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년생이니까... 아, 진짜 21살 맞네...'
5살 차이, 엄격히 따지면 내가 생일이 빨라 7살에 학교에 갔으니 6학년 차이지... 가끔은 이 적지 않은 터울이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지기도 하고, 가끔은 그래서 맞는 구석 하나 없다며 세대차이까지 들먹거리기도 했었더랬어. 그러는 사이 너와 함께 산 것도 20년이란 시간이 지나버렸대.
어렸을 적, 맞벌이 부모님을 원망하며 주중엔 할머니, 할아버지네 집에서 지내야 했던 난 '자매'가 필요했고 '친구'가 필요했어. 네가 내 눈앞에 등장하기 전까지 내 소원은 늘 너였고, 엄마는 동생 만들어달라는 나의 찡얼거림을 매일같이 어르고 달래줘야 했어.
그랬던 내 모습이 너무 생생해서일까. 너의 '성년의 날', 난 새삼 우리가 20년이나 같이 살았다는 세월을 실감했어. 아니다. 이제 너도 성년이니까. 실은, 이제야 겨우 난 너와 진짜 '자매'가 되고 '친구'가 되어가는 거 같은데 20년이란 시간이 좀 민망해. 이제 우리 길어야 10년 더 같이 살까 싶은데, 앞으로라도 우리 알콩달콩하게 살자^^
처음 만나는 널 함부로 만지기도 어려울만큼 소중했던 1989년 10월 20일
난 기억이 다 나. 엄마 배가 점점 더 불룩해지면서 그 안에 내 동생이 될 아이가 크고 있다는 걸 알고, 늘상 틈만 나면 엄마 배에 귀를 딱 붙이고 어설픈 교감을 하려고 했던 내 모습도, 엄마 품에 안겨 있는 피덩이의 널 처음 만나서는 막상 만져보지도 못하고 눈만 꿈뻑꿈뻑 바라보고 있던 내 모습도, 우유 먹는 널 빤히 바라보는 내가 가여웠는지 먹던 젖병을 내게 물려주며 내 배를 토닥토닥 다독거려주던 2살배기 네 모습도, 나가려는 나를 현관문까지 쫓아나와 가지 말라고 칭얼대다가도 '뽀뽀~'하면 침 잔뜩 고인 입술로 거침없이 부벼대고 '이쁜짓~'하면 온몸에 힘을 주어 바르르르 떨던 4살배기 네 모습도, 놀아주기 귀찮아 죽은 척 미동도 않고 있으면 눈 몇 번 열어보고 몇 번 꼬집어보다가 '언니 죽지마~~'하며 엉엉 울던 6살배기 네 모습도 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
여전히 간지러워 네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지 못하지만 널 사랑해
하지만 나는 과거 속 어느 순간의 그리운 네 모습보다 까칠하기 이를 데 없고 '나 간다~' 해도 대답 없는 게 서운치도 않은 지금이지만, 하루하루 쌓여 1년 2년이 지나 흘러온 지난 20년의 시간을 함께 해 온 네가 훨씬 더 소중하고 중요해. 어느덧 나보다 한 뼘의 키가 더 커버리고 부탁할 게 생길 때만 애교부리는 너지만 여전히 눈에 담아도, 가슴에 담아도, 버겁지 않은 세상 단 한 사람, 내 동생이니까.
너는 가끔 언니를 원망하기도 해. '언니가 내 선배라면 무지 좋아했을 거 같애'라며 '언니'로서는 내가 그닥 좋지 않다는 걸 슬쩍 내비치기도 하고. 하기사 21살 대학생인 네가 26살 사회인인 언니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들 중 뭐 하나 채워주는 게 없으니 살짝 서운하긴 해도 난 할 말이 없다. 언니가 이 옷 사줬다~ 언니가 이거 먹여줬다~ 언니가 저거 보여줬다~ 블라블라... 이런 자랑거리 하나 내세울 게 없는 네게 도리어 미안한 날도 있으니까.
동생, 하지만 그런 것들이 없다고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널 신경쓰지 않는다고 오해하진 말아줘. 난 너를 보며 키우는 꿈이 있거든. 난 있지. 네 꿈을 지켜주는 사람이 되고싶어. 엄마 아빠가 지어준 예쁜 이름 '이현아'가 아닌, '88만원 세대'로 불리우게 될 네가, 당당하고 예쁘지만 한없이 여리고 순수한 너를 토익 점수 *** 점 이상, 수상 경력 * 번, 인턴 경험 * 번, 자격증 * 개로 보려 하는 세상 앞에 설 네가, 널 쓸모 없다 여기지 않도록, 네 꿈을 버리지 않도록, 네가 너를 사랑할 수 있도록 네 꿈을 지켜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성년의 날을 축하해, 축하하는 만큼 앞으로의 네 삶을 응원해
현아야, 성년의 날을 맞이해서 널 위해 언니는 또 좋은 선물은 준비하지 못했어. 도리어 내가 뭐해 줄까 묻기 전까지 넌 내게 기대도 않는 눈치였으니까. 그리고선 소박하게 플랫슈즈가 망가졌다며 그냥 새 신발 하나 사달라는 너는 언니 주머니사정을 생각해주고 있네. 민망하기도 하지만 정말 어른이 됐구나 싶은 너이기에 진심으로 네 성년의 날을 축하해.
이제 성년이란 타이틀을 달고 살아가게 될 현아야, 축하하는만큼, 널 사랑하는만큼, 언니가 꼭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 세상 앞에 서면 세상은 네가 엄마, 아빠 품에서만 느꼈던 것처럼 따뜻하진 않을 거야. 친구들과 나눴던 우정만큼 순수하지 않다 느껴질 때도 많을 거야. 네 꿈이 초라해서 네가 너무 보잘 것 없다 느껴져서 이 악물어도 눈물나는 날도 있겠지. 그런 날들이 찾아오면 이 얘길 꼭 기억해주길 바래.
세상의 벽들이 차갑게 네 앞을 가로설 때, 현아야, 세상을 높이고 너를 낮추는 일은 하지마. 세상이 너무 높고 세상이 대단해서 네가 보잘 것 없고 누추한 게 아니야. 부모님을 잘만나 돈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면, 역시나 집에 돈이 많아 선택받은 교육들로 좋은 학벌을 가지지 못하면, 그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밥벌이 할 수 있는 것만으로 감지덕지 여기며 살라고 강요하는 세상이야. 그런 세상이 이상한 거야. 내 동생 이현아가 이상한 거 아니야.
고양이가 입맛 다시며 쥐들을 구석으로 몰아세워서 더 갈 데도 없는 쥐들이 고양이를 덮쳤다고 해봐. 현아야,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것들이 틀리지 않았다면, 고양이가 몰아세운 게 첫 잘못이었어. 그지? 하지만,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아프겠다고, 쥐들을 손가락질하며 어쩜 이럴 수 있냐고 화를 내는 이런 황당한 상황이 수도 없이 반복되는 세상이야. 이상한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해도 어쩌면 그건 네가 너무 정상적이기 때문일 거니까 절대로 세상을 100점, 너를 그 세상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낙점으로 생각하지 마. 약속할 수 있지?
하지만 현아야, 그렇다고 이런 세상을 미워하지도 말자. 우리 엄마, 아빠가 평생 자기 자리를 지키며 꾸려오고 가꿔온 세상이잖아. 네가 만난 좋은 사람, 내가 만난 좋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잖아. 고약하게 못된 몇몇 사람들때문에 물흐리고 있지만, 그 몇 사람이 너무 힘이 세서 아직 확 바뀌지 못하고 있지만, 앞으로 넌 네가 만나온 사람들만큼 좋은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되기도 할 거야.
이런 세상이 틀렸다고, 네가 틀린 게 아니라고 지지해주는 사람들도 만나게 될 거라고 믿어. 그리고 그 사람들이, 그리고 널 초라하게 생각하지 않고 네 꿈을 키워가며 살아가는 네가 조금씩 이 세상을 좋게 좋게 바꿀 거야. 그 시간들이 언제나 네 옆에 있을 거야. 너의 삶을 응원할 거야. 이 약속이 언니가 플랫슈즈와 함께 너한테 줄 수 있는 성년의 날 선물이야. 맘에 들었으면 좋겠어. 금방 쓰고 닳는 옷가지보다 그래도 평생 쓸 수 있을 언니 마음이 더 값진 선물 아니겠어? 내 능청에 또 넌 '쳇~' 하겠지만. 괜찮아. 너에게 부치지 않을 편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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