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진지왕·진평왕 3대의 후궁이었던 여인.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진흥왕의 의부형제인 세종의 정식 부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화랑인 설원랑과 사다함의 연인이기도 했던 여인. 이것으로도 끝이 아니다. 진흥왕의 아들이자 진지왕의 형이자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태자의 연인이기도 했던 여인.
처음에는 '대체 이게 뭔가?' 하는 느낌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남편인 세종을 두고 왕의 후궁이 되고 그것도 모자라서 또 다른 연인들을 두다니. 그것도 은밀히 하지 않고 아주 공개적으로. 게다가 '발칙하게도' 왕과 왕자를 동시에.
결정적으로, 남자들만 잘 다룬 게 아니라 권력까지 잘 다루어 화랑도를 세력기반으로 하고 진지왕·진평왕의 공동 킹메이커가 되기까지 했던 여인. 무려 53년간에 걸친 진평왕(재위 579~632년) 치세 중에서 어림잡아 30~40년 정도는 역대 태후와 공동으로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했던 여인.
현대적 관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MBC 드라마 <선덕여왕>의 '조연' 중 하나인 신라 여인 미실이다. "대단한 여자야!" 또는 "뭐 그런 여자가 다 있어?!"라는 극과 극의 평가를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여인이다. 그런 미실을 두고 '색공과 미모로 신라의 왕들을 녹인 여인'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미실에게 남자들이 몰린 본질적 이유가 과연 그의 색공과 미모 때문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미실이 탁월한 색공과 탁월한 미모의 소유자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위작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미실에 푹 빠진 진흥왕은 미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미실에 대한 진흥왕의 열렬한 애정 때문에, 앞으로는 진흥왕의 이미지를 '진흥왕+순수비'에서 '진흥왕+순수비+미실'로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찌 보면, 이 같은 미실의 폭발적 '활약상'은 필사본 <화랑세기>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주요 요인일 수도 있다. 필사본 <화랑세기>가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는 '이 책에 나온 성 풍속은 한국사에서는 상식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인 미실의 화려한 남성 편력은, 필사본 <화랑세기>를 불신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건 분명 위작이야!'라는 확신을 강화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필사본 <화랑세기>가 위작이든 아니든 간에, 우리는 <화랑세기>에 나오는 미실이라는 인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너무 피상적인 데로만 몰리고 있지 않는지를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색공과 미모라는 다소 '선정적'인 쪽으로만 미실의 이미지를 몰아가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검토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적어도 <화랑세기>를 살펴보면 미실의 '성공비결'이 결코 색공과 미모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남성 편력에만 국한시키면, 미실이 상호 혈연관계에 있는 진흥왕·세종·동륜태자·진지왕·진평왕의 후궁 또는 부인 또는 연인이 될 수 있었던 본질적 요인은 결코 그의 색공과 미모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런 것들은 부차적 요인에 불과했다.
그럼 미실의 '성공'을 가능케 한 그 본질적 요인이란 무엇일까? 그에 관한 해답은 <화랑세기>에 반영된 신라의 정치구조 속에 담겨 있다.
'왕족혈통'만 있었던 조선과 달리, <화랑세기>에 따르면 신라에는 왕족혈통뿐만 아니라 '왕비혈통'도 함께 있었다. <화랑세기>는 그 같은 왕비혈통으로서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을 제시했다. 미실은 대원신통에 속했다.
왕족혈통과 왕비혈통의 공존은 왕족과 왕비족에게 각각 다음과 같은 의미를 던졌다. 아래의 첫째 이유는 왕족에 관한 것이고, 둘째 이유는 왕비족에 관한 것이다.
첫째, 남자 왕족의 입장에서는 왕비혈통의 존재 때문에 혼인 상대방의 범위가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있는 남자 왕족은 진골정통 왕비족이나 대원신통 왕비족 중에서 자신의 배우자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왕위계승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런 제도적 한계 때문에, 조선의 왕들처럼 전국에 간택령을 내려 수많은 양가집 규수 중에서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신라의 왕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조선의 왕들처럼 적자 소생이 없을 때에는 미천한 궁녀의 소생이라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여 대통을 유지할 수 있는 자유가 신라의 왕들에게는 역시 주어지지 않았다.
미실 주변으로 남자 왕족들이 몰려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왕의 후계자를 많이 생산해둘 필요가 있는 신라 왕실의 입장에서는, 상호 혈연관계에 있는 여러 명의 왕족이 미실 한 명과 관계를 맺는 것을 제지할 필요도 명분도 없었던 것이다. 도리어 그런 '관계'라도 적극 권장해야 할 판이었다.
게다가 미실이 두각을 보이기 시작한 진흥왕 시대에는 대원신통 소속인 사도태후가 진흥왕의 왕비였기 때문에, 사도태후의 조카이자 대원신통 소속인 미실의 입지가 자연히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저러한 요인들로 인해 미실 주변에는 남자들이 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여자 왕비족의 입장에서는 딸을 많이 낳아 왕비혈통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남자 파트너를 늘리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골정통이나 대원신통인 여자가 낳은 딸은 왕비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었기 때문에, 왕비혈통의 여자는 설령 자기가 왕비가 되지 못한다 해도 '왕비 후보'를 많이 낳으려 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왕들이 어떻게든 남자 후사를 많이 생산하려 한 것처럼, 신라의 왕비혈족은 어떻게든 여자 후사를 많이 낳으려 했던 것이다. 그것이 자기 혈통의 권세를 강화하는 방편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실이 여러 남자들을 가까이 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미실의 입장에서는, 왕과의 관계에서 낳은 딸이든 왕자와의 관계에서 낳은 딸이든 아니면 일반 화랑과의 관계에서 낳은 딸이든 간에 모두 다 원칙적으로 왕비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딸을 많이 낳기 위해 남자들을 가까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의 왕이 일반 남자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번식 본능을 가졌듯이, 신라의 왕비혈통 역시 위와 같이 일반 여자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번식 본능을 가졌던 것이다. 미실이 많은 남자들을 가까이 한 것은 그의 대책 없는 '음란 본능'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 실은 그의 부득이한 '번식 본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왕자를 많이 생산하기 위해 왕비 외에 여러 명의 후궁들을 동시에 둔 조선의 왕을 두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라고 변호해 주듯이, 왕비후보를 많이 생산하기 위해 남편 외에 여러 명의 남자들과 관계를 가진 신라의 왕비족을 두고도 똑같은 변호를 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실의 행동은 당시로서는 적극 권장될 만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점들을 보면, 미실이 많은 남자들을 가까이 하고 또 미실 주변에 많은 남자들이 몰린 것은 결코 미실의 색공과 미모 때문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요인들은 곁가지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본질적인 요인은, 남자 왕족의 입장에서는 왕비혈통과 결혼하지 않으면 왕이 될 수 없고 미실의 입장에서는 누구랑 상대하든지 간에 딸을 많이 낳지 않으면 왕비혈통을 대대로 보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는 미실의 화려한 남성 편력이 실은 신라 특유의 정치제도에 기인하는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