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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과거와 미래
  
여전히 그대의 이름을 막 부르는 것이 익숙하지가 않군. 그러나 더 생각해 보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어.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내가 그대의 이름을 허물없이 부르는 것을 용납해 줘. 이름뿐 아니라 이미 나는 수경에게 반말 비슷한 어투로 지껄이고 있어. 물론 수경은 이런 나의 언행을 비례로 여길 만큼 속 좁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긴 했지.

비행기에서 그대가 조수경이라는 이름을 밝혔을 때 사실 나는 내심 크게 놀랐어. 나는 조수경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거든. 그런데 수경이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받았다는 말을 하자 나는 오히려 수경의 신분을 더 확신하게 되었지.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세상에는 조금 우스운 일들이 생기게 되었는데 바로 그것이었지. 온라인상에서는 이미 공공연한 일이 되었는데도 그것이 오프라인에서는 마치 대외비처럼 취급되는 현상 말이야. 이미 한국의 여자 수사관 조수경은 FBI의 홈페이지에 대대적으로 소개된 인물이었거든.

FBI 사이트의 정회원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야. 회원이 아니더라도 아이디와 패스워드만 빌리면 언제나 들어가 볼 수 있지. 게다가 어느 나라건 국내 수사를 담당하는 정보기관은 거의 공개하고 있는 것이 요즘의 추세야. 영국의 M.15는 국장의 사진과 신원까지도 홈페이지에 올려놓고 있어. 한국의 경찰청도 의외로 많은 정보를 공개하고 있더군. 아직도 음습한 나라는 두 곳인데 이스라엘과 조선이지.

아무튼 나는 수경이 범죄 수사의 최정예 학교라고 할 수 있는 VICAP를 수석으로 이수했다는 사실을 대견스럽게 여기고 있던 차였어. 뒤늦게나마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군. 게다가 수경은 건강하고 아름다워 보였어. 내가 그런 수경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세상에서 수경의 어머니 다음일 거라는 말을 한다면 물론 지금으로서는 이해되지 않겠지.

참, 그러고 보니 거짓말은 수경만 한 게 아니었어. 내가 교육 사업을 하러 고국에 왔다는 말을 했을 때 수경은 조금도 믿지 않았어. 나는 역시 수경이 빈틈없는 수사관이라는 점을 확인했지.

지금은 내가 귀국한 진짜 이유를 밝혀도 될 것 같군. 나는 죽은 내 친구들과의 약속을 실행하기 위해 귀국했던 것이야. 참 오래된 약속이지. 30년이 조금 넘었으니까. 

이제 우리들의 현안으로 화제를 바꾸겠어. 짐작하건대 수경은 귀국하자마자 어머니를 뵙고 다음 날 경찰청에 출근했겠지. 경찰청에서는 조수경 수사관을 대대적으로 환영했을 것이고...

"자랑스럽소. 조 수사관."

조수경은 경찰청장이 자기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과학수사는 한국 경찰의 사활이 달려 있는 과업입니다."

한국 경찰의 산증인이라는 경찰청장은 60에 이른 나이였다. 그의 머리칼은 온통 은발이었다. 그는 경찰 수사권 독립을 임기 내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경찰이 수사권 독립을 얻으려면 검찰보다 선진화되는 것이 급선무인데, 경찰 선진화의 핵심이 바로 과학수사에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과학수사와 경찰 수사권 독립은 상보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한 예로 강력사건이 터져 합동수사본부가 결성되면 인생관이 미숙하고 수사 경험이 일천한 평검사의 수사 지휘를 받게 되는 일을 들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수사가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전개되기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검사들은 과학수사에 대한 식견이 부족했다. 그러니 경찰로서는 합동수사본부의 결성을 꺼리지 않을 수 없다.

체제가 비과학적인데 실무가 과학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경찰이 검찰의 수사 지휘를 받는 체제는 경찰이 보기에 무익하고도 비능률적이었다. 하지만 한국 경찰에는 힘이 없었다. 그렇기에 경찰청장은 경찰 나름대로 우선 할 수 있는 일부터 한다는 자세로 임하고 있었다. 조수경도 전직 두 대통령에 의해 선거공약으로 제시되었던 경찰 수사권 독립이 안 되고 있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청장실에서 나온 조수경에게 반가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경찰청에도 과학수사센터 내에 미국의 VICAP를 참고한 VICAT(Violent Crime Analysis Team)가 있는데 그에 대한 지원이 대폭 강화된다는 것이었다. VICAT는 한국어로 '강력범죄분석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본인이 적임자라는 것은 본인 자신이 잘 알고 있을 테고."

수사부장 용재규는 조수경을 VICAT의 팀장으로 내정해 놓고 있었다. 용 부장은 조수경이  경찰대학 재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 당시 그는 경찰대학의 강사였다.

"감사합니다."
"배운 것을 바로 써먹을 수가 있게 되어 다행이지?"

"특별히 배운 것도 없습니다. 한국 경찰이나 비슷합니다."
"말을 나이스하게 하는 법을 배워 왔군."

"어제 신문에 난 사건은 아직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판교 말이지?"

"심각해 보이던데요?"
"나도 그렇게 보았는데 아직 언론에서는 심각한 낌새를 차리지 못한 것 같아."

"죽은 여자의 신원은 확인이 됐습니까?"
"아직 보고가 없어."

"'GREED'라고 되어 있으면 일단 피해자가 탐욕스러운 사람이라서 죽였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나요?"
"그렇지, 아직은."

"그럼 혹시 BK는 뭔지 아십니까?"
"모르겠어. 한때 메이저리그 투수 김병현을 스포츠 신문들이 BK라고 부른 적이 있고, 애들이 좋아하던 랩 유행가로 'BK 러브'란 것도 있었어."

"BK 21이란 것도 있지요?"
"뭐, 대학과 관련된 말이라지?"

"'세계화 대학 육성 대책'이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똑같군."

"범인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는 거지요?"

용 부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사하지도 않고 알면 신이거나 점쟁이일 테고, 수사해서 알아내는 것이 진정한 수사관이지."

용 부장은 이번에는 스스로 심각한 표정을 누그러뜨리면서 약간 쑥스럽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근데 해 놓고 보니 내가 무지 뻔한 말을 했네."


#BK#경찰수사권독립#과학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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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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