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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아직 젊으셨을 때, 아마 60쯤 되셨을 거다.
젊어서는 일만 하시다가 그즈음부터 친구분들하고 여행을 다니셨다.
▲ 아버지.. 아버지 아직 젊으셨을 때, 아마 60쯤 되셨을 거다. 젊어서는 일만 하시다가 그즈음부터 친구분들하고 여행을 다니셨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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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따사로웠던 그 날, 우리 자매들은 속속 병원으로 모여들었다. 우리 자매들뿐 아니라 올케와 고모도 왔다. 병원에서 임종실로 택한 공간은 꽤 넓었다. 희미해진 아버지의 눈동자는 우리들 하나하나를 말없이 더듬어 나갔다. 그러나 누구도 그 순간을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 순간이라고 생각했다가도 곧잘 소생하시곤 하셨으니까.

오후가 되자, 정말 그 순간이라는 게 확실해졌고 우리는 아버지를 둘러싸고 모여 서 있었다. 큰오빠는 2년 전 먼저 하늘나라로 가셨고, 작은 오빠는 출장중이었다. 그리고 더 작은, 내가 늘 셋째 오빠라고 생각하는 그 오빠가 도착하셨다. 연락을 하고 20분만이었다.

우리는 모두 물러나 구경꾼이 되었고, 오빠는 아버지 바로 앞 의자에 앉았다.

"아버지, 얼릉 일어나셔야지요."

알 듯 모를 듯 희미하게 고개만 내젓던 아버지. 한 5분쯤 지나자, 희미해진 호흡이 점차 간격을 늘려가고 있었다.

오빠는 40년도 훨씬 넘게 우리와 한 식구였다. 내가 다섯살 때, 그리고 오빠는 열다섯이던가.

"얘야, 저기 사랑방 부엌에 가면 쪼끄만 오빠가 하나 앉아 있을 거다. 가서, '오빠 저녁 드세요'하고 같이 들어오거라. 그리고 앞으로 계속 우리집에서 살 거니까 오빠라고 부르고 잘 따라야 한다."

나는 아버지 말씀대로 했고, 오빠는 그 다음 날부터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옆구리에 매달고 아버지와 들로 논으로 다니며 일을 했다. 그리고 군대에 갔다 와서 결혼을 했고, 우리집에서 한 삼년 살다가 바로 이웃집에 살림을 냈다.

아버지는 언젠가 말씀하셨다. '그애가 내 아들보다 잘 살아도 나는 좋다. 그애도 아들이니까. 이렇게 오랜 세월을 같이 살았는데 잘 살면 당연히 좋지 않겠냐' 하셨다. 그런데 정말 아버지는 오빠에게 마지막으로 아들 대접을 해 주셨다.

운동회 때 손 잡고 힘차게 달리시던 아버지

아버지는 이렇게 어린 손주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즐거우셨을 것이다.
▲ 손주들과 아버지 아버지는 이렇게 어린 손주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즐거우셨을 것이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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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골이 장대하고 늘 당당하셨던 아버지는 7년 전 엄마를 보내시고 큰아들까지 보내고 나자 기가 많이 꺾였다. 남편을 잃은 며느리가 안타깝다며 큰언니네에 가 계셨는데 걸음걸이도 어눌하고 말씀도 없으셨다. 난 용기를 내서 아버지에게 평소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아버지, 아버지는 우리를 참 많이 사랑해 주셨지요. 운동회 때 내 손을 잡고 힘차게 달리기를 해서 전 그때 처음으로 공책을 탔잖아요. 난 아버지가 달리기를 그렇게 잘 하실 줄 몰랐는데, 난 거의 끌려가디시피 했고 그런 판국에도 아버지는 내게 응원까지 하며 달리셨어요. 또 시간만 나면 정이와 윤이(나에게는 조카, 아버지에게는 손녀) 책가방도 들어 주셨잖아요. 애비 사랑을 흠뻑 받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며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셨다가 책가방을 들어주곤 하셨잖아요. 아버지는 늘 그러셨어요. 가족은 사랑이 있어야 한다구요."

"그래, 그걸 아직도 기억허냐? 난 다 잊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다행이구나 그런 생각을 다 허구."

다소 냉랭한 말투였지만 아버지의 표정은 곧 온화해졌다. 할아버지는 선비라서 항상 사랑방에서 글을 읽거나 글을 쓰셨고, 손님을 맞으셨다. 일을 하시지도 않았을 뿐더러 식구 누구에게도 다정한 말 한 마디 하지 않으셨다. 게다가 아버지도 7남매에 맏이인데다 우리 7남매를 두셨다. 할머니는 장손이 두 명이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큰오빠는 항상 공사다망했다. 새마을 지도자로 정치를 하신답시고 동가식서가숙 하며 가정은 소홀히 하셨다.

그러니 일도 아버지 차지였지만 손녀들 사랑까지도 아버지가 챙겨주셔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버스정류장에서 손녀들을 기다렸다가 책가방을 들어주는 일이었다. 손녀의 책가방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손녀와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할아버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정작 당신이 쇠잔해져 누워계시니 모두에게 서운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모두 다 제 살기 바쁘니 알고는 있어도 실천은 어려웠던 것. 난 아버지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고, 그 마음을 풀어드리려고, 지난 이야기를 꺼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아버지의 자상함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드리려고 싶었다.

사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불효라는 불효는 다 저지른 막내딸이었다. 상처도 드렸고, 결혼해서 잘 못살고 이혼하는 바람에 마음도 많이 아프게 해 드렸다. 그래서 아버지는 내 나이 40이 넘었을 때도 용돈을 챙겨 주셨다. 또한 난 늦게까지 아버지 마음에 남는 딸이기도 했다. 아침 일찍 병원을 들어서면 그 먼데서(이천 살 때, 아버지는 이천이 무척 먼 줄 아셨다) 이렇게 일찍 웬 일이냐고 놀라시면서 반가워 하셨다.

아버지가 호흡을 멈추고 눈을 감은 시간은 오후 네 시쯤. 의사를 불렀다. 의사는 와서 아버지를 보고 청진기를 아버지 가슴에 대보더니 아직 호흡이 남아 있다고 했다. 우리가 드라마에서 접하게 되는 죽음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드라마에서는 죽음과 동시에 모니터에 일직선이 쭉 그어지지만 실제는 아니었다. 숨이 멈춘 후에도 모니터에는 들락날락 곡선이 그려지고 있었다.

"아직 더 기다려 봐야 합니다. 이러다가 소생하실 수도 있어요. 일반적으로 호흡이 멈추고 30분이 지나야 몸의 모든 기능이 멈추게 되거든요. 그때 다시 진단을 해서 몸의 진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야 비로소 사망선고를 내리는 겁니다."

호흡이 멈춘 뒤 30분이 지나봐야 죽음 알 수 있어...

30분 후 의사가 다시 왔다. 아버지 가슴에 청진기를 대 보고 손목에도 대보았는데, 그때서야 모니터에도 곧은 일직선이 나타났다. 우리는 모두 의사를 주시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나, 하고.

"이제 사망하셨습니다. 지금 시간을 사망 시간으로 보시면 됩니다."

낮은 목소리로 사망선고를 한 의사는 얼핏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때 난 보았다. 그의 눈에 맺힌 눈물을. 그는 볼펜을 쥔 손등으로 어색하게 눈물을 닦았다. 의사가 눈물을 다 흘리다니, 나도 놀랐다. 아버지를 노인전문병원으로 모신 지 7개월이나 되었으니까, 그동안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두 달 전에도 아버지는 고비를 넘겼다. 그때도 병실에서 임종실로 옮겼고 모두가 모여 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다시 병실로 돌아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발끝이 까맣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실을 안 의사가 무척 안타까워했다.

"마음은 아프지만 그때 돌아가셨다면 온전한 몸으로 가셨을 텐데, 이거 참 안타깝네요."

의사의 진심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혈전이 있는데다 심장에서 피를 내보내는 힘이 약해 피가 발끝까지 닿지 못해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며, 안타까워하는 의사의 인간적인 마음을 읽은 것이다. 그 후로도 정성을 다해 치료했지만 증상은 무릎 밑 정강이 부분까지 나타났다.

그리고 두 달만에 죽음을 맞으셨다. 나는 혹시 아버지의 혼이 있지 않을까, 임종실 천장을 둘러보았다. TV에서 보는 죽음은 흔히 혼이 빠져 나가 공중에서 자기의 몸과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지 않았던가. 그래서 아버지의 혼이 진짜 당신을 치료했던 의사의 눈물을 보신 건 아닐까,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아버지를 모셔 갈 병원장례식장에서 장례사가 영구차를 가지고 왔다. 아버지 몸을 정갈하게 수습을 해서 차로 모시고, 나도 그 차에 탔다. 마침 퇴근시간이라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사람들 움직임이 그땐 왜 그렇게 그림처럼 무의미하게 느껴졌는지. 거리엔 사람들, 그리고 담장과 야산엔 개나리와 진달래가 무리지어 피어 있었는데, 그 물체들이 그렇게 움직이고 바람에 휘날려도 모든 게 멈추어 있는 것처럼 멍한 상태로 보여졌다. 그 광경을 눈으로 보면서 나는 가만히 아버지에게 당부를 했다.

'아버지 다음 세상에서는 이번처럼 무거운 짐 지지 말고 가벼운 짐만 지고 태어나세요. 그래서 이번보다 즐겁고 편안한 삶을 사세요'라고.

엄마와 생신 기념으로... 
뭐니뭐니해도 아버지는 엄마가 살아계실 때 가장 행복하셨다.
▲ 엄마 아버지 엄마와 생신 기념으로... 뭐니뭐니해도 아버지는 엄마가 살아계실 때 가장 행복하셨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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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거리를 지나 병원앞 신호등에 걸려 있는데 병원 정원에는 연분홍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우리와 아버지를 맞았다.

"아버지가 이렇게 예쁜 꽃을 보실려고 여태껏 기다리신 거구나."

큰언니가 정문을 환히 밝힌 꽃무더기를 보면서 말했다. 벌써 5년 전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죽음'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 응모글입니다



태그:#아버지의 죽음,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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