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격을 남긴 전태일은 어머니와 친구들로부터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과 맹세를 받아내기까지 했지만, 노무현은 아무런 격도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죽음은 그 자체가 거센 격이 되어, 이 땅에서 눈 뜨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들깨웠고 부추겼다. 더불어 많은 것들이 뒤집어졌다. 뒤집어져, 노무현 투신 이전과 딴판으로 달라진 풍경들 가운데 으뜸은 이른바 보수의 대혼돈 현상일는지도 모른다.

 

영구불변일 것 같던 한나라당의 천하세는 하룻밤 사이에 박살났고, 그들의 머리인 이명박은 졸지에 살인자로 몰리는 궁색한 입장이 되었고, 그들을 '교사(敎唆)'하고 '계도'하고 '독려'했던 언론들과 보수 논객들은 이게 도대체 뭐냐고 분통을 터뜨리며, 아예 방향타를 잃고 허둥거리고 있다.

 

6월 10일 22시 30분에 입력된 <조선일보> 강천석 주필의 칼럼은 그 시간, 시청 앞에 모인 촛불들에 겁을 집어먹은 듯, '이명박 정부 1년4개월이 불러 모은 시청 앞 군중을 보라'하고 절박하게 외치며, 그 시간 자신의 소회를 토로하고 있는데, 논리적 질서도, 현실 정합성도 없어 보이는 그의 글은 '좌파'에 대한 증오와 공포가 가득하다는 것밖에는 도대체 무엇을 설파하려는 것인가 종잡아보기 어렵다. 그러고 보면 노무현의 비극을 노무현의 언론탄압 때문으로 몰아붙였던 5월 23일자 사설 '노무현 전대통령의 급작스러운 逝去를 애도한다'는 그의 문장 같다. 논리성이 결여된 채, 마구잡이로 헝크러진 문체가 그런 심증을 갖게 한다.

 

도대체 그들이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답은 쉽다. 그야말로 노무현 때문이다.

 

김동길은 지금 공황상태

 

같은 대상에 대해, 아 이토록 다르게 볼 수도 있고나, 하고 감탄하게 되는 경우는 흔하다. 보수 논객들의 요즘 격앙을 보면서도 그렇다. 그들의 불합리는 얼토당토않아 보인다. 인터넷 포털을 열고 들어가면 그들이 뭐라 했는가, 거기 떠올라와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 제목이나 스쳐보게 될 뿐, 그들의 글을 읽게 되지도 않는다. 물론 언급할 가치도 느끼지 못한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말이 아니면 갋지를 말라, 했다.

 

그러면서도 굳이 김동길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를테면 '살아있는 한국지성', 그런 제목으로 이름을 적어내려 간다면 김동길을 젖혀둘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고, 김동길을 짚어보는 것은 언론을 포함한 범우파 보수 논객들의 관점이나 정서나 사리분별 능력을 짚어보는 작업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보수적 관점의 요약이나, 응축, 또는 분석, 아마 그런 시도가 될 것 같다.

 

노무현에 대한 여론과 언론의 관점이 아예 혁명적으로 뒤집어져버린 다음 김동길은 아예 공황 상태다. 지식인다운 균형감각마저 잃었다. 노무현에 대해, 노무현을 향한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 노무현을 보도하는 언론에 대해, 그들을 용납하고 있는 이명박에 대해, 날마다 격정적인 불만들을 쏟아낸다. 그것은 전대미문의 위기에 맞닥뜨린 범우파가 느끼고 있는 절박한 공포의 숨 가쁜 표현일 것 같다.

 

언론이 그의 글들을 인용 보도하면서 달아둔 제목만으로 보자면, 김동길은 노무현에 대한 이례적인 추모열기가 노사모와 언론의 조작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틀렸다.

 

노사모는 공식적인 숫자는 12만쯤이지만, 그들의 오프 모임이나 다달이 회비를 내는 회원 숫자를 통해 어림잡아볼 수 있는 적극적인 노사모는 2천 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500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토록 눈물까지 흘리게 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언론의 조작 때문이라는 불만도 근거가 약하다. 왜냐하면 언론 효과가 채 나타나기 전일 첫날과 그 이튿날에 봉하를 찾아온 조문객이 30만이나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봉하를 향해 걸었다. 봉하는 시골 벽지다. 교통도 불편하다. 남쪽 끝에 있으니까 전국적으로 볼 때 접근성도 좋다 할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봉하를 향해 줄기차게 걸었다. 김동길은 눈을 감은 채 세상을 보고 있다.

 

심지어는 자살 명령까지, 그동안 김동길이 노무현을 향해 날렸던 수많은 독설들은 그래봤자 검찰이나 언론의 교사에 철모르고 부화뇌동했던 게 된다. <경향신문> 5월 29일자 만평에는 만평자 자신이 그림에 등장하며, 그가 들고 있는 검은 휘장에는 이런 글이 내리닫이로 써 있다 - 받아쓰기식 중계만평, 책임을 통감하며 반성합니다. <한국일보> 인터넷판 6월 11일자 화면에 '한국일보도 반성합니다'라는 제목이 떠올라왔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지식인, 김동길에게는 이만한 반성능력도 없다.

 

민심은 천심이다

 

김동길은 '우리가 이놈(요새 젊은이)들에게 조국을 맡기고 떠나야 하는데, 대통령께서 좀 잘 타이르고 깨우쳐 주세요. 부탁합니다' 했는데, 이거야 말로 망발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김동길이 그토록 흠숭하는 대통령이 젊은이들에게 사표(師表)가 되는 것은 아예 애저녁에 글러먹은 일이기 때문이다.

 

BBK니 도곡동 땅이니 하는 거야 젖혀두고 본다 할지라도, 대통령이 전과 14범이라는 것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돈 되는 짓이라면 참 치사한 짓까지 모조리 했다'는 세평도 꾸며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명박은 거짓말의 달인이다. 대통령에 대한 '요새 젊은이'들의 호칭은 대충 '쥐'나 '쥐색퀴'이고, 이명박과 관련된 기사가 젊은이들의 놀이터인 인터넷에 올라오면 단숨에 수없이 많은 악플들이 주렁주렁 매달리는데, 그 대통령이 그들에게 무엇을 타이를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런 사람이 젊은이의 사표가 될 수 있다고, 김동길은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굳이 그 대답을 듣고 싶다.

 

그런데 김동길은 거기서도 더 나아가, 이명박에게, 시국선언을 한 서울대학교 교수들을 불러다가 야단 좀 치라 한다. 한 시절, 링컨을 되풀이하여 이야기하던 민주주의 신봉자 김동길이 이제는 절대군주 루이 14세에게 아첨을 바쳤던 보쉬에를 흉내내 보기로 한 것 같다. 대통령이면 누구라도 야단칠 수 있다, 그것이 김동길의 생각인 듯하다. 사람이 이토록 변할 수 있는가? 놀라웠다. 하도 궁금하여 그의 홈페이지를 찾아들어갔다가, 거기 입구에 이명박의 대짜배기 사진이 걸려 있기에 아이쿠 하는 심정으로 되돌아 나왔다.

 

김동길의 글을 보도한 어느 인터넷 포털 뉴스 사이트 제목에 '내가 똥을 쌌습니까? 노망이라 하게?'라는 게 있어서, 처음으로 김동길 글과 관련된 기사를 읽어보게 되었는데, 그 기사보다도 그 기사 끝에 달려 있는 댓글 가운데 '추천수'가 가장 많은 댓글이 눈에 띄었다.

 

-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을 쌌습니다^^

 

몹시 민망했다. 김동길은 '분통이 터집니다'하고 대통령에게 하소연했다. 그거야 말로 어찌해 볼 수 없을 것 같다. 민심은 천심이다 - 김동길의 글에서 더러 본 구절이다.

 

-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이 있다. 민심을 조작하는 자는 천심을 조작하는 것인데 그 일이 과연 가능하다고 믿는가. 소름이 끼친다.(김동길박사의 세상읽기 2000년 7월 5일)

 

꼭 맞는 말씀 같지는 않다. 이를테면 이른바 조중동 프레임은 사람들로 하여금 마법에 걸리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마법은 한시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민심 조작은 불가능하다. 노무현을 향한 사람들의 마음, 그것은 누가 조작하거나 조종한 게 아니다. 김동길이 균형감각을 되찾아 존경받는 원로의 자리에 앉게 되는 날, 한 시절 김동길의 노래 가운데 하나였던 민주주의가 이 땅에서 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적(利敵)의 어리석음

 

그런데 김동길류나 이명박들이 눈길을 낮춰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이 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노무현 추모열기의 적어도 얼마만큼은 김동길류나 이명박들에 대한 실망이나 반감 때문일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눈, 그들만의 목소리, 그들만의 방법으로 사람들을 야유했고, 욕했고, 내몰았고, 두들겨팼고, 죽이기까지 했다. 길을 가는 사람이 범법자였다. 무작정 잡아 가뒀다. 심지어는 외국인 관광객까지 두들겨패 늑골에 금이 가게 했다.

 

결국은 이명박이 죽인 거라 생각되고 있는 노무현의 국민장을 끝냈을 때쯤, 대한민국에서는 노란 손수건을 지녔다든가, 촛불을 손에 들었다든가, 또는 불법시위의 가능성이 있다는 경찰의 판단만으로도 자유권을 제약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항의해봤자 소용없다. 그럴 경우에는 공무집행방해라는 구체적 죄목이 주어질 뿐이기 때문이다.

 

마스크를 쓰면 잡아간다는 법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하는데, 그런 법을 만드는 집단이나, 전 정권 사람이라 하여 무작정 쫓아내는 정권이 국민들의 지지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 이른바 보수 단체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광장이 시민단체에게는 한없이 인색한 것도 이적의 효과를 극대화할 뿐이다. 부자 중심 정책이나 대기업 프랜드리니 하는 것도 없는 사람들 속이나 뒤집어 놓을 뿐이다. 롯데그룹 하나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수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낙담하게 했다. 그 모든 것들에 우선하여, 고갈 상태의 민주주의가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노무현의 참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게 했다. 노무현을 잃은 다음 두문불출을 감행한 신해철이 오래 전 어느 날, 노무현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 숲을 지나고 있을 때는 숲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다.

 

예지가 담긴 예언 같다. 사람들이 이제 숲을 지났다. 양희은의 노래에 이런 대목이 있다.

 

-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네.

 

사람들은 이제 숲을 보기 시작했다. 김동길이 그토록 걱정하는 '조국'에 아예 망쪼가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는 시대의 실세를 거머쥐고 있는 범우파가, 모든 국민들이 보고 있는 바로 그 숲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문제는 더 어려워진다.

 

어떻게 해야 할까?


#노무현#김동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