적으로 운영한다는 뜻이다. 근대적 생명정치의 일환으로 국가가 주도하여 시설을 만들고 관리해온 서구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주로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재단과 사회복지법인 등의 사립기관이 운영하는 시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같은 민간 장애인 수용시설은 2002년부터 추진된 미신고시설 양성화정책에 의해, 새로 건립된 대부분의 시설들조차 집단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창고형'으로 신축되고 있는 실정이다(미신고시설 양성화정책이란 미신고시설에 대해 2005년 7월 31일까지 신고시설로 전환할 것을 조건으로 한 조건부신고제로서, 이 정책에 따라 미신고시설 중 약 90%(전국 약 1000여개)가 조건부시설로 등록하여 합법시설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기본적 복지기능이나 생활인들의 안전조차 보장할 수 없는 불법 미신고시설들이 양산되고, 장애인의 자립생활 지원과는 반대로 장애인 수용정책이 강화되는 역효과를 내고 있다).

이처럼 장애인 시설에 대한 국가의 정책 없는 정책은 장애인 시설과 관련된 문제들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장애인 시설에 대한 국가의 방기적 태도는 이 문제를 해결할 책임있는 자들을 감추는 효과가 있다. 따라서 사립민영 대규모 인간창고형 시설의 폐해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탈시설의 문제는 국가-사회-개인(가족)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고민되고 해결되어야 한다.

돈이 되는 인간창고형 시설: "날것의 생명으로 추방되다"

'인간창고형'은 정신질환이나 노인들에게 적용되는 유형으로, 창고 속에 가구를 보관하는 것과 같이 시설생활자를 무능력자로 취급하는 형태이다. 한 시설당 평균 100명 이상을 수용하는 인간창고형 시설의 장애인들은 그 공간에서 그저 '날것의 생명'으로 살아간다.

주면 어떤 것이건 먹어야 하고, 불 끄면 자야 하고, 한 방에 60명씩 똥통·소변통 옆에서 자는 삶. 비록 인권침해가 자행되지 않는다 해도, 어떠한 자기 결정권도 행사되지 못하는 집단 수용의 공간에서 자신을 짐승같다고 여기게 되는 장애인들의 마음은 죽어간다.

하지만 시설에 수용된 장애인들이 스스로를 포기하기에 앞서, 여러 단계의 추방(내버림)이 존재한다. 지역사회나 국가의 뚜렷한 지원없이 단지 가족의 짐으로 부여되는 장애인을 가족들은 시설에 유기(遺棄)하고, 국가는 장애문제를 방기(放棄)하며, 시설은 장애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삶에 대한 포기(抛棄)를 강요한다.

이러한 추방은 자본과 결탁하여 작동한다. 대부분의 비리 수용시설은 장애인을 이용해 돈을 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창고형 시설에서 장애인들이 사람이 아니라 그저 '날것의 생명'으로 수용되어 있다는 말은, 잔인하지만 정확한 사실이다.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도와서 '시설 재벌, 복지 재벌'이 될 수 있는 아주 이상한 사회가 바로 한국 사회이다.

장애인 개인에게 나오는 장애수당을 착복하는 경우가 대표적인데, 시설에 수용된 장애수당 수급권자 장애인은 장애정도에 따라 한달에 40만원 가량의 장애수당을 현금으로 지급받는다. 즉, 시설은 어려운 이를 돕는다는 명예와 함께 돈도 얻을 수 있는 사업인 것이다. 이 사업은 가족의 유기, 사회와 국가의 방기라는 튼튼한 짜임 속에서 계속 굴러간다.

탈시설의 실험들: 그룹홈과 자립홈

장애인 시설은 늘 우리 사회에 있어 왔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언제나 사회의 주변부에 위치할 따름이다. 시설은 우리 동네에 있지 않아서 '거기'있는 것이 아니라 유기와 방기, 포기의 공간이기 때문에 언제나 보이지 않는 저쪽 '거기'에 있다. 시민들은 입을 모아 어쩔 수 없는거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게 아니다. 이미 체험홈, 그룹홈, 자립홈이란 이름으로 탈시설의 실험들은 계속되고 있다.

워크숍 때 발언해주신 배덕민 노들야학 학생 또한 체험홈을 거쳐 자립생활을 시작한 케이스. 창고형 수용소를 벗어나, 삼삼오오 작은 규모의 식구생활을 경험해 보는 것이 자립의 시작단계이다. 이때 생활지도 선생님이 있는 경우를 그룹홈이라 하고, 장애인들이 스스로 생활을 이끌어 나가는 경우가 바로 자립홈이다.

하지만 자립생활에 대한 이상만 가지고 시설에서 나올 순 없다. 대표적으로 비용의 문제가 있다. 대규모 시설이 존재하는 까닭은 비용절감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생활시설, 그룹홈, 자립홈의 서비스원가를 비교한 최근의 연구결과(박숙경 2007, 강희설 2008)를 보면, 대규모 시설의 비용절감 효과가 거의 없음을 잘 알 수 있다. 연구결과 투입비용은 생활시설 약 1500만원~2000만원, 공동생활가정 약 1000만원~1100만원, 자립홈 약 425만원으로 나타났다.

장애인 시설의 문제는 단지 인간창고형 거대 시설을 작게 분화하는 차원이나, 시외곽지역의 시설들을 시내로 자리옮김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타인과 함께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장애인 탈시설의 핵심이다.

예컨대 그룹홈과 자립홈을 모두 경험했던 장애인들은, 시설보다 많은 자율권이 보장되지만 이 둘의 차이를 예민하게 감지한다. 시설생활과 그룹홈 그리고 자립홈을 비교했을 때 자율권이나 사생활의 보호, 의견존중의 정도는 당연 자립홈이 가장 높다. 즉 시설에서 벗어나 자립생활을 경험하는 단계로서 그룹홈에는 여러 가지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룹홈에서도 생활지도 선생님과 그룹홈 장애인들의 관계에서 미세한 통제와 권력관계가 발생한다는, 시설 수용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여전히 잔존한다. 현재는 자립홈 형태 뿐 아니라, 영구임대 아파트나 공공주택을 임대하여 독립하는 장애인들의 사례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장애와 비장애: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

단지 생활시설만을 경험해 본 장애인들은 '집', '아파트'로 표현되는 일반적인 가정형태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시설생활장애인의 70% 이상이 탈시설을 원하는 반면, 그들 가족의 90% 이상이 장애인을 시설에 두길 원한다. 이런 상황에서 시설 거주 장애인들의 인간다운 삶, 가족과 함께 하는 소박한 삶을 향한 꿈은 한낱 꿈으로만 방치되고 있다.

탈시설 이후의 장애인의 삶은 탈시설의 당사자들과 장애계 활동가들 뿐 아니라,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비장애인들에게도 중요한 화두이다. 예컨대 이들이 어떠한 가족형태를 가질 것이며, 어떻게 지역사회로 기입되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이것이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에게 어떤 의미가 줄 수 있을까.

일반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시설 장애인들의 말은 단지 버스를 타고 싶다거나 국가에 포섭되는 시민이 되고 싶다는 게 아니다. 또한 아파트, 직장생활, 개인 혹은 배우자와의 동거 등 어떤 조건들의 성취를 통해 장애인들이 2등국민에서 사회의 일원이 되는 건 아니다. 비장애인들이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여기는 소통과 연대로 짜여진 삶을, 활동보조인과 함께 구성해나가는 것-이것이 바로 탈시설 이후 지역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장애인의 모습이어야 한다.

중요한 예로 소통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지체 장애 중 뇌성마비장애인은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불분명한 발음,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 느린 말투. 실제로 필자 또한 워크샵이 진행되는 동안, 옆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진땀을 뺐다. 상대의 의사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관계의 시작이자 가장 큰 일이 아닐까.

마치 외국어를 배우듯, 귀기울이고 반복적으로 연습하고 대화하는 것만이 귀를 트고 입을 여는 방법이다. 이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노력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잘 알아듣지 못했으면서 단지 순간의 불편함을 모면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이는 제스처를 보이는것, 의사소통에 대한 포기는 상대에 대한 큰 실례이다.

장애인들의 탈시설과 지역사회로의 기입을, 시설에서의 비정상적인 삶 대 사회에서의 '정상적'인 삶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보지 않았으면 한다. 이들이 지역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얼마나 삶에서 '공통적인 것'을 공유할 수 있으며, '공통적인 것'의 기반 위에서 함께 활동을 구성할 수 있으냐의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소통의 예처럼, 함께 대화하고 언어를 공유한다는 것은 자기 삶을 스스로 꾸려나갈 수 있는 연대를 확보하는 소중한 공통적 기반이다. 탈시설을 향한 장애계의 운동은 탈시설을 위한 주거권 투쟁이나 장애인연금의 요구를 통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권리로서 노동하되 의식주가 노동의 대가여서는 안된다는 소중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장애인들은 자신들이 바로 '인간'이기에 안정된 주거의 권리와 생활에서의 자율권, 일상에서의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외친다. 이들이 투쟁을 통해 이들과 똑같은 인간인 수많은 비장애인들과 청소년들이, 그리고 성적 소수자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는 포기하고 유기하고 방기하는 형태로 장애인을 어쩔 수 없다는 듯 추방하는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이 아닌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자립의 꿈을 향한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의 힘찬 약진을 기대해 본다.


#장애인차별철폐의 날#탈시설#활동보조#꼬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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