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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범인이 말이나 글로 경찰이나 희생자 가족에게 연락을 취해 오는 사례는 가끔 있는 일이었다. 특히 유괴나 협박 사건의 경우는 대부분이 그랬다. 이 경우 메시지는 단순하고 실용적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단순하지도 않고 실용적이지도 않다. 'GREED'는 피해자의 부동산 투기 행각으로 보아 납득할 수는 있어도 B.K.는 도무지 추정조차 불가능한 문자였다.

범인은 일단 피해자 가족이나 경찰보다는 사회를 향하여 메시지를 띄운 것으로 보아야 했다. 이미 아침신문들에서는 부동산 광풍에 휘말린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겠다는 자만심으로 범죄가 저질러졌을 거라는 추정 기사를 큰 활자로 보도해 놓고 있었다.

조수경이 서류 검토를 거의 끝냈을 무렵, 노크와 함께 용 부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조 팀장, 출동해야겠어.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하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조수경은 말없이 용 부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송파 탄천 인근에서 여자 어린이 토막시체가 발견됐대."

두 사람은 서둘러 수사팀 승합 차량에 올랐다. 이미 현장 감식 전문 직원 셋이 차에 앉아 있었다.

용 부장이 입을 열었다.

"뒤의 세 사람과 인사를 나눠야겠군."

조수경은 자리에 앉은 채로 고개를 돌려 최대한 공손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조수경입니다."

세 사람은 그녀를 알고 있는 듯했다.

"김인철입니다."
"박선술입니다."
"오용식입니다."

세 사람은 차례로 자기 이름을 밝혔다.

"모두 조 팀장의 대학 후배들이야. 여기 아니면, 대학이나 연구소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지."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이 사건을 맡게 된 거지요?"

"이번 여아의 사체에도 글씨가 씌어 있다는 거야. 그래서 광역 공조 수사 지침이 내려진 거고. 판교 건과 함께 우리가 처리해야 할 사건이 되었어. 보나마나 언론에서는 연쇄살인이라고 써대겠지."

"아직 어린이의 신원 확인도 안됐겠군요?"
"당연하지. 우리가 처음 보러 가는 것이라니까."

뒷자리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일주일 전에 실종 신고가 된 어린이가 있다고 합니다."

조수경이 물었다.

"그렇다면 사체 발견 장소는 집 부근이겠군요?"
"아직 어린이의 신원확인이 안 되어서 확실히는 말할 수 없습니다."

"사체 발견 장소는 아이가 실종된 장소와도 멀지 않겠지요?"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통계에 의한 확률일 뿐입니다. 유아 살인의 경우에는 95%가 집 근처에서 발생하잖아요."

조수경은 판교 사건과는 별개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으나, 현장을 보기 전에는 섣불리 말하지 않기로 했다.

현장은 폴리스라인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용 부장은 폴리스라인을 넘자 더 이상 사체 쪽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조수경에게 모든 것을 일임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에 가서 배워 왔으니 한 번 실력을 보여 달라는 의미도 담긴 것 같았다.

사체는 고물 수집상에 의해 최초로 발견되었다고 했다. 고물 수집상 박00 씨(64세)는 아침 일찍 손수레를 끌고 나와 폐품을 찾아 외진 주택가를 두리번거렸다고 했다. 그것은 박씨가 평소에 늘 해 오던 일이었다.

박씨는 주택가 골목길 담 밑에 사람이 일부러 놓은 것으로 보이는 등산용 배낭에 눈이 갔다. 혹시나 싶어 배낭에 손을 대 본 박씨는 음습한 한기를 느끼고는 흠칫 손을 거둬들였다. 잠시 후 그래도 미련이 남은 박씨는 배낭의 덮개를 열고 끈을 풀어 보았다. 순간 박씨는 깊고 낮은 비명과 함께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배낭에는 어린아이의 머리와 팔다리 등이 여러 개 토막으로 뒤엉켜 있었다.

조수경은 사체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먼저 육안으로 사체를 관찰했다. 배낭이 놓인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그녀는 몸을 일으켜 사방을 두리번거려 보았다. 이어서 그녀는 범인의 예상 이동 경로를 추정했다. 그러고는 다시 사체로 눈길을 돌려 사체의 냉동 상태를 유심히 살폈다.

물론 범인의 유류품이나 족적을 조사하는 것은 기본적인 일이었다. 피살 사체를 몇 번 본 경험이 있는 그녀였지만 아이의 토막 사체가 너무 잔혹하게 유기되어 있어 조금 더듬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먼발치서 용 부장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배낭 쪽을 보고 있었다.

조수경은 신고를 받고 처음 현장에 왔다는 경찰관에게 물었다.

"글씨는 어디에 써 있다는 거지요?"
"손바닥에 있습니다."

조수경은 사체의 팔을 눕혀 어린이의 손바닥을 열어 보았다. 거기에는 영어 대문자로, 'CHARMING'이라고 씌어 있었다. 흐릿하게 남아 있는 볼펜 글씨였다.

각종 감식 장비가 도착했다. 현장 감식에는 3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기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조수경은 사체를 인근 병원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정밀검사와 신원 확인을 위해서였다.

"안녕하세요? 조센일보 선준혁입니다."

조수경은 고개를 돌려 기자를 보았다. 기자는 이마가 좁고 입술이 얇은 청년이었다.

"판교 사건과는 어떤 관련이 있다고 보십니까?"

조수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구급차에 실리는 사체에 눈길을 주었다.

조수경의 마음은 무거웠다. 사체 정밀 검사 전 피살자 가족에게 신원 확인을 받는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어느 경찰에게든지 가장 괴롭고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사체의 사진으로 딸의 얼굴을 확인한 아버지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더니 고개를 앞으로 푹 떨어뜨렸다.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토막사체#현장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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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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