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12월 18일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 부스스한 얼굴을 비비며 안방으로 가보니 아빠는 신문을 열심히 읽고 계시고, 엄마는 부엌에서 늦은 아침 준비 중이셨다. 아빠가 입고 계신 옷을 보니 벌써 선거를 하고 오셨나보다. 나를 보시곤 선거 다녀와야지라고 하신다. 그래서 아침 먹고 다녀올게라고 답하곤 슬쩍 전축 위에 선거인명부가 잘 있는지 확인을 해본다.
생전 처음으로 해보는 대통령 선거. 설레는 마음으로 내 이름으로 날아온 선거인명부를 챙겨들고 집을 나섰다. 선거 장소인 연산도서관에 들어서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선거를 하려고 줄을 서 있다. 내 차례가 점점 다가오고... 그런데 갑자기 마음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누구를 뽑아야 하지.
몇 주 전 있었던 가족회의가 생각이 났다. 이 날 회의 주제는 이번 대통령 선거 때 누구를 뽑았으면 좋겠느냐는 거였다. 지금 돌아보면 사실 가족회의라기보다는 아빠의 생각을 민주적인 가족회의란 형식을 통해 우리 가족들에게 설득시키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ㅎㅎ
"이러저러한 이유로 아빠 생각에는 이회창 후보가 가장 적절한 것 같아. 너희 생각은 어떠니?"라고 물어보시는 아빠의 질문에, 그 때까지 별 생각이 없던 나는 "응~ 그럼 나도 이회창 후보 뽑을게"라고 대답했고, 이후에도 별 고민 없이 이회창 후보를 뽑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선거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바로 그 순간, 며칠 전 학교에서 선배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갑자기 생각이 나는 거다.
갑자기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의견과 선배들과 잠깐 나눈 이야기들이 머리에서 막 싸우기 시작했다. 채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선거부스에 들어가게 되었다. 여러 대선 후보들의 이름들이 칸칸이 적혀있고, 내 앞엔 앞 사람이 찍고 간 도장과 인두가 놓여 있었다. 여전히 마음은 정해지지 못했다.
"1초, 2초, 3초... 그렇게 흘러간 10여초."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는 광고의 문구가 그렇게 실감날 수가 없었다. 수백만의 표 중에 나 한 사람의 표가 무어 그리 대단하겠느냐마는 선거부스 안에서의 그 10여초는 나에게 매우 긴 시간이었다. 다시 흐른 10여초. 그리고 나는 김대중 후보에게 도장을 찍고 나왔다.
#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이 방북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 종일 TV 앞에 앉아있었다. 마치 A매치 축구경기를 중계하듯이 TV에서는 아나운서와 남북관계 전문가가 나란히 앉아 김대중 대통령방북의 의미를 해설해주고 있었다. 남북 정상 간의 회담이 말 그대로 분단 이후 최초이기에 남북한 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더구나 그게 생중계 된다니. 어찌 이런 역사적 사건을 지켜보지 않을 수가 있겠냐 싶어 하루 종일 TV 앞에 붙어 앉아 있었을까. 설마. 사실 그 때는 남북정상회담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잘 몰랐던 것 같다. 오히려 그 날 이후로 체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더 정직한 표현이겠지.
어쨌든 비록 TV를 통해서였지만 눈앞에 펼쳐진 모든 광경들이 못내 신기하기만 했다. 잠깐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TV 앞으로 돌아오니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순안공항에 곧 도착한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서둘러 다시 TV 앞에 자리했다. 그런데 평양 순안공항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나타났다. 그가 등장하자 두 해설자는 한마디로 난리가 났다. 꼭 축구경기에서 우리 선수가 골을 넣은 것처럼 두 해설자의 흥분된 목소리가 여과 없이 전해졌다. 덩달아 나도 흥분이 되었다.
김대통령과 김위원장이 손을 맞잡고 반갑게 인사를 할 때는 왠지 모르게 나도 찡해졌다. 난생 처음 생중계로 보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의 모습, 그리고 이후 보이는 평양의 거리, 북한 사람들. '정말 잘한 일이다. 정말 잘했다. 오늘 하루 이 모든 과정 지켜보기로 한 것 참 잘 한 일이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 2007년 9월 20? 그 어느 때 쯤
사무실에 도착해 신문을 펼쳐들었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10월 초 북한을 방문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얼마 되지 않았던 때로 기억이 난다. 남북이 2차 남북정상회담을 하기로 전격 합의했다는 소식 이후, 신문의 정치면과 국제면은 연일 이번 방북이 남북 관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좋은 성과를 가지려면 어떤 것들이 전제되어야 하는지, 국제 사회는 어떤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 지 등, 곧 있을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역시나 이 날도 마찬가지였다. 무심히 신문을 넘기던 중 신문 한 켠에 김대중 대통령이 일주일 정도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여러 강연회에 참석하신다는 소식이 단신으로 소개가 되어 있었다. 짤막하게 김대중 대통령의 동향을 소개하는 것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 잠깐 "2007년 9월 김대중 대통령 워싱턴"이라고 놓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2007년 9월21일 미국 워싱턴 존스홉킨스 대학 한미연구소에서 가진 토론회에 참석하셨다는 뉴스가 하나 찾아진다. 왠지 반갑다.
당시 2차 남북정상회담을 반기는 소식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2차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는 여론도 물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류가 부시 행정부를 비롯한 미국 정가에서도 포착된다며 한미동맹 관계의 삐끗거림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기간 내 꾸준히 전해졌었다.
그런 상황을 쭉 모니터링 해오던 차에 김대중 대통령께서 그 시기에 워싱턴에 가신다는 소식은 좀 더 남다르게 다가왔다. 그 연로하신 몸을 이끄시고 왜 가실까. 내 나름대로 짚어지는 것이 있었다. 미국 정가 내 2차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돌리기 위해 자신이 하실 수 있는 아주 조그만 것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가신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워싱턴에서의 토론회, 강연회들은 사전에 계획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이 몇 주 남지 않은 상황에서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 낸 김대중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했다는 것은 분명 여러모로 의미가 컸을 것이다. 당장 곧 있을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그의 의견을 들으러 기자, 정치인, 학자, 그리고 남북 관계, 동북아 문제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모였을 것이고 평소 남북 관계 진척을 위해 남북정상회담이 필요함을 역설해왔던 그가 거기서 어떤 이야기들을 나눴을지는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 모인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돌아갔을지, 그리고 그들의 글, 말이 워싱턴 뿐 아니라 미국 내 남북한 문제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 지도 측정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었다.
누구도 그에게 그런 역할을 시키지 않았지만, 역사 속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찾아서 그 일을 묵묵히 감당하고 있는 사람. 이 기사를 본 그 날부터 나는 1997년 12월 18일 그 날 아침, 김대중 후보를 제15대 대통령으로 뽑았음을 정말로 자랑스러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곧잘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김대중 대통령 정말 대단한 분 같아. 우리 역사에 이런 분이 또 나올 수 있을까. 벌써 많이 연로하셔서 건강이 안좋으시다고 하시는데. 오래사셨음 좋겠다. 그리고 언제가 되더라도, 혹 내가 외국에 가 있더라도, 이 어른이 돌아가시면 가시는 길 꼭 인사드리러 오고 싶다. 꼭 감사하다고 인사드려야지."라고.
# 2009년 8월 18일 그리고 오늘
1997년 12월 18일 대통령 선거를 하던 날, 나는 그에 대한 사전 지식도 별로 없었고, 그렇다고 이유 없는 호감도 없었다. 그런 내가 어떤 이유로 선거부스에 들어가 그에게 표를 주었는지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부산에서 태어나 직간접적으로 김대중과 전라도란 단어 앞에 부정적인 수식어가 달리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듣고 자랐던 내가 어떻게 그 순간 그런 선택을 했는지 지금도 신기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10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알고 있다. 그 짧은 순간의 고민 가운데 나 스스로의 힘으로 김대중이란 이름에 동그라미표를 했음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지. 앞으로도 그 일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길지를 말이다.
그 때로부터 12년이 지난 2009년 8월 18일. 나의 선택이 우리 역사의 진보에 기여한 선택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게 해 준 사람. 김대중 대통령. 그 분이 돌아가셨다. 그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실 날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예감은 했었지만, 정작 서거 소식을 들으니 마음 한편이 아려옴은, 눈물이 흘러내림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생각이 났다. 내 생애 처음으로 김대중이란 사람과 심각하게 만났던 그 날, 1997년 12월 18일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 날 김대중 후보를 15대 대통령으로 선택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역사의 진보, 한반도 평화와 민주주의 성숙, 이 모두를 김대중 대통령 한 사람에게 맡긴 건 아니었어. 그리고 그 때는 나의 선택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사실 잘 몰랐자나. 하지만 선생님 덕분에 지금은 조금은 더 잘 알게 되었잖아. 그럼 그만큼 더 실천해야지. 마음 아프다고 그냥 울고만 있을 때가 아니지. 사실 슬픈 것도 있지만 감사한 것이 더 많자나. 자! 그만 아파하고 한반도 평화와 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리기 위해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찾아보자.
그게 그리 쉽지는 않아 보이지만 사실 그리 또 어렵지도 않을 것 같아. 김대중 대통령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투표도 할 수 있고, 사회와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공부를 할 수도 있고, 시민으로 정부에 대해 무언가 의견 표현을 할 수도 있고, 페이스북에 들어가 외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한반도 평화를 위해 평생 애써 오신 어른이 돌아가셨다. 참 안타깝다. 이젠 너희들이 한반도 평화의 서포터즈가 되어 줄 수 없겠냐며 글을 남길 수도 있고. 아주 작아 보이긴 하지만 지금 여기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잖아.'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울산에서 초등학교 1학년인 조카가 서울로 올라온다고 한다. 형부가 서울에 출장오시는 길에 같이 올라온다고 한다. 녀석을 데리고 국회 앞 김대중 전 대통령 빈소에 다녀와야겠다. 가서 같이 분향도 하고, 사진도 찍어주고 와야겠다. 녀석은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그 사진을 보면 나에게 고맙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녀석이 그 사진의 의미를 알 때쯤이면 남과 북, 그리고 동북아에 평화의 꽃이 더 활짝 피어 있었으면 좋겠다. 이 녀석이 북한에 살고 있는 또래 친구랑 열심히 인터넷 채팅도 하고, 메일도 주고받고, 방학 때면 서로의 집도 오가고, 울산에서 저기 파리, 모스크바까지 가는 기차타고 배낭여행도 다니고 그랬으면 좋겠다. 남북 관계를 둘러싸고 남과 북이, 그리고 남과 남이, 나라와 나라가 언제 그렇게 피터지게 싸웠냐는 듯이. 지금 우리가 이렇게 아픈 것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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