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신학은 과연 거리가 먼 것일까? 중세까지만 해도 과학은 신학의 시녀였다. 그만큼 신학이 모든 학문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점차 과학의 토대 위에 문질 문명이 박차를 가하자 신학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지금은 도저히 서로가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듯한 모습이다.
그 사이를 비집고 중견 신학자와 종교학자, 그리고 과학 전공자 세 사람이 토론의 장을 열었다. 인터넷 언론지 '프레시안'을 통해 여러 독자들과 공감할 수 있는 이메일 형식을 취했다. 호남신대 신재식 교수와 한국신학대학 김윤성 교수, 동덕여대 장대익 교수의 <종교전쟁>이 그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종교는 전쟁의 원인이 되고 자살 테러와 학살의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종언을 고한 지금, 종교는 인간을 추동하는 가장 큰 힘 중 하나이며, 합리적 비판으로부터 가장 쉽게 면죄부를 받아 온 성역이다. 지식인이라면 이 성역에 '전쟁'에 가까운 시비를 걸어야 한다."(책을 시작하며)
이는 이제까지의 종교 논쟁과 성찰이 주로 내부자들에 국한된 데 비해 여기에서는 종교 밖의 현실 세계를 중점으로 종교적인 문제점들을 파헤쳐보겠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책제목처럼 종교를 해체하거나 매도하려는 것은 아니다. 종교가 과학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과학이 종교의 세계를 더 깊이 접근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 개신교는 합리적이기보다는 근본주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에 대해 비판자들도 건전한 방법을 택하기보다는 맹목적인 비난 형식을 취했던 게 사실이다. 그야말로 극과 극으로 맞서 온 셈이다. 이에 대해 변두리에 서 있는 세 학자 간의 대화는 건강한 비판 담론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신이 우리의 기도를 다 듣고 그에 맞게 조치를 취하는 존재라면, 한국인들의 신은 틀림없이 차 한 잔 마실 여유도 없을 겁니다. 입시철에 선거철까지 겹치게 되면 기도의 폭주로 얼마나 정신이 없을까요?"(147쪽)
"기도에 대한 장 선생님의 질문에 제가 할 수 있는 답은 당장은 이것뿐이네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순전히 통계적 연구만 놓고 본다면 기도의 실질적 효과에 대한 증거는 전혀 없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이란 그런 통계 수치에 갇히지 않는 숱한 차원들이 있기 때문이죠."(207)
이는 기도가 정말로 응답이 되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된 논의다. 기도의 효험이라는 것을 따져 묻는 대화다. 과학적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기도의 효험에 대해 부정적일 수 있다. 신에 대한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과학적인 통계와 표준 집합만을 따져 묻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무의미하다고 처분할 수 있다.
하지만 기도의 효험을 맛본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그것은 고귀한 가치로 평가될 것이다. 더욱이 기도를 효험의 차원이 아니라 의미의 차원으로 여기는 사람에게도 절대적인 가치를 지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아무리 과학이 진보한다 할지라도 신비는 결코 고갈되지 않을 것이다.
'종교전쟁'이라 하여 다소 도발적이긴 하지만 이 책은 끝장을 내기 위한 토론은 애당초 아니었다. 비록 서로의 뜻에 합일하는 점들을 찾지 못한다 할지라도, 서로의 장을 존중하는 건강한 비판적 담론의 장을 여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 자체만으로도 종교 담론에 대한 창조적인 기틀을 마련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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