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친 이듬날은 언제나처럼 하늘이 파랗습니다. 여느 날에는 하늘이 파란 모습을 올려다볼 수 없게 된 오늘날이기 때문에, 이제는 비 그친 이듬날에는 어김없이 골목마실을 하면서 파란빛을 만나려고 합니다. 파란빛을 머금은 햇살과 파란빛을 풍기는 바람을 맞으면서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깁니다. 이 파란 느낌이 제 몸을 어루만져 주고 제 마음을 쓰다듬어 주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지난주에는 ㅅ중학교 담벼락하고 맞닿은 답동 골목 안쪽을 거닐었습니다. 어린 나날, 동무들하고 어울려 놀면서 으레 지나다니던 길을 어른이 되어 다시 거니는 느낌은 새삼스럽습니다. 그 어린 때에는 골목길마다 가지런히 놓인 앙증맞은 꽃그릇을 하나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막 천자문을 익힐 때라 골목집마다 대문가에 붙여놓은 문패를 들여다보면서 한자읽기를 해 보았지만, 집집마다 문패가 어떻게 다른가를 눈여겨볼 깜냥은 못 되었습니다. 동무하고 성은 같으나 이름이 다른 어른들 이름을 문패로 하나둘 만나며 낯설면서도 반갑다고 느꼈는데, 그 어릴 때에나 지금 나이먹은 때에나 마찬가지로 떠오르는 모습이며 바라보는 모습은, 골목길 그늘진 자리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걸상과 평상입니다.
그때에도 아주머니 할머니들은 걸상이나 평상에 앉아서 동무들하고 어울려 있었고, 동무하고 놀고자 찾아간 저 같은 조무래기를 동네 어르신들은 걸상이나 평상에 앉아서 웃음으로 반겨 주었습니다.
이즈음, 동네마실을 하면서 걸상이나 평상에 앉아 골목아이와 노는 어르신을 만나기란 수월하지 않습니다. 서너 살만 되어도 으레 어린이집에 보내곤 하니까요. 그러나, 예전 같지는 않다 하여도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올 무렵이면 엄마랑 할머니랑 또는 할아버지랑 평상에서 어울리거나 장판을 깐 골목 어귀에서 어울리는 모습을 드문드문 만납니다. 한식구가 도란도란 어우러진 모습을 아기를 안고 지나가며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고 인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우리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나 저 아이들처럼 골목길을 뛰놀 나이가 되면, 아이는 이웃 동무를 사귀면서 이웃사람과 나란히 평상이나 장판에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나누지 않으랴 싶습니다.
어제 하루 비가 퍼붓던 날씨가 엊저녁부터 차츰 개더니, 아침이 되니 말끔합니다. 집 둘레 조그마한 나무숲에서는 동네 새가 지저귀고, 집집마다 밀린 빨래 내다 너느라 바쁩니다. 우리 집도 어제 못한 기저귀 빨래를 새벽부터 신나게 해서 햇볕에 말리려고 내다 넙니다. 칭얼대는 아기를 안고 다락방에 올라가 우리 집 담벼락과 맞붙어 자라는 복숭아나무를 한동안 내려다보고 있은 다음, 아침밥을 안칩니다. 어젯밤에 불려 놓은 누런쌀에 감자를 세 조각으로 잘라 넣고, 다시마와 말린버섯을 넣고는 불을 아주 작게 올립니다. 삼사십 분 뒤에는 뚝배기로 짓는 아침밥이 구수하게 다 될 테지요. 냄비로 짓는 밥도 맛있고 뚝배기로 짓는 밥도 맛있습니다. 더디더디 불리는 쌀과 콩이요, 더디더디 끓이는 밥입니다.
오늘도 아기와 씨름하듯 아침을 먹고 나서, 더딘 걸음으로 골목을 두루 에돌면서 도서관으로 일하러 가야겠습니다. 벌써부터 아침햇살이 눈부시다고 느낍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