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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한 여자를 납치해 감금했다. 그리고 폭력을 휘두르면서 변태적인 성폭행을 거듭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니 이런 상황이 며칠동안 반복된다면 피해 여성의 심리는 어떨까.

 

완력으로는 남자를 이기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저항을 거듭하면서 도망치려고 노력하거나, 자포자기 심정이 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니면 희망을 버리지 않고 대화를 통한 설득을 계속 하거나.

 

의식을 잃고 낯선 곳에 납치된 후에 정신을 차리고 나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감정은 비현실감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고 나면 두려움이 밀려온다.

 

그 두려움 다음에는 분노 또는 체념이 찾아올 것이다. 이런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해간다. 그렇게 변한 감정이 납치한 남성에 대한 호감으로 바뀔 수도 있을까?

 

테아 도른의 2008년 작품 <검은 여름, 기억하고 싶은 악몽>에서도 한 남자가 19세의 여고생 율리아를 납치한다. 율리아는 친구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버스정거장에서 납치당한다. 납치범은 율리아를 자신의 집 지하실에 감금하고 변태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성욕을 채운다.

 

정거장에서 납치당한 19세 여성

 

그리고 율리아를 협박한다. 자신은 여태까지 여러 명의 여자를 납치해서 죽인 사람이며, 율리아의 운명은 자신이 원할 때마다 자신에게 이용당하는 것이라고. 율리아에 대해서 자신이 흥미를 잃어버리면 그땐 '폐기처분' 당할 것이며, 율리아에 대한 자신의 흥미가 얼마나 오래 이어질지는 전적으로 율리아에게 달려 있다고.

 

율리아의 무의식은 납치되면서부터 이미 인질로서의 첫 번째 교훈을 배우기 시작했다. "납치범이 네게 베푸는 모든 선행에 감사하라!" 율리아는 처음에는 저항해보지만 곧 그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근본적인 질문을 자신에게 던진다. 정말로 납치범이 자신에게 오랫동안 흥미를 느끼기를 바라는가? 그보다는 얼른 폐기처분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계속해서 쾌락의 대상이 되느니 차라리 폐기처분되는 편이 덜 끔찍할 것이라는 확신은 있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현실이 지옥이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죽음으로 끌고 간다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율리아는 이제 겨우 19살 이니까.

 

이런 고민도 잠시, 납치범은 율리아를 지하감옥에서 끌고 나와서 두 손을 묶어 자신의 승용차에 태운다. 이때부터 두 남녀는 2주 동안 유럽을 떠돈다. 율리아가 납치당한 곳은 독일의 쾰른. 납치범은 율리아와 함께 국경을 넘어서 벨기에, 프랑스, 스페인을 돌아다니며 그곳에서 또다른 범죄행각을 벌인다.

 

납치범이 경찰에 쫓겨다니는 것도 아니다. 아직까지 경찰은 그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 유럽이 통합된 이후에는 국경을 넘는 것도 쉬운 일이다. 국경검문소에는 경비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여권이나 신분증이 없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요컨대 납치범이 율리아를 데리고 유럽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욕구를 해결하기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이다.

 

두 남녀 사이에도 스톡홀름 증후군이 생길까

 

납치범은 계속 범행을 저지르면서도 죄책감은커녕 불안해하지도 않고, 율리아도 그의 범행을 막으려는 적극적인 시도를 하지 않는다. 납치범은 율리아와 함께 한가로운 여행을 하듯이 투우장에 들어가고 로마시대의 유적에 들르고, 병자를 치유해 준다는 루르드의 성지를 방문한다. 이렇게 함께 2주 간의 여행(?)을 하면서 서로에 대한 감정이 조금씩 변해가는데….

 

인질이 인질범에게 동화되고 호감으로까지 발전하는 현상을 흔히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한다. 1973년에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이런 현상이 처음 발견되서 붙은 이름이다. 인질범은 인질의 생명을 쥐고 있고, 인질도 그 사실을 잘 안다. 처음에는 인질범을 증오하고 간간이 저항도 해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인질범이 자신을 죽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의 마음을 갖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증상은 같이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발생하기 쉬울 것이다. 하물며 <검은 여름, 기억하고 싶은 악몽>에서처럼 젊은 남녀가 단 둘이 2주 동안 승용차 여행을 하면서 보낸다면 어떨까. 강간 피해자가 강간범에게 호감을 갖는다는 것이 넌센스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죽음으로 끝난 다른 피해여성과 비교해보고 자신의 처지에 대해 나름대로 안심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안심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납치범에게 고마워하는 마음도 조금씩은 생겨났을 것이다. 납치범이 베푸는 모든 선행에 감사해야 하니까. 게다가 상대는 이미 여러명의 여성을 죽인 전력이 있는 남자니까. 그 시간동안 조금씩 변해가는 율리아의 모습이 무엇보다 흥미롭다.

덧붙이는 글 | <검은 여름, 기억하고 싶은 악몽> 테아 도른 지음 / 장혜경 옮김. 리버스맵 펴냄.


검은 여름, 기억하고 싶은 악몽

테아 도른 지음, 장혜경 옮김, 리버스맵(2009)


#검은 여름, 기억하고 싶은 악몽#테아 도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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