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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헤어진 조수경은 30분쯤 후 공항 입국 출구에서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검은색 가방 하나만 달랑 들려 있었다. 그녀는 공중전화박스를 찾아 들어갔다.

"엄마, 나야."
"수경이구나?"
"엄마 별 일 없지?"
"그럼, 넌 귀국 날짜는 잡혔니?"
"금방 갈 거야."
"금방이라니? 그게 언젠데?"
"한 시간 반 후쯤."
"아니? 그럼 한국에 왔다는 거니?"
"응. 인천공항이야. 내일이 아빠 제사지?"

조수경은 기쁨으로 들떠 있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는 외동딸의 무사한 귀국에 안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기일에 맞춰 돌아온 딸을 무척 고맙고 대견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공항 청사에서 나온 그녀는 리무진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가판대에서 일간 신문 하나를 사 들었다.

조수경은 약간 감회 어린 마음으로 고국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공항고속도로나 한강의 모습은 1년 반 전이나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고국을 오래 떠나본 그녀로서 다시 보는 서울의 모습은 정겹기 그지없었다. 버스는 여의도 가까이에 이르러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아침 러시아워에 교통이 혼잡한 것도 예전과 마찬가지였다.

첫번째 기사, 인혁당재건위사건

그녀는 신문을 꺼내 펼쳤다. 도로가 더욱 혼잡해져서 버스는 아예 멈춰서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녀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 신문을 일부러 꼼꼼히 읽어 나갔다. 그녀의 눈에 띈 기사는 두 가지였다. 그녀가 첫 번째로 읽은  기사는, "인혁당 사건 30년 만에 재심 열린다"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30년 만에 법정에서 진실이 가려지게 된 인민혁명위원회(인혁당재건위) 사건의 재심 첫 공판이 오늘 열린다. 이 재심에서는 당시 비상군법회의 수사 기록이 증거 능력을 갖고 있는지를 두고 검찰과 변호인단과의 치열한 논쟁이 예상된다.

핵심적인 쟁점은 '수사 기록의 피의자신문조서 등이 고문 수사의 결과인지 아닌지'이다. 조작된 증거는 유죄를 뒷받침할 증거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김용원씨 등 숨진 피고인 8명의 유죄 증거는 당시 피의자의 신문조서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검찰이 새로운 증거를 낼지도 주목된다. 그러나 법원이 이미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의 결과를 근거로'당시 수사기록은 고문과 가혹행위에 의해 조작됐다'고 판단해 재심을 결정한 상황에서 검찰이 적극적으로 유죄 입증에 나서기는 어려워 보인다.

재심을 결정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재판장 이기택)는 지난해 12월, "의문사위 조사 자료를 보면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관과 경찰관이 수사 과정에서 피고인들에게 폭행을 한 점이 인정된다."며 가혹 행위가 자행되었을 것으로 판단했다.

피고인들이 모두 숨졌기 때문에 재심은 피고인 심문 없이 곧바로 증거 신청과 증인 신문으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서울중앙지검 안창호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유·무죄에 대한 선입견이 없이 재판에 임하겠다"고 밝혔다. 안 차장검사는 "이 사건은 검찰이 아니라 비상군법회의가 수사와 기소, 재판을 담당한 사건"이라고 선을 그었다. 심리를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 문용선 재판장은 "오랜 시간 고통 받은 유족들을 생각해 되도록 신속하게 재판을 끝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인혁당 사건은 조수경으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사건이었다. 그녀는 기사의 내용이 생소하면서도 황당하다고 느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러고 보니 이 나라가 민주화된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기사에 적힌 사실들을 현실감을 가지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래로 이어지는 해설 기사를 더 읽어 보았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1974년 중앙정보부가 유신 반대 투쟁을 벌인 서울 문리대생 주도의 민청학련을 수사하면서 불거졌다.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의 배후 세력으로 인혁당재건위를 지목, 이를 북한의 지령을 받은 지하조직으로 규정해 관련자 8명을 사형에 처하게끔 한 것이다. '인혁당재건위'는 1964년에 있었던 1차 인혁당 사건 연루자들이 당 재건을 기도했다며 중앙정보부에서 붙인 이름이다.

1차 인혁당 사건은 1964년 8월 당시 중앙정보부가,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획책한 인민혁명당 조직을 적발해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했다"고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발표와는 달리 1심에서 도예종씨와 박현채씨에게 각각 징역 3년과 1년이 선고되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이때 수사 과정에서 서울지검 검사 3명이 관련자들의 기소에 반발해 사표를 내기도 했다.

이로부터 10년 만에 인혁당은 중앙정보부에 의해 민청학련의 배후로 새로이 지목되었다. 중앙정보부는 1차 인혁당 사건 때에 재판 과정에서 실체가 입증되지 않은 인혁당이 재건을 기도했다고 주장했다. 1차 사건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신직수씨와 중앙정보부 수사담당 요원이던 이용택씨는 2차 사건 때에는 각각 중앙정보부장과 수사지휘국장이 되어 등장했다.

이 두 사람이 이끄는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에 연루된 이철, 유인태, 이강철, 여정남씨 등을 수사한 후, 민청학련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재건위의 배후 조종을 받았다고 최종적으로 발표했다. 인혁당재건위 및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253명 중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다음 해인 75년 2월 대부분 석방되었지만, 인혁당재건위 관련자 23명은 석방에서 제외되었다. 75년 4월 8일 서도병(대구매일신문 기자)씨 등 인혁당 관련자 8명은 사형 판결을 받았고 판결 20시간 만인 다음 날 오전 6시에 형이 전격적으로 집행되었다.

국제법학자협회는 8명의 사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사법 암흑의 날'로 규정했다. 사형 당한 8명은 꾸준히 민주화운동을 해왔던 무명 인사들이었다.

유신체제 2년째에 접어들어 격렬한 반체제운동에 직면한 박정희 유신정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독재세력은 유명하거나 학벌 좋은 사람 대신에 덜 주목받는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택한 것이라고 인권 단체와 관련 전문가들은 주장해 왔다. 지명도가 높은 사람을 죽이면 국내외적으로 많은 관심과 문제 제기가 있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조수경의 눈은 1975년 4월 9일이라는 연도와 날짜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것은 8명이 사형을 당한 연도와 날짜였는데 공교롭게도 자신이 태어났던 시점과 며칠 차이밖에는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4월 9일은 바로 내일이었다. 그들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들이 죽어갔던 시간에 자기는 태어났고 벌써 30여 년 동안 자기는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왔다는 것이 왠지 박정한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번째 기사, 판교여인살인사건

다음으로 그녀의 관심을 끈 것은 2단으로 작게 취급된 살인사건이었다. 판교 아파트 단지 조성 토목 공사장에서 중년 여인의 사체가 발견되었다는 기사였다. 경찰은 여인의 신원을 확인 중에 있다고 했다. 여인의 몸에서는 어떠한 소지품도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브래지어가 벗겨진 여인의 유방에 글씨가 쓰여 있다는 것이었다. 유방의 한쪽에는 영어 대문자로 'GREED',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B.K. 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조수경은 직감적으로 심상치 않은 사건이라고 느꼈다. 'GREED'는 우리 말 '탐욕'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B.K.는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범인의 신원과 관련된 약자가 아닐까 하는 추정이 들었다. 아무튼 살인범이 메시지를 남기고 자신을 알리려 했다는 것은 범행에 대타적 목적이 있음을 의미했다. 게다가 이런 살인은 십중팔구 연쇄살인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조수경은 내일 경찰청에 나가면 자세한 것을 알아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의 직장은 경찰청 수사과 과학수사센터였다. 그녀는 과학수사센터 범죄정보지원계에 발령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은 금년 말까지 주 2~3회씩 연재될 에정입니다.



태그:#인혁당, #과학수사센터, #중앙정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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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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