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한나라당이 미디어법을 날치기로 통과시키는 모습은 대한민국 헌정사에 치욕스러운 장면으로 기록될 것이다. 민주주의는목적뿐만 아니라 절차까지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미디어법 날치기는 둘 다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대한민국 헌정사에는 이런 질곡과 치욕스러운 일들이 많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사사오입개헌과 부정선거를 자행했고, 조봉암 선생같은 이들을 제거하였다. 박정희는 헌법을 유린했고, 마지막에는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체육관 선거로 종신 대통령이 되려고 했다. 전두환 역시 헌법을 유린하였고, 수 많은 인민들을 피흘리게 했다.
한 때는 민주주의를 외쳤던 김영삼 전 대통령 역시 쿠데타 주역이었던 노태우와 김종필과 손을 잡았다. 정치를 권모술수의 현장으로 만들고, 헌정을 유린하면서 그들이 내세웠던 말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였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민주적 절차 따위는 잠시 접어 두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 논리였다.
이럴 때 문득 떠오른 말은 마키아벨리즘이라고 부르는 "성공을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이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사리사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처세술을 주장한 사람이 아니었다. 김욱은 <마키아벨리즘을 읽는 한국 헌정사>에서 마키아벨리즘을 통하여 이승만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조명하고 있다. 우리 헌정사뿐만 아니라 마키아벨리즘의 새로운 발견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사익을 나쁜 것으로, 공익을 좋은 것으로 규정하여 공익을 권장한다. 즉 마키아벨리에게 좋은 목적이란 공동체의 이익이다. 그럼 공동체의 이익이란 무엇인가?
마키아벨리는 "백 명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처럼,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나쁜 수단이 목적으로 전화되어 좋은 목적을 상쇄하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이는 좋은 목적을 위해 정당화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김욱은 말한다. 즉, 나쁜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좋은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의 이익이다. 가장 큰 공동체가 국가이다.
마키아벨리가 지은 <군주론>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군주제를 주장한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아니다. 김욱은 "공동체에 도움이 된다면 군주국이든, 공화국이든 아니면 다른 정부형태도 상관없었다"고 주장한다. 군주국과 공화국 중 어느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마키아벨리즘을 요약하면 어떤 경우라도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좋은 목적을 추구한다는 전제 위에 있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 군주가 목적인 정당성(인민주권)과 수단인 정통성(민주절차를 통한 권력승계)을 가져야만 정권의 지속여부가 결정된다고 김욱은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헌정사를 기록하고 있는 군주들(대통령)은 어떻게 평가받을 수 있는가? 김욱은 "한국 헌정사는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부도덕한 정치 과정과 민주주의에 대한 민중의 열망, 도덕적 요구가 뒤얽힌 질곡의 역사였다"는 냉혹한 평가를 내린다.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이승만을 김욱은 "분단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훔침으로써 얻어낸 영광"이라면서 "그의 반역 행위는 대한민국 건국을 친일 세력과 함께 한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친일파와 함께 한 것이 심각한 반역행위인 이유는 "헌법 제정 권력이 당연히 갖추어야 할 독립적이고 배타적인 권력을 형성하지 못한 것으로" 그는 이를 '원죄'라고까지 표현한다. 이유는 친일파가 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 인민이 주인인데 주인 중 한쪽인 북쪽 인민들을 이승만은 철저히 배격했기 때문이다. 사적 이익을 위해 공동체의 이익을 버린 것으로 마키아벨리즘이 아니다.
박정희는 어떤가? 박정희는 분명 인민들의 먹고사는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여였다. 박정희를 추앙하는 이들도 민주주의는 훼손되었지만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했다고 주장하면서 박정희 독재를 정당화시킨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헌법을 개정하고 정적을 암살하려했으며 사법 살인을 부추기고 언론을 통제"했다. 사적 이익을 위해 공동체의 이익이 침해받은 것이다. 결국 박정희는 김재규에 의해 살해된다. 김욱은 이를 "마키아벨리즘이 실패했다는 선언"이라고 주장한다.
김영삼은 누구인가? 그는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하지만 그는 "민주화 투쟁의 적이었던 군사 파쇼 집단과 동지가 되어" 3당 야합을 했다. 한 때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그가 왜 군사 파쇼 집단과 동지가 되었을까?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김욱의 말을 들어보자.
애초에 김영삼은 수단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 따위는 없었다. 권력 자체가 목적이었다. 그는 그저 개인적 욕망의 대상을 향해 투쟁했으며 군주로서가 아니라 사적 개인으로서 존재했을 뿐이다. 김영삼은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군주가 아니었다(60쪽)
김영삼은 자신과 박정희를 비교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겠지만 김욱은 박정희는 먹고사는(목적) 문제를 위해 모든 힘을 숭상했지만 김영삼은 힘 그 자체를 숭상했다는 냉혹한 평가를 내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자. 이승만은 정당성, 박정희는 정당성과 정통성, 김영삼은 정당성이 없었지만 김대중은 정당성과 정통성 모두 문제가 없었다고 김욱은 주장한다. 이승만부터 김영삼까지 이어져왔던 정통성과 정당성 문제가 비로소 해소된 것이다.
하지만 김욱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집권 기간 동안 전두환과 노태우라는 학살자를 용서하고, 박정희 기념관을 지원했으며 그의 아들들은 부정부패를 일삼았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김욱은 "그가 만약 뛰어난 마키아벨리스트였다면 '혐오스러운 학살자'를 사적으로 용서함으로써 자신의 공적인 결과에 보탬을 주려는 따위의 어리석은 시도는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 그랬을까? 김욱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너무 늦게 군주가 되었고, 이것이 한국 정치의 비극이라고 안타까워한다.
김욱은 노 전 대통령을 "정치의 이단자"라고 말하는데 그가 진보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도 개의치 않는 역사의 정당성을 따진다. 이것은 정치인으로서 특히 한국의 정치인으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었고, "50년 동안 정당성과 정통성의 부재 속에서 살아온 우리 현실에서 정당성과 정통성을 따지며 정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정당성과 정통성을 따지면서 정치를 했다. 즉 인민의 이익과 절차적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고, 대통령까지 지냈다. 이승만과 노무현에 이르기까지 우리 헌정사는 정당성과 정통성을 함께 갖추었던 군주를 잘 만나지 못했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거의 유일한 군주였다.
하지만 또 다시 역사가 거꾸로 가고 있다. 정통성은 있지만 정당성을 상실해버린 정권인 이명박 정권은 인민 주권을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인민이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풀어가야 한다. 희망을 잃지 않으면 된다. 역사의 주체는 인민 자신이다.
역사는 신비롭다. 아무도 역사의 정의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지만 역사는 자정력을 잃지 않는다. 우리의 역사가 이 신비를 웅변으로 입증하고 있다.(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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