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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飛)는 '날다'이고 산(山)은 '뫼'이다. 그러므로 '날뫼'마을이 비산동으로 한자화하였으리라는 것은 쉽게 헤아려진다. '날뫼마을'의 흔적은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2호인 '날뫼북춤'의 명칭 속에 남아 있다. '날뫼북춤'은 지방관리가 순직하였을 때 백성들이 이를 추모하기 위해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면서 북을 치며 추는 춤이다. 이 때 춤을 추는 사람들은 흰 바지저고리에 감색 전투복을 입고 머리에 흰 띠를 두른다. 연주 악기는 북만 사용하며, 경상도 특유의 덧배기가락(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춤을 춘다.

'산이 날아다닌다'는 의미의 비산동이란 동명이 생겨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전설에 따르면 지금의 경부선 철로 양쪽에 큰 못이 있었는데, 거기서 빨래를 하던 어떤 아낙네가 갑자기 날이 어두워진 데에 놀라 하늘을 쳐다보니 달성(현재의 달성공원 일대) 방향에서 산이 날아오는 것이었다. 아낙네는 "산이 날아온다!"하고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랬더니 고함소리에 놀란 듯 산이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비산동 일대에 생긴 높은 지형은 '날뫼'란 이름을 얻었고, 그 구릉 지대에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살아가자 다시 마을이름을 '날뫼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달성공원 정문 예나지금이나 달성공원 정문에는 노인들이 많이 앉아 있다. 나도 언젠가는 저기 앉아있다가 누군가의 사진에 담길지도 모른다.
달성공원 정문예나지금이나 달성공원 정문에는 노인들이 많이 앉아 있다. 나도 언젠가는 저기 앉아있다가 누군가의 사진에 담길지도 모른다. ⓒ 정만진

비산동 방면 달성공원 끝에 서서 바라본 비산동 방면의 풍경
비산동 방면달성공원 끝에 서서 바라본 비산동 방면의 풍경 ⓒ 정만진

수성구 두산(斗山)동에도 이와 엇비슷한 전설이 전한다. 옛날 어느 날 어떤 아낙네가 빨래를 하다가 산이 움직이는 것을 목격하였는데, 그녀의 놀란 눈길이 꽂히는 순간 움직이던 산이 그 자리에 멈춰섰다고 한다. 그 산은 벌판(지금의 수성들)에 있다고 하여 불뫼라 하기도 하고, 산의 형상을 본떠 "독(홀로獨)메산" 혹은 말미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말미(末尾)'는 '끝'을 말하니 파동과 두산동 및 지산동의 경계를 이루는 법어산의 끝자락이란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추측된다. '말'은 두(斗)이니 '말메'는 한자어로 다시 두산(斗山)으로 바뀌고, 그 산자락에 위치하는 동네라 하여 마을이름도 두산동이 되었을 것이다.

독메(?) 지산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두산동 끝지점에 저 혼자 툭 솟아올라 있는 얕은 메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독메인 둣. 이 뒤로는 다시 평지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수성못이 있다.
독메(?)지산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두산동 끝지점에 저 혼자 툭 솟아올라 있는 얕은 메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독메인 둣. 이 뒤로는 다시 평지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수성못이 있다. ⓒ 정만진

산(山)이 붙은 동명에는 지산동(池山洞)도 있다. 지산동은 인근인 두산동에 수성못이 있고, 마을 뒤로 접하여 법어산에 둘러싸여 있으니 못[池]과 산(山)이 결합되었다고 해서 지산동이란 동명을 얻지 않았을까 싶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지산동은 뒷산의 형상이 곡식을 고르는 키처럼 생겼다고 하여 본래 치산리라 불렀고, 산 이름도 치산이라 했다. ('치'는 '키'의 경상도식 발음이다.) 그러다가 1914년 동명을 한자화하면서 '치'와 음이 유사한 '지'를 붙여 지산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지산동 풍경 지산동의 끝부분이 목련시장이다. 사진에 보이는 상가와 시장 뒤에 목련아파트가 있고, 아파트가 끝나면 '치'처럼 산자락을 줄지어 늘어뜨린 산이 좌우로 펼쳐진다.
지산동 풍경지산동의 끝부분이 목련시장이다. 사진에 보이는 상가와 시장 뒤에 목련아파트가 있고, 아파트가 끝나면 '치'처럼 산자락을 줄지어 늘어뜨린 산이 좌우로 펼쳐진다. ⓒ 정만진

봉산동(鳳山洞)에도 '산'이 있다. 지금은 시내 한복판이라 산이 없는 듯 여겨지지만 지금의 제일중 자리가 바로 봉산이었다. 산꼭대기를 학교 건물이 차지하고 있고, 그 주위를 아파트, 주택, 그리고 인쇄소 거리의 상가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그저 '시내'로만 보이지만, 지난날에는 분명히 산이었던 것이다. 용산동(龍山洞) 또한 와룡산 아래에 있다 하여 그렇게 동명이 정해졌다. 침산동(砧山洞)도 마찬가지이다.

그런가 하면, 언뜻 보기에는 그저 평평해 보이기만 하는 남산동(南山洞)에도 과거에는 분명히 '산'이 있었다. 지금은 주택으로 들어찼지만 아득한 예전의 남산동 일대는 집이라고는 없는 구릉이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 언덕을 남산이라 불렀다. 그 결과 뒷날 동명도 남산동이 되었다. 서문시장 인근의 동산동(東山洞)도 동산병원 일대의 고지대를 동산이라 불렀기에 생겨난 동명이다.

(남산, 동산은 대구의 남쪽과 동쪽에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시내 중심가인데 어째서 남쪽, 동쪽인가 싶지만 그만큼 과거에는 대구 시내의 범위가 그만큼 좁았다는 말이다. 이는 지금의 동성로, 서성로, 북성로가 그 시대에는 대구성의 동쪽,  서쪽, 북쪽에 난 길이고, 남문시장이 대구성의 남문 일대에 번창한 저자임을 상기해보면 알 일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집과 마을들이 남향으로 서 있기 때문에 '앞산'이 한자어로는 곧 남산인데, 무슨 까닭으로 대구에는 남산동의 '남산' 말고 앞산이 따로 있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도시가 팽창하면서 저 먼 곳에 있던 대덕산 일대가 이제 눈 '앞'의 산이 되었지만 한자로 옮겨적으면서는 이미 존재하는 '남산'의 이름을 빼앗아 표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시내 복판의 산이 '남산'이 되었고, 실제로 대구의 남쪽에 위치하는 대덕산 일대가 '앞산'의 칭호를 얻었다. 하지만 앞산 너머 월배 지역, 화원 지역이 인구 30만명을 훌쩍 넘는 인구 밀집 지역으로 바뀌어 어느덧 앞산도 '앞'산이 아니게 되었으니 세월이 흐르면 사람들은 어째서 이 산의 이름이 '중산'이 아니고 '앞산'인지를 알지 못하게 될 터이다.)

서문시장 맞은편의 동산 그리 높지는 않아도 본래는 산이었건만, 지금은 동산병원, 신명학교, 선교사 숙소, 교회 등이 가득 들어차 사진상으로는 산이라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서문시장 맞은편의 동산그리 높지는 않아도 본래는 산이었건만, 지금은 동산병원, 신명학교, 선교사 숙소, 교회 등이 가득 들어차 사진상으로는 산이라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 정만진

다만 각산동(角山洞)은 달라서, 본래 쇠[牛]뿔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하여 '소바우', 뒷날 한자화해서는 우암동(牛岩洞)이라 불렀는데, 1907년 이곳 현감으로 부임한 송헌면이 자신의 조상인 우암(牛岩) 송시열의 호와 같다는 이유로 우(牛)의 뿔[角]과 암(岩)의 산(山)을 각각 따서 각산동이라 개칭했다. 대구(大丘)가 대구(大邱)로 변한 것의 축소판인 셈이다.


#대구#남산#앞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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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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