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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암 단양의 사인암은 역동이 지냈던 정4품 사인(舍人) 벼슬의 이름을 딴 암벽이다. 우탁은 여기서 산수를 즐기면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 사인암 단양의 사인암은 역동이 지냈던 정4품 사인(舍人) 벼슬의 이름을 딴 암벽이다. 우탁은 여기서 산수를 즐기면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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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는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걸쳐 형성, 정제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 문학 중 유일무이한 정형시다. 시조는 국문학사에 명멸해 간 여러 시가 형식 중 가장 생명력이 긴 갈래로 지금도 즐겨 불리고 있다. 현대인의 정서를 담는 데는 힘이 달릴 것 같은 이 오래된 시가 양식이 이 날까지 장수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시조의 형성은 고려 말에 유입되어 조선 왕조의 지도 이념으로 각광 받게 된 주자학(성리학)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시조는 고려의 타락 부패한 불교를 극복하고 여말 이래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떠오른 성리학을 신봉하는 유학자들, 이른바 신흥사대부에 의하여 성립된 새로운 시형이었던 것이다.

이들 신흥사대부는 원래 지방의 중소지주에 지나지 않는 향리 출신이었다. 압도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지배력을 행사했지만 지배체제를 합리화할 이념은 갖추지 못한 권문세족과 대결한 이들은 불리한 처지를 사상과 문학적 역량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결국 그들은 역사 창조의 방향과 논리를 휘어잡음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현재까지 전하는 시조집에 작품을 남긴 고려 시대의 작가로 충숙왕 때의 우탁(禹倬, 1262~1342)과 충혜왕 때의 이조년, 공민왕 때의 이존오·길재·원천석·이색·정몽주 등이 있다. 이들이 여말선초의 신흥 사대부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들 가운데 역동 우탁은 출생지인 단양의 단암서원, 영해의 단산서원, 안동의 구계서원(영남대 구내로 이전), 예안의 역동서원 등에 봉안된 유학자다. 그는 성리학을 표방하며 고려문화를 혁신하고자 한 첫 세대다. 안향과 백이정이 원나라에 가서 신유학을 받아들였다면, 역동은 이를 홀로 깨쳐서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구축한 사람인 것이다.

역동은 관학의 확립에 힘쓰고 성균관 유생들에게 성리학을 강명(講明)하면서 성리학의 이론과 실천적 태도를 강조하는 등 여말 유학 진흥에 힘썼다. 그는 경사(經史)에 능했고 역학(易學)에 깊었다. '역동(易東)'이란 선생이 '역'을 해득하여 강학함으로서 '동쪽'(우리나라)에 전해지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현재 충북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다. 자는 천장, 시호는 문희, 본관은 단양이다. 태어나서 사흘째부터 울기 시작, 울음을 그치지 않자, 집안에서는 크게 걱정하였는데 한 노승이 지나가며 "그 녀석 벌써부터 주역을 외우고 있구먼. 큰 인물이오." 하였다는 설화가 전하니 아무래도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단양에 남아 있는 역동의 유적으로 대강면에 있는 사인암이 있다. 우탁은 임금을 보필하는 직책인 정 4품 '사인(舍人)'이라는 벼슬을 지냈고 이후 여기 머물며 후학을 가르쳤다. 이런 연유로 인해 조선 성종 때 단양 군수가 그를 기려 남조천 강변의 50미터 높이 기암을 '사인암'이라 지었던 것이다.

사인암의 장기판 사인암 주변의 바위에는 당시 우탁 선생께서 두었다는 바둑판과 장기판이 새겨져 있다.
▲ 사인암의 장기판 사인암 주변의 바위에는 당시 우탁 선생께서 두었다는 바둑판과 장기판이 새겨져 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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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출신인 그가 경상도와 인연을 맺은 건 1290년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 사록으로 부임하면서다. 그는 영해에 요괴한 신사(神祠)가 있어 백성들이 현혹되는 것을 보고 이를 철폐하고 백성들을 교화하였다. 그의 강직함은 이른바 '지부(持斧) 상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충선왕이 선왕인 충렬왕의 후궁과 밀통하자 그는 흰옷에 '도끼를 들고' 거적을 메고 대궐에 입궐하여 상소하였다. 신하들이 왕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상소문을 펴들고 감히 읽지 못하니 "왕을 모시는 신하로서 그릇된 점을 바로 잡지 못하고 악으로 인도하여 지금에 이르니 경은 그 죄를 아느냐?"고 일갈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왕이 부끄러워하였다.

그 후 왕이 자신의 간언을 듣지 않으므로 관직을 물러나 안동 예안에 은거하여 학문을 닦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친 마을을 도학, 예의, 절조의 세 가지를 가르친 곳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지삼의(知三宜)'라 불렀다. 그러나 이 마을(예안면 선양리)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었으니 역동의 흔적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 안동에서 역동과 관련된 유적은 예안면 정산리에 있는 묘소와 재실, 와룡면 오천리의 역동 유허비(경북유형문화재 제30호)와 역동서원 정도다. 역동유허비는 원래 예안면 선양동 선생의 옛 집터에 세워졌으나 이곳이 안동댐 때문에 수몰되면서 1975년 지금의 장소로 옮겨졌다. 

역동서원 명교당 역동서원은 안동 지역 최초의 서원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9년 복원되었다. 안동대학교가 이전하면서 서원은 현재 이 대학 안에 있다.
▲ 역동서원 명교당 역동서원은 안동 지역 최초의 서원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9년 복원되었다. 안동대학교가 이전하면서 서원은 현재 이 대학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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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서원은 퇴계의 발의의 따라 1570(선조3년)에 예안 부포 오담에 세운 안동 최초의 서원이다. 이 나라 성리학의 거두 퇴계의 발의로 창건되었으니 이 서원의 위상은 남다르다. 서원이 창건되면서 지방 유림의 공의로 우탁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위패를 모셨다.

역동서원이 사액된 것은 1684년(숙종 10년)이다. 그 후, 이 서원은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69년에 현 위치에 복원되었다. 1991년 안동대학교가 이전하면서 서원이 학교 안에 들게 되자 단양 우씨 문중에서 서원을 학교에 기증함으로써 역동서원은 안동대 부속서원이 되었다.

잘 정비된 대학 교정 안에 서 있는 역동서원의 명교당에선 남녀 대학원생이 문짝에 창호지를 바르고 있었다. 바깥에는 교정을 오가는 학생들의 활기가 손에 잡힐 듯했지만, 서원 안에 고인 것은 쓸쓸한 적요다. 입도문 오른편에 역동이 남긴 시조 두 수가 새겨진 시조비가 서 있다.

역동서원의 작약 서원 입도문 앞에 작약이 활짝 피었다.
▲ 역동서원의 작약 서원 입도문 앞에 작약이 활짝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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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산(春山)에 눈 녹인 바람 문득 불고 간데없다.
 잠깐만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게 하고 싶구나.
 귀밑에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 하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늙지 않으려고 다시 젊어보려 하였더니 
 청춘이 날 속이고 백발이 거의로다.
 이따금 꽃밭을 지날 때면 죄지은 듯하여라.

우탁이 남긴 세 수의 시조는 흔히들 '탄로가(嘆老歌)'로 불린다. 주제는 말 그대로 '늙음에 대한 한탄'이 다. 탄로가는 충선왕의 패륜을 극간하다가 벼슬을 버리고 예안에 은거해 학문을 닦던 역동이 어느덧 백발이 되어버린 자신의 노화를 안타까워하며 읊은 노래다.

눈을 녹이는 '봄바람'으로 백발을 녹여 자신의 젊음을 되찾겠다고 노래하는 첫 수는 '탄로'의 한탄 속에서도 인생을 달관한 여유를 보여준다. 노화를 체념하기보다 긍정하는 시적 자아의 정신은 '춘산'의 '봄'으로 드러나고 백발을 '해묵은 서리'로 표현하는 비유도 참신하다.

둘째 수에서는 자연히 찾아오는 늙음을 인위적으로 막아보려는 인간의 솔직한 감정을 처절하게 노래하면서도 '지름길'로 오는 '백발'을 노래하는 관조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셋째 수에서는 늙지 않고 젊어보려는 욕망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백발은 어쩌지 못하고 젊은 여인(꽃밭)을 탐하는 화자의 인간적 욕구를 고백하고 있다.

자연의 질서에 맞서 보려는 인간의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노화는 운명처럼 진행된다. 청춘의 덧없음을 깨달았을 때 이미 자신은 백발이다. 따라서 이 노래들의 주제는 '늙음의 한탄'에 그치지 않고 '순리를 따르며 헛된 노욕에 사로잡히지 말자'는 지혜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역동이 남긴 시조는 실제 세 수지만, 역동서원 앞은 물론, 예안면 정산리에 있는 재실 앞 시비에도 두 수만이 새겨져 있다. 하필이면 빠진 것은 '꽃밭을 지날 때면 죄지은 듯하'다고 진솔하게 고백하는 마지막 수다. 후인들은 고매한 성리학자의 '인간적 욕망'을 엿보는 것이 외람된 일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역동 우탁의 묘소는 예안면 정산리 '웃솥우물'에 있다. 선생의 재사 정정재(鼎井齋) 오른편으로 난 언덕길을 오르면 말끔하게 단장된 선생의 묘소가 있다. 넉넉한 후손을 둔 덕분에 묘소는 물론이거니와 재사도 말끔하게 정비되어 있다.

역동 재사인  정정재(鼎井齋) 예안면 정산리 '웃솥우물'에 있는 역동 선생의 재사.
▲ 역동 재사인 정정재(鼎井齋) 예안면 정산리 '웃솥우물'에 있는 역동 선생의 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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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 묘소 안동시 예안면 정산리에 있는 역동의 묘소. 묘소 아래 선생의 재사 '정정재'가 있다.
▲ 역동 묘소 안동시 예안면 정산리에 있는 역동의 묘소. 묘소 아래 선생의 재사 '정정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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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사의 삼의문 왼편에 있는 시비에 그의 한시 '영호루(映湖樓)'가 새겨져 있다. 이 누각에 올라 읊은 이 시에 대해 국문학자 조동일은 '앞뒤 시기 다른 몇 사람이 영호루를 두고 지은 시와 견주어보면 그 근처에 사는 농민의 생활에 대해서 구체적인 관심을 가진 데 특색이 있다.'고 설명한다. 

嶺南遊蕩閱年多(영남유탕열년다) 영남을 여러 해 동안 두루 돌아다니면서,
最愛湖山景氣佳(최애호산경기가) 이 물가 산의 경치를 가장 사랑하네.
芳草渡頭分客路(방초도두분객로) 풀 향기로운 물결 머리 나그네 길 갈라지고,
綠楊堤畔有農家(녹양제반유농가) 버들 푸른 둑 곁에 농가가 있구나.
風恬鏡面橫烟黛(풍념경면횡연대) 바람 잔 거울 위로 눈썹 연기 비끼었고,
歲久墻頭長土花(세구장두장토화) 오랜 세월 담 머리에 흙꽃이 자랐구나.
雨歇四郊歌擊壤(우헐사교가격양) 비 갠 뒤에 사방 들에서 격양가 노래할 때,
坐看林杪漲寒槎(좌간림초창한사) 숲가에 밀린 차가운 뗏목을 앉아서 본다.

역동의 시비 예안면 정산리 선생의 재사 앞에 있는 시비. 시조비(위), 한시비(아래)
▲ 역동의 시비 예안면 정산리 선생의 재사 앞에 있는 시비. 시조비(위), 한시비(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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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을 표방하며 고려 문화를 혁신하고자 한 첫 세대였지만 아직 그 시대는 새로운 사상을 전개할 단계가 아니었고 문학에서 이룬 바도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안동지역을 '강호가도(江湖歌道)'의 고장으로 보면서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한 향토시가의 유풍이 '역동의 시조'를 기원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라는 시가문학사적 관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초기 성리학을 풀어 이 땅의 신유학의 문을 연 우탁은 만년에 쓸쓸한 '탄로'의 시간을 거쳐 여든한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천도와 인륜을 밝히고 사회적 폐풍을 개혁하고자 했으나 좌절했고, 안동 예안으로 퇴거해 후진을 길렀다.

그는 혁신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가 쓴 세 수의 시조 작품은 700여 년의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아 오늘날 이 시가 형식의 질긴 생명력을 증언하고 있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독자는 시대를 넘어 소통하는 문학의 면모와 늙음을 바라보는 눈길과 지혜에 고금이 따로 있지 않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웹진 <컬쳐라인>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역동 우탁#탄로가#역동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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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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