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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경첩> 겉표지
<구부러진 경첩>겉표지 ⓒ 고려원북스

미국의 추리작가 존 딕슨 카는 불가능 범죄의 대가다. '불가능 범죄'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불가능한 상황에서의 범죄, 살인을 뜻한다.

 

폐쇄된 밀실에서 사람이 살해되거나, 주변에 아무도 접근한 흔적이 없는 눈밭에서 생기는 살인사건 등이다. 이런 소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독자들의 흥미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존 딕슨 카는 밀실에 집착해서 수많은 밀실 트릭을 만들어냈다. 밀실로 대표되는 불가능 범죄의 완벽한 구현, 이것이야 말로 모든 추리작가가 한 번쯤은 꿈꾸어보는 로망이 아닐까.

 

존 딕슨 카의 또 한 가지 특징은 바로 괴기 취향이다. 어두운 전설과 괴담을 살인사건과 한데 뒤섞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때문에 한밤 중에 그의 작품을 읽다보면 오싹해지는 경우가 많다.

 

카의 작풍(作風)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밀실과 괴기'인 것이다. <마녀가 사는 곳>, <화형법정>, <흑사장 살인사건>, <해골성> 등이 그런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제목에서 풍기는 분위기부터 만만치 않다.

 

밀실과 괴기에 집착했던 존 딕슨 카

 

카의 1938년 작품인 <구부러진 경첩>도 마찬가지다. 작품의 배경은 영국 남동부의 켄트주. 미국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1년 전에 귀향한 존 판리 경은 자신의 영지를 훌륭하게 관리하고 있다. 귀향한 직후 결혼해서 안정된 가정도 꾸리고 있다.

 

존 판리 경은 15살때 집에서 쫓겨나듯이 미국으로 떠났다. 마법과 악마숭배를 포함한 초자연적인 현상을 공부하고, 타락한 행동으로 인해서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것이 그 이유다. 판리 경은 타이타닉호에 승선해서 미국으로 떠나고, 항해중에 침몰된 타이타닉호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미국에 도착한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후에 자신의 영지를 상속받기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다소 우울하고 신경과민이긴 하지만, 판리 경은 주위의 사람들과도 마찰없이 잘 지내오고 있다. 그런데 이런 평화를 깨뜨리는 인물이 갑자기 등장한다. 현재의 존 판리 경은 사기꾼이고, 자신이 진짜 존 판리 경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수년간 패트릭 고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그의 주장은 이렇다. 자신은 현재의 존 판리 경과 함께 25년 전에 타이타닉호에 승선했고, 같은 나이의 소년들끼리 대화하다가 장난처럼 자신들의 신분을 서로 바꾸자고 했다는 것이다. 타이타닉이 침몰되는 와중에 그 장난이 실행에 옮겨졌고, 살아남은 자신은 미국에서 패트릭 고어라는 이름으로 그동안 생활해 왔다는 것이다.

 

존 판리 경은 이 말을 믿지 않는다. 아니 타이타닉호에서의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이다. 신분을 밝히기 위한 한바탕의 설전이 벌어지고, 어린 시절 존 판리의 가정교사였던 인물도 여기에 합세해서 누가 진짜 존 판리인지 가려내려 한다.

 

그러던 도중에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정황으로보면 자살 같지만, 자살이라고 하기에는 기이한 점이 있다. 피해자는 정원의 호수가에 서있었고, 목격자의 말에 의하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피해자의 주위에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할 수 있을까?

 

대저택에서 발생한 불가능한 범죄

 

<구부러진 경첩>에는 존 딕슨 카가 창조한 대표적인 탐정 기드온 펠 박사가 나온다. 호탕한 웃음소리를 가진 거구의 남자로 맥주를 좋아하는 탐정이다. 다른 작품들 속에서 거침없는 말과 행동으로 좌중을 휘어잡던 펠 박사지만, <구부러진 경첩>에서는 다소 조용해진 듯한 느낌이다. 맥주를 마시는 모습도 많이 볼 수 없다.

 

대신에 작품을 지배하는 것은 대저택과 그 주위를 둘러싼 음산한 기운이다. 작가의 특기인 괴기 취향이 여기서도 한껏 발휘되고 있다. 매년 7월 31일 자정에 열리는 악마주의자들의 집회, 악마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사용되는 약초들, 자동으로 움직이는 황금마녀 인형 등.

 

살인사건이나 범죄의 동기와는 연관이 없어보이는 이런 요소들을, 작가는 작품 속에서 적절히 뒤섞고 있다. 다른 추리작가와는 구별되는 존 딕슨 카만의 색채와 향기는 여기에서부터 비롯된다. 카의 작품에도 단점은 있다. 불가능한 상황에 너무 집착해서인지, 결말에서 밝혀지는 트릭이 납득이 안될 때가 간혹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인물을 '바꿔치기'하는 수법도 종종 사용한다. 그렇더라도 존 딕슨 카만의 독특한 상황설정과 화려한 이야기들은 이 모든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트릭의 정교함은 둘째치고, 카의 작품들은 독자를 끌어들이는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존 딕슨 카는 미국 출신이지만 영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다. 중세부터 전해져오는 영국의 전설과 민담들이야말로 미스터리 소설의 좋은 소재였을 것이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오래된 성, 고색창연한 대저택들도 기괴한 살인사건의 무대가 되기에 적절하다. 불가능 범죄와 괴기, 트릭이 합쳐진 존 딕슨 카의 작품들은 미스터리 마니아들에게는 성찬이나 마찬가지다.

덧붙이는 글 | <구부러진 경첩> 존 딕슨 카 지음 / 이정임 옮김. 고려원북스 펴냄.


구부러진 경첩

존 딕슨 카 지음, 이정임 옮김, 장경현 감수, 고려원북스(2009)


#구부러진 경첩#존 딕슨 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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