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우리 사회에 종교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때 종교가 우리 시대 한국개신교라면, 이 질문은 우리에게 '다른' 또는 '더 깊은' 의미를 줄 수 있을까. 개인 영혼을 구원하는 데서 한 발짝도 옮기지 못하고 있는 개신교의 교리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자' 러셀의 기독교 교리 비판이 살갑게 들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개체의 영혼에 대한 기독교의 강조는 기독교 사회의 윤리관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이 교리는 근본적으로 스토아학파의 교리와 유사한데, 스토아학파의 교리가 정치적 희망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사회 환경에서 생겨났듯 이 교리도 그러한 환경에서 생겨난 것이다. (중략) 그래서 사회적 미덕이라는 것은 기독교 윤리에서는 제외되었다.(버트란트 러셀, 이재황 옮김, <종교는 필요한 것인가> 범우사, 1987. 43 쪽)."
한국개신교(회)와 교인들이 우리 시대, 우리 사회에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초기 기독교회에 비교해 크게 나아진 게 없다. 우리 시대 한국개신교(회)는 개인의 삶에 더욱 근본적이고 철저하게 영향을 주는 정치와, 사회, 경제, 문화 등 여러 부문에서 져야 할 책임과 공동체 윤리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의 '개인 영혼'의 강조, '저 하늘나라' 구원의 교리가 만들어낸 극도의 '개인주의'는 우리 시대 한국개신교회에서도 여전히 절대적이다. 교인들이 권력 앞에 움츠려들 필요가 없어졌는데도 말이다. 자기결정권과 자기 복지, 공동체의 다른 성원들의 그것들을 위해 자기 목소리를 내고 현실 정치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대신에 한국개신교인들은 현실정치에서 발을 뺀 채 교회 안 활동에 매어달리고, 개인 구원을 지상(至上) 과제로 삼으면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김선주가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에서 이야기 하려 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 닿아 있다. 설교의 대부분이 축복과 저주에 관한 것인 것(29쪽)도,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이야기하는 목사들이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움직이는 것도(49-93쪽)도 기독교 교리에서 공동체 윤리나 '사회적 미덕'을 소홀히 여기는 데서 가능한 일이다. 목사들과 한국개신교회 교인들이 '경제제일주의(144 쪽)'에 휘둘리는 것도 교회가 공동체 윤리, 교회의 정치·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김선주가 전도를 '제국주의자가 교회 밖 사람들을 타자(他者)화 하는 전략'이라고 묘사한 것을, 한국개신교회와 교인들은 가장 뼈아픈 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한국개신교회의 자기정체성과 전도방식에 한번이라도 문제 제기를 해 보았던 사람이라면 말이다. 한국개신교회의 전도방법 또한 개인 구원이라는 교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한국개신교회가 공동체 윤리, 공동체 구원이라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한, 교회는 이런 비판을 계속 들어야 할 것이다.
한국의 개신교회가 초기 기독교회의 개인주의, 개인 영혼 구원이라는 교리에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새, 교회 밖 세상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달라졌다. 세상은 서양의 것이라고는 하지만 근대의 과학의 발견과 계몽의 시대를 거치면서 이성과 합리적 사고를 토대로 하여 편견과 무지에서 깨어나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교회 밖의 공동체 성원들은 개인과 공동체를 억압하는 모든 제도와 문화를 벗어버리려고 안간힘을 쓰게 되었다.
그런데도 한국개신교회는 근대 이전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고스란히 간직해 오고 있다. 목회자의 자기 절대화(39쪽)와 목사 1인 교회 지배가 가능한 것(163 쪽)도 한국개신교회의 전근대성 때문이다. 김선주가 에리히 프롬을 인용해 지적했듯, 근대인에게서 마조히즘 경향이 있다(176 쪽)는 점을 인정한다 해도, 한국개신교인들이 목사에게 거의 '절대'에 가깝게 복종하고 성전중심 신앙(245 쪽)에 매달리는 모습은 문명사회에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김선주는 이 책에서, 대형교회 목사들 또는 세칭 교단의 '주류' 행세를 하는 목사들의 행태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비판은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절대 다수의 목사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반성적으로 살펴볼 볼 기회를 주었다. 그런데 이런 비판이 과연 목사들에게만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까. 평신도들과 그들을 대표하는 장로들에게는 책임이 없는가. 한국개신교회는 법적·제도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목사 1인에게 절대 권한이 주어져 있다.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되는 교회의 사실상의 최고 의결기관인 당회의 권한이 계속되는 한, 한국개신교회가 전근대성을 벗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개신교회가 성서의 정신, 나사렛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회복하려면, 평신도들과 그 대표들이 자기 역할과 자기정체성을 하루 빨리 찾아가야 할 것이다. 이는 합리적·과학적 사고나 이성을 신앙 과정 속에서 생략하지 않는 데서부터 출발할 일이다. 교회를 통하여 사교의 폭을 넓히고, '살아서도' 입신출세하고, 더 나아가 조그마한 권력이라도 얻어 보려는 자세를 벗지 않는 한 비뚤어진 교회 지도자들은 결코 자신들의 절대 권한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 밖의 '교회 비판은 더욱 거세어질 것이다.
한국개신교회의 교인들이 '계몽'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 한 우리 사회에서 한국개신교회가 자기 역할을 다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자세, 공동체의 다른 성원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려는 자세, 우리 시대 절대 약자들과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의 외침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자세를 갖추는 것도 '계몽'의 과정을 거친 뒤라야 가능한 일이다. 교회 밖의 것이라 할지라도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라면 겸허하게 귀담아 들을 일이다. '계몽 이후'의 합리적 사고와 비판적 지성을 갖춘 견실한 평신도들이 교회 개혁에 적극 참여하는 것에서 한국개신교회가 혁명적으로 탈바꿈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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