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 적상산은 천혜의 암반으로 이뤄진 자연조건으로 인해 일찍부터 산성이 만들어져 인근 백성들을 보호했던 곳이다. 그곳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적상산 사고가 있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험하다. 대형버스도 올라갈 수 있지만, 아마도 버스가 다니기에는 전국에서도 가장 난코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파르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광경은 일품이다. 그렇지만 이 아름다운 풍경은 그저 아름답다고만 느끼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적상산사고는 무주의 정신과도 같은 곳이다.
조선은 건국 후 춘추관을 비롯해 충주, 성주, 전주 4대 사고에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국가 중요 서적을 보관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해 전주사고에서 보관하던 실록만이 유일하게 보존되고 나머지 사고의 실록들은 모두 소실됐다.
사고가 평지에 설치돼 수호에 어려움을 겪었던 조선은 이후 오대산(강원 평창), 태백산(경북 봉화), 마니산(강화도), 묘향산(평북 영변) 등 깊은 산속에 외사고를 설치하고, 서울 춘추관에 내사고를 두었다.
이후 마니산사고를 정족산사고(강화도)로, 묘향산사고를 적상산사고(무주)로 옮겨 조선후기 5대 사고 체제를 확립했다.
무주는 1674년 사고가 설치됨에 따라 무주현에서 무주도호부로 승격된다. 지금 무주의 영역은 서울보다 조금 더 클 정도로 넓다. 이게 다 적상산사고 때문이다. 무주도호부로 승격시키면서 인근의 여러 지역을 이때 무주로 귀속시켰던 것이다. 그러니 적상산사고는 지금의 무주가 있게 한 일공공신인 셈이다. 땅도 넓혀주고, 그만큼 인구도 늘려주고, 지역의 위치도 격상됐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 후 일제는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물을 서울 규장각으로 옮기면서 적상산사고는 1911년 폐쇄된다. 이후 적상산 사고본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북한으로 반출돼 현재 북한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까지는 시대의 아픔이려니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적상산 사고가 있던 곳은 현재 전기 발전을 위한 양수발전소 상부댐이 차지하고 있다. 심야에 남는 전기를 이용해 아래에서 물을 끌어올린 후 상부댐에 저장해 두고, 유사시 낙차에 의해 전기를 일으키는 시설이다.
이곳 관계자들은 말한다. "전기를 일으키기 위해 물을 이렇게 산 위에 모아놓으니까, 마치 백록담처럼 보인다"고. "그만큼 멋진 풍경이 하나 더 만들어졌다"고. 천연덕스럽게 그런 말을 너무나 쉽게 내뱉는다.
사고가 있던 본래 자리는 1992년 양수발전소 상부댐 축조로 물에 잠기게 되자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선원각과 실록각 두 건물이 복원됐다.
지금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건물은 10여년 전 새로 복원된 건물들이다. 상징성이 있을 뿐 그 자체로 가치는 없는 물건이다. 어차피 제 자리도 아니잖은가. 그마저도 제대로 된 고증절차를 밟지 않아 조금 다르게 지어져있다.
1872년(고종9년)에 제작된 무주부 지도는 전국의 지도 중에서 사고의 모습을 가장 상세하게 그려놓은 지도로 알려져 있다. 실록을 보관하던 실록각과 왕실족보를 보관하던 선원각이 담으로 둘러져 있고, 문은 삼문이며, 그 앞에 홍살문이 있는 것까지 세세하게 그림으로 남겨놨다.
또한 현재 인근의 안국사는 1911년 적상산사고가 폐쇄될 당시 존재하던 선원각 건물을 보존하고 있다. 당시 멀쩡한 건물이 사라지는 걸 안타깝게 여긴 누군가가 선원각을 그대로 안국사로 옮겨 지금의 천불전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건물이 여타 사찰의 천불전 건물과 다른 이유가 그 때문이다.
뜻 있는 사람들이 의지를 모으기만 하면 무주 적상산사고는 제대로 된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현재의 모습은 안타깝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지금도 상부댐의 물이 빠지면 예전 적상산사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데, 아무 생각없던 시절도 아닌 1992년에 이런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냥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마도 양수발전소의 수명이 다하는 미래의 어느 날쯤에나 원래의 위치에 복원하자는 말이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