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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빨리 갔다 와야지. 당신을 그렇게 예뻐하셨다면서..."

머뭇거리던 나를 아내가 도리어 채근한다. 그래 마지막 가시는 길인데 빨리 가서 인사드리고 오는 게 도리지.

노무현 대통령이 5년의 청와대 생활을 마치고 봉하마을로 귀향하던 날의 동선을 따라, 나는 밀양행 KTX에 몸을 실었다. 시속 300km로 달리는 기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 틈으로 지나온 세월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나의 기억 속에 있는 혼자만의 경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뛰었던 민주화 세력의 기억이기도 할 것이다.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이 24일 오후 국화꽃을 들고 분향소에서 헌화를 하고 있다.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이 24일 오후 국화꽃을 들고 분향소에서 헌화를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1988년 5공 청문회...노무현 아이콘의 시작

노무현은 민주화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아이콘의 시작은 1988년 5공 청문회였다. 물론 그는 이전에도 부산지역에서 거물 운동권 인사였지만, 그 이름은 어디까지나 한 지역의 명망가에 불과했다. 지금 40대 이상의 세대에게 노무현이란 이름을 각인시킨 것은 5공청문회였다. 당시에는 정치 선진국인 미국에나 있는 것인 줄 알았던 청문회를 통해 사람들은 1987년 대선 패배의 쓰라린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었고, 그래서 노무현이란 이름 석 자는 국민들 뇌리에 강하게 남을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 그가 청문회에서 활약하던 1988년 당시 아쉬움이 하나 있었다면 그가 YS의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노무현은 통일민주당 소속이었고, 나는 DJ의 평화민주당을 좋아했었다. 그래서 그가 DJ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었다.

그 때의 민주화 아이콘은 DJ였다. 3당 합당 이전이었기 때문에 민주 진영에서 DJ와 YS는 동일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지만, 적어도 나에게 YS는 DJ 다음 자리에 있는 인물이었을 뿐이다. 1990년 3당 합당은 내가 좋아하는 DJ와 노무현을 한 식구로 만들어 주었다. 지금의 기억으로 당시를 표현하니 DJ와 노무현을 동일한 반열에서 언급하지만, 그 때는 DJ 곁에 노무현이 와준 것을 기뻐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부터 나의 눈에는 노무현이 커다란 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1992년 총선에서 노무현은 '김대중 당'의 깃발을 들고 부산에서 첫 번째 낙선을 한다. 5공 청문회로 전 국민적 인기를 누리던 그가 부산에서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의 당선을 위하여 수도권 지역을 누빈다. 아마도 DJ에게는 국민적 이미지가 좋은 노무현의 지지 연설이 무엇보다 필요했었을 것이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노무현을 비롯한 젊은 정치인들이 연설을 하면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선거 홍보물을 돌리는 역할이었다. 정말로 열심히 뛰었다. 그러나 나는 선거에서 질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고,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노무현도 안 될 줄을 알았었다. 영호남의 인구 차이를 안다면, 그것은 한국정치에서 달걀로 바위를 치는 선거라는 것을 삼척동자도 알만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노무현도 연설하면서 그랬고, 나도 그랬고, 주위 사람들 모두 그랬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열심히 선거 운동을 했다. 사실 당시 민주화 세력에게 DJ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었다. 민주화세력에게 DJ는 아이콘인 동시에 한계였던 인물이었다.

DJ는 YS와의 대결에서 낙선을 했고, 이후로 노무현은 우직하게 부산에 계속 출마하며 떨어지기를 반복하였다. 5공 청문회로 인기를 끌 때는 대통령이라도 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일개 국회의원 자리도 부산에서 하기가 어려웠다. 어디 수도권에만 나와도 금배지를 달겠 건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노무현이 안쓰러웠다. 낙선 정치인으로 그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청문회의 기억도 잊혀져가고, 노무현이란 이름은 국민들 뇌리에서 사라져갔다. 장남 노건호가 언급한 천 원 짜리 한 장이 없어서 울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이 시절의 이야기였으리라.

1997년,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던 김대중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노무현의 선택에 주목을 하였다. 19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김대중의 정계복귀로 인하여 다 잡았던 부산시장을 놓친 노무현이었다. 소신도 좋고 지역구도 타파도 좋지만, 인간이라면 DJ에게 사감이 없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한발 한발 DJ 지지로 다가서는 노무현을 보면서 나는 또 기뻐했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당시는 인터넷이 없었고, 전화선을 이용한 PC통신이 활발하던 시절이었다. PC통신 게시판에 노무현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한 글을 올리고, 내 나이 스물여덟 늦은 나이에 군대를 갔다. 당시 노무현은 그 글이 아주 좋았던지 일면식도 없는 나를 찾아 수소문 끝에 집에 전화를 했다고 한다. 군대에서 열심히 훈련을 받고 있었던 탓에 연결은 될 수 없었다.

1997년 12월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었고, 나는 훈련소에서 만세를 불렀다. 훈련소에서 전해들은 대선 전 노무현의 DJ 지지 선언은 '역시'라는 마음과 함께 노무현에 대한 믿음이 더욱 커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김대중도 대통령이 되었고, 이후 노무현도 서울 종로에서 보궐선거를 통해 다시 국회의원이 되었다. 한나라당은 잃어버린 10년이라 했고, 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대라고 생각하는 10년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제는 고생이 끝나나 했더니, 그는 기어이 2000년 총선에서 또 부산 출마를 고집한다. 나는 군대에서 부산 출마 소식을 들으며 그가 살아 돌아오길 기원했다. 마음들이 모두 똑같았을까? 유시민도 동아일보의 기명칼럼에서 그의 생환을 빌었다. 아마 지역주의 앞에서 늘 꺾이기만 했던 민주화 세력 모두의 염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 낙선했다.

다시 낙선 정치인이 되었지만 그는 대통령을 꿈꿨다. 후에 개인적으로 언제 대통령을 하시겠다는 마음을 언제 먹으셨냐 여쭤보았을 때 '나도 모르겠다'고 대답하신 적이 있다. 하지만 2000년 총선 출마 당시에 대선출마에 대한 생각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무모한 도전인 동시에 멋진 꿈을 향한 커다란 전진이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 방문객을 대상으로 즉석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 방문객을 대상으로 즉석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다. ⓒ 노무현공식홈페이지

2001년, 노무현과의 만남...'그의 사람'이 되다

2001년에 군대를 제대하고 그의 노하우 홈페이지를 찾았다. 노사모라는 전국적인 팬클럽도 조직되어 있었고, 노무현도 장관을 지내는 등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 당내 후보군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달리 재주는 없고 1997년 PC통신에서 그랬듯이 인터넷에서 글로 그의 일을 도와주고 싶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꿈꾸는 글을 몇 차례 실었더니, 이번에도 반응이 좋았던 것 같았다. 노무현 장관님이 글을 읽고 나를 또 수소문해 찾으셨다. 한번 장관은 퇴임하고도 계속 장관이란 사실을 그 때 처음 알았다. 해양수산부 장관을 물러나 전직 장관 신분이었던 노무현의 호칭은 장관님이었다.

노무현 장관님을 처음 뵐 때는 호기심 반 떨림 반이었다. 그를 좋아했지만 실제의 모습은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문득 문희상 의원이 처음 김대중 대통령을 만날 때 무릎을 꿇고 평생 선생님으로 모시겠다고 했다는 일화가 오버스럽게 떠올랐다. 다행히 장관님은 매우 따뜻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다음해 민주당 경선이 있기 전까지 그를 지근거리에서 모셨다.

장관님은 나를 많이 챙겨주셨다. 간혹 수행비서로 그를 따라 나서면 나는 아무래도 어수룩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 의전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를 장관님은 일일이 챙겨주었다. 누가 수행비서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후에 지역 조직에서는 똑똑치 못한 애가 장관님을 수행해 내려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는 걸 알았다.

체력이 튼튼하지 못한 탓에 자동차로 이동하는 중간에는 비서의 역할을 잊어버리고 꾸벅꾸벅 졸기도 많이 했다. 어느 순간 잠에서 깨어보니 웃으며 빙그레 나를 쳐다보던 미소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이제는 그 미소를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장관님은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좋아했다. 자신의 철학이나 정치적 생각을 정리해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지금도 집구석 어딘가에는 그 때 녹음했던 육성 테이프가, 컴퓨터 하드디스크 어딘 가에는 그 때의 말씀 기록들이 남아 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장관님은 여러 구상을 말씀해주셨다. 그 때 들었던 구상 중에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이 연정과 개헌이었다. 대통령이 되시고 임기 중에 대연정을 제안하시고 개헌을 말씀하셨을 때 많은 언론은 또 무슨 꿍꿍이인지를 분석하였다. 그 때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참 노무현을 모르는구나!

장관님은 차 안에서 2007년의 개헌 시기를 놓치면 당분간 개헌이 어렵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어느 권력자가, 그리고 어느 국회의원이 헌정 질서의 체계화를 위하여 임기 단축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냐고 말씀하시면서, 대통령 임기와 국회의원 임기가 일치하는 2007년이 개헌을 할 수 있는 적기라고 나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연정에 대한 구상도 말씀하셨다. 다른 정치 세력 간의 연정이 가능해야만 극단적 대립과 분열의 정치가 종식될 수 있다는 뜻이셨다. 물론 둘 다 기존의 정치 세력에 의해 철저히 거부당했지만, 이것만은 하나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 구상들이 절대로 단기간에 이뤄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연정, 개헌 구상...그의 '오래된 생각'이었다

경선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TV토론 준비에 들어갔다. 영등포에 있는 한 케이블 TV방송국 스튜디오를 빌려 실전 연습을 하였다. 참모들이 패널 역할을 맡았다. 당시 인기가 떨어지던 DJ에 대한 평가를 주문하는 질문이 나왔다. 참모들은 아들의 비리와 경제 침체로 인기가 떨어진 DJ와 확실히 선을 긋는 답변을 원했지만, 장관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정반대였다.

실전 연습이 끝나고 평가를 할 때 참모들은 이 부분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다. 국민의 정부를 향한 날을 세워야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요지였다. 그러나 장관님은 요동도 하지 않았다. 누가 DJ보다 대통령을 잘 할 수 있으며, 외환위기를 극복한 명백한 업적이 있다는 말씀을 반복해서 하셨다.

이런 장관님의 마음을 김대중 대통령은 알고 있을까?

장관님과 생각이 같았던 나는 미소를 지으며 논란을 듣기만 했다. 유시민을 비롯한 참모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 말씀만 드렸던 기억이 난다. 장관님 심정은 아는데, 그래도 국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위로할 수 있는 말씀 정도는 해 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담이지만 TV토론을 위하여 유시민, 정태인, 문성근 등이 캠프 사무실에 모두 모여서 답변 자료를 숙의한 적이 있다. 말단이었던 나는 기록 정리와 잡무를 맡았는데, 마지막에 외부 인사들 주차료를 챙겨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사무실이 있던 여의도는 주차공간이 많지 않아 모두들 유료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왔던 것이다. 아무리 자원봉사였지만 주차비는 지원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였다.

그런데 당시 캠프 사정이 너무 안 좋았다. 내가 자금 사정을 알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지만, 우리들이 먹는 점심 밥값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고 있었으니 몇 만원 하는 주차비를 쉽게 지원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문성근은 배우이니 돈이 많을 테고, 유시민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 인세도 받고 100분 토론 사회자로 돈을 벌었을 것이고, 정태인의 주차료만 챙겨주었다.

후일 유시민은 그 때 일을 기억하고 있었던지, 캠프에서 자원봉사 하고 다녔음을 강조하면서 주차비도 지원받지 못했다고 언론에 폭로(?)한 적이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유시민도 그리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는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지자들은 첫 번째 TV토론을 기대했지만, 장관님은 멋진 모습을 보이지 못하셨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셨고, 익숙하지 않은 어색함을 나타내셨다. 캠프 내의 한 참모도 일찍이 걱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아무리 TV토론에 능력을 가지신 분이어도 청문회와 후보 검증 토론회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라 어렵다고 본 것이다. 비판을 하는 것과 방어는 다른 문제였다. 장관님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랑과 방어에 익숙한 분이 아니셨다. 그 단점이 첫 번째 TV토론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2002년 12월 18일, 서울 미아동에서 마지막 유세를 펼치고 있는 노무현 후보.
2002년 12월 18일, 서울 미아동에서 마지막 유세를 펼치고 있는 노무현 후보. ⓒ 권우성
TV토론을 통해 지지율의 대역전을 노리겠다는 작전은 점차 실패로 돌아갔다.

처음 TV토론을 끝내고 집무실로 돌아온 장관님은 홀로 앉아 자기 손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고 있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그의 모습을 보았을 때 안쓰러웠다. 아버지의 뒷모습 같은 노무현의 뒷모습이었다.

장관님은 호남 민심을 움직이는 글을 지시하셨다. 자신의 이름으로 나갈 호남을 향한 감동적인 구애의 글을 원한 것이다. 그래서 호남 쪽 지구당을 돌아다니는 순회 강연회에 나를 수행비서로 데려가셨다. 자신의 연설을 들으면서 그 내용을 글로 가다듬으라는 것이었다. 그 연설에서 장관님은 후에 후보로 확정이 되고 나서 그를 두고두고 괴롭힌, 지방선거에서 PK지역 단체장 자리 하나라도 이기지 못하면 후보 자리를 내놓겠다는 폭탄 선언을 하셨다. 그렇게 위험한 발언을 하실 만큼 장관님에게 호남의 지지는 절실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왜 글을 못 내놓느냐고 다그치셨지만, 그러실수록 글은 더욱 써지지 않았다. 마음으로 보면 노무현이 보이는데, 호남은 여전히 노무현에게 의구심만 보내고 있었다. 노무현의 마음은 말과 글로 표현될 것이 아니었다. 그냥 이심전심, 노무현만 봐도 알 수 있는 그런 마음이었다.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것, 나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다. 글을 쓰지 못하는 나에게 장관님은 노기를 폭발하셨다.

나는 대신 다른 글을 썼다. 캠프에 있던 어떤 형님과 함께 장관님과 의논하지 않고 다른 글을 준비했다. 감성을 움직여서 마음을 움직이기보다, 이성을 움직여서 마음을 움직이고자 하는 글이었다. 호남이 밀어주기만 하면, 예선에서 호남이 밀어주기만 하면 본선 경쟁력은 노무현에게 있다는 글이었다. 뻔한 논리였지만 당시 신문사의 여론조사 결과를 근거로 해서 상당히 설득력 있게 논지를 전개하였다.

작전은 성공을 거두었다. 인터넷 상에서 그 글은 크게 회자되었고, 언론사 기자들도 그 논리를 눈 여겨 보기 시작했다. 캠프로 그 글의 주인공을 찾으러 기자들이 찾아왔다. 장관님도 모르게 추진되었던 일이라 아무도 몰랐다. 적어도 지지층 내에선 노무현에 대한 강력한 지지의 근거를 찾은 듯하였다. 당시 현역 의원으로 유일하게 지지선언을 한 천정배 의원이 오히려 캠프로 그 글을 보낼 정도였다.

"호남 민심을 움직이고 싶다"...그리고 대통령이 되다

그 일을 마지막으로 참모직을 그만 두었다. 그만 둔 것은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나에게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안정적인 일자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죄송했지만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 죄송한 마음으로 인사를 하던 날, 장관님은 나에게 서운한 말을 비추셨다. 떠나는 것이 서운하다기 보다는 그렇게 챙겨주었음에도 지내는 동안 장관님 곁에 그리 많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시로 전화를 해서 말씀을 해주시고, 자기 집으로 초대해 저녁 식사도 주시면서 이런 저런 부탁을 하셨건만 나는 별로 도움을 드리지 못했다. 정말 잘 쓴 글을 올리고 싶었는데 제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솔직한 마음을 보여드렸으면 좋았을 것을 지금도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누구의 참모가 될 만한 성격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리더가 될 만한 자질도 없고, 지금 이 자리나 지키면 다행일 그런 사람인 것 같다.

후로 노풍이 불고 꺼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나는 글로서 계속 그를 응원하였다. 떨어져 있었지만 노무현과 함께 정치적 삶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나만이 아니라 노무현을 지지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광주 경선의 승리. 혹자는 DJ의 보이지 않는 손을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분명 이름 없는 민초들이 이룩한 혁명이었다. 캠프 내에서도 선호 투표를 통한 대역전극을 꿈꿨지 광주의 드라마를 예상하지는 않았다. 나는 마음의 짐을 덜었다. 광주가 노무현을 알아봤구나. 그 마음을 알아봤구나. 내가 끝내 써드리지 못한 글이었지만, 글을 읽지 않아도 마음이 전달되었구나.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수많은 작은 노무현의 글들이 광주에 전달되었다. 노사모들이 직접 찾아다니고 설득하고 보낸 편지들이 대의원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광주는 그렇게 작지 않은 성공을 만들어내었다.

ⓒ 이종호

경선 불복의 위기가 계속 찾아올 때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던지고 노무현 곁으로 갔다. 유시민은 100분 토론 사회자를 때려치웠고, 한 판사는 법복을 벗었다. 캠프에서 누군가가  너도 사표내고 와야 되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웃으면서 "유시민이나 판사는 때려치우면 신문에 나와서 도움이라도 되지만, 내가 사표 낸다고 알아줄 사람도 없으니 계속 뒤에서 응원할 게요"라고 말했다. 좀 비겁했지만 안정된 일자리를 버리기 싫었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너무 이기적이었다. 유시민은 그 나이에 화염병을 들고 바리케이드로 달려갔지만, 옛날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화염병을 들 자신이 없었다. 엉덩이는 들썩였지만 끝내 움직이지는 않았다.

이후 지지율 저하, 단일화 성공, 대선 승리까지 모든 것은 드라마의 연속이었다. 모두가 함께 만드는 드라마였다. 나는 빌었다. 이것이 드라마라면 비극이 되지 말고 해피엔딩이 되어 달라고 말이다. 대통령이 되고 드라마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지지율이 저하되었다가 탄핵이 되고, 다시 기각이 되고 또다시 총선에서 승리했다가 다시 보궐선거에서 연패를 하였다. 그래도 노래 가사처럼 끝내 싸워 이기기를 바랐다.

퇴임 날의 봉하마을,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행복할 줄 알았는데

작년 5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던 날에도 봉하마을을 찾았었다. 아름다운 동화의 마지막을 보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는 기뻤고 사람들도 흥겨웠다. 이제 동화 속 주인공 노무현은 봉하마을에서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마지막 결론을 보는 줄 알았다. 슬픈 영화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 권선징악을 이야기하는 동화 속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줄 알았다.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 ⓒ 유성호

좀 한가해지면 찾아뵈어야지. 퇴임하시고 나면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도 많으셨을 것이니 한 1년 지나면 인사를 드리러 가야지. 참모 일을 할 때처럼 그에게 인사드리러 가는 일을 차일피일 미뤘다.

검찰 수사가 진행이 되고 문득 옛날에 봤던 '노무현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더 이상 미뤄선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고, 늘 보던 사람이 아니라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뉴페이스가 가면 좀 위로받지 않으실까 하고 비서관을 통해 인사드리고 싶다는 연락을 넣었다. OK사인이 나고 일정을 조정하는 와중에 가족들과 관련한 일들이 보도가 되기 시작했다. 봉하에서 심기가 불편하셔서 보기 어렵겠다는 전갈이 다시 왔다. 나중에 다시 뵐 수 있겠지 했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뵐 수만 있었다면 식사 대접을 해 드리고 싶었다. 김해에서 제일 좋은 식당을 잡아 다섯 살 내 아들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옛날에 나이가 꽉 찼는데 왜 결혼 안하냐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덕분에 결혼도 하고 행복한 나라에 잘 살고 있다고. 이 아들 앞에서 너무 자랑스러운 대통령이셨다고 그 말씀을 해드리고 싶었다. 낯간지러워서 잘 못하는 그런 말을 너무 힘들어하실 대통령께 꼭 해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았다.

퇴임하던 날 진영읍내에서 봉하마을까지 걸어 들어가는 길은 동화책 속 아름다운 길이었는데, 빈소를 찾아 걸어가는 길은 슬픈 영화 속의 길이 되었다. 슬픈 영화를 보는 것처럼 울면서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참으면서 걸어갔다. 하늘에서는 장대비가 쏟아졌다. 남은 사람들 고생 안 시키려고 가신다더니 하늘도 우는가보다.

빈소 앞에서 나는 목 놓아 울고 싶었다. 그러나 수많은 조문객들 앞에서 울만한 자리와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서울에서 준비한 담배와 1회용 라이터를 조화 대신에 올려드렸다. 그래도 마지막 담배 한 대는 피우고 가셨어야 했는데... ...

다섯 살짜리 아들은 아빠의 마음도 모르고 자꾸 놀아만 달라고 한다. TV를 틀어도 인터넷을 봐도 눈물만 자꾸 나는 아빠에게 놀아달라고 한다. 죽음이 뭔지 모르는 아들은 대통령이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본다. 그래서 또 눈물이 난다. 29일은 직장 눈치가 보여도 휴가를 내고 경복궁 앞으로 아들을 데리고 나갈 생각이다. 너에게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무척 애쓰시다가 돌아가셨다고 아들에게 이야기해줄 작정이다.

참여정부 5년간 내가 받은 유일한 특혜는 명절 때마다 받은 청와대 선물이었다. 아들이 태어나서 이유식을 할 때쯤, 때마침 청와대에서 설 선물로 전국의 고급 쌀을 조그맣게 포장하여 보냈다. 대통령은 선물을 꼭 전국 각지의 생산품을 모아 종합선물세트 식으로 보냈다. 그가 생각했던 정치철학이 선물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 쌀로 아들에게 이유식을 해 주었다.

그 아들을 데리고 영결식장에서 사진을 찍어줄 생각이다. 그리고 죽음의 의미를 알게 될 나이가 되면 사진을 보여주며 노무현 대통령의 정신을 가르쳐줄 작정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노무현 대통령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줄 아셨던 그런 분이셨다. 그는 진정으로 대한민국을 걱정했고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애쓰셨단다. 슬픈 영화 속 주인공처럼 가셨지만, 우리 마음 속에 그리고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살아계실 것이다.

아들아, 너도 노무현 대통령처럼 훌륭하게 자라라!

 26일 오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가 마련된 서울 덕수궁앞 버스정류장에 시민들이 근조 리본 수백개를 붙여 놓았다.
26일 오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가 마련된 서울 덕수궁앞 버스정류장에 시민들이 근조 리본 수백개를 붙여 놓았다. ⓒ 권우성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노무현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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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서 사회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고등어 사전(메디치미디어)>, <나의 권리를 말한다(뜨인돌)>, <세상을 보는 경제(인포더북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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