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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창비
신경숙창비 ⓒ 이명화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는 화두를 던지며 소설을 시작하고 있다. 이 말은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같다. 만약에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라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 누구의 엄마도 누이도 아니고 나의 엄마, 언제나 있는 듯 없는 듯 있었던 엄마, 잃어버릴 일은 없다고, 아니 그런 일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엄마가 실종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가장 먼저 할 일은 그들에게 무엇일까. 소설에서 그 가족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들이 아마도 똑 같이 재현될 것이다.

 

흩어져 있던 일가들이 한 자리에 모일 것이고, 네가 잘했니 내가 잘했니 아마도 조금은 티격태격도 하면서 엄마를 어떻게 찾을 것인지 의논하면서 전단지를 뿌리고, 각자가 엄마한테 잘못했던 일을 떠올리면서 후회도 하고 자책도 하면서 그동안 잊고 지냈던 엄마의 존재에 대해, 또한 그 부재를 깊이 인식하면서 엄마와 얽혀 있던 모든 추억들이 두서없이 떠오르곤 할 것이다.

 

시간만 나면 엄마를 찾아 지하철역에도 가 보고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장소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면서 '이런 사람 혹시 못 보셨어요?'하면서 안타깝게 전단지를 전달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보아도 기간이 점점 길어지고 엄마를 찾아낼 지푸라기 같은 단서 하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그런 날들이 오래 지속된다면?

 

어쩌면 하나둘씩 지쳐가면서 체념까지 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들의 '엄마'라면 어떨까? 과연 그 자식을 포기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엄마라면, 나의 엄마라면 과연 종내엔 자식을 포기할 수 있을까. 엄마라면 끝까지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엄마, 나의 엄마가 아닐까. 자식은 엄마를 포기할 수 있을지 몰라도 엄마는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엄마를 잃어버리고 난 뒤, 엄마의 이야기가 해일을 일으키다

 

"엄마는 상식적으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온 인생이 아니야. 엄마는 엄마가 할 수 없는 일까지도 다 해내며 살았던 것 같아. 그러느라 엄마는 텅텅 비어갔던 거야. 종내엔 자식들의 집 하나도 찾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된 거야. 엄마를 잃어버리고도 이렇게 내 아이들 밥을 챙겨 먹이고 머리 빗기고 학교 보내고 있느라 제대로 엄마를 찾아 나서지도 못하는 내가 아주 낯설어..."

 

신경숙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창비)는 마치 우리 엄마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내 일기 속에, 노트 속의 글을 훔쳐 본 것은 아닐까, 그것으로 소설을 쓴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의 엄마와 비슷한 얘기들을 이 소설에서 자주 맞닥뜨렸다. 작가 신경숙은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해 말한다.

 

"지난겨울 거의 삼십년 만에 어머니와 내 집에서 보름쯤을 같이 지낸 적이 있다. 사춘기 때 어머니 곁을 떠나온 이후 그리 많은 날을 어머니와 함께 지내긴 처음이었다. 새벽마다 어머니가 자고 있는 방으로 건너가 보았다...그때 느낀 행복감이 이 소설을 계속 쓰게 했다고 하면 믿겠는가..."

 

신경숙 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그의 삶의 갈피갈피가 보이는 듯하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그 허구 속에서 자신의 삶의 발자국을 찍어 놓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삶의 궤적이 소설 속에서 읽어진다는 말이다. 그동안 써왔던 모든 소설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된다. 아마도 소설은 마냥 '허구'로만 지어지는 집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작가의 삶을 떠나 있는 것도 아니기에 그럴 것이다. 또 어떤 소설이 나올지 기대가 된다.

 

소설은 서울을 올라온 엄마가 서울 역 지하철 구내 역에서 실종되면서 시작된다. 가족들이 사라진 엄마의 흔적을 추적하면서 기억을 복원해 나가는 과정은 추리소설 같은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전개되어 독자들도 한 장 한 장 그 흐름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

 

어떻게 되었을까. 엄마는 살았을까 죽었을까. 결국 찾아질까 온갖 의문으로 가득 찬 호기심으로 읽게 된다. 그리고 큰딸 '너'와 큰오빠 '그', 그리고 아버지 '당신'의 관점으로 각각 쓰여진 내용을 읽으면서 그들 자신의 입장과 심정이 되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소설 속의 '엄마'와 나의 엄마를 생각하면서 읽게 된다. 엄마와 얽힌 추억들과 이야기들이 두서없이 떠오르기도 한다.

 

"엄마의 손은 쉴 새가 없었다. 엄마는 재봉질을 했고, 뜨개질을 했으며 쉴새없이 밭을 가꾸었다. 비어 있는 적이 없던 엄마의 밭. 봄이면 밭고랑엔 감자씨를 모종하고 상추와 쑥갓과 아욱과 부추씨를 뿌리고, 고추를 심고, 옥수수씨를 묻어두었다. 담장 밑엔 호박구덩이를 파고 논두렁엔 콩을 심었다. 엄마 곁엔 언제나 깨가 자라고 뽕잎이 자라고 오이가 자랐다. 엄마는 부엌에 있거나 논에 있거나 밭에 있었다. 감자를 캐고 고구마를 캐고, 호박을 따고 배추와 무를 뽑았다. 무엇이든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거둘게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던 엄마의 노동, 엄마는 씨앗이 아닌 것들만 돈을 주고 샀다."

 

위의 내용에서 나는 엄마를 또 만난다. 일평생 늘 뭔가를 하고 있었고 지금도 그러한 나의 엄마, '칠순이 넘어서도 마늘을 까는, 비가 오지 않으니 애가 타서 콩밭에 나가 서 있는' 엄마도 나의 엄마와 닮았다. 신경숙의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의 실종을 통해 '엄마'란 존재에 대해 한 인간이며 한 여자로서의 '엄마'를 깨닫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책을 읽는 독자들의 '엄마'에 대한, 엄마와 얽힌 추억들이 '해일을 일으키며 되살아' 나게 한다.

 

"엄마를 잃어버린 다음에야 너는 엄마의 이야기가 너의 내부에 무진장 쌓여있음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끊임없이 반복되던 엄마의 일상. 엄마가 곁에 있었을 땐 깊이 생각하지 않은 엄마의 사소하고 어느 땐 보잘 것 없는 것같이 여기기도 한 엄마의 말들이 너의 마음속으로 해일을 일으키며 되살아났다..."

 

당연한 엄마의 자리, 엄마가 있는지 없는지 어떤 생각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고 살아온 이들이, 잃어버린 뒤에야 엄마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엄마의 부재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엄마의 실종' 그것은 물리적인 실종뿐만 아니라, 곁에 있어도, 현재에 살아 있어도 마치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양 망각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엄마'의 실종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엄마'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우리들에게 일깨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더는 늦지 않게 '엄마'의 존재에 대해, 그의 삶과 인생에 대해 눈을 좀 뜨고 보라고, 사랑하라고...독자들을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잃어버린 뒤, 그 존재의 부재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냐고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엄마~'라고 가만히 불러만 보아도 가슴 뜨뜻해지는 그 엄마를 좀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소설은 모두 네 개의 장과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마다 관점이 다르다. 맨 앞의 세 장은 큰 딸, 큰 아들, 그리고 아버지가 그 주체가 되어 그들이 '엄마'의 부재를 통해 비로소 깨닫게 된 생각들과 추억들로 엄마를 그리고 있다. 그들은 '너', '그', '당신'으로 호명된다.

 

엄마의 실종으로 인해 무시되어온 엄마의 존재에 대해, 엄마에 대한 기억이 분출되고, 그것은 또 자책과 후회로 점철되는 통절의 시간을 겪는다. 엄마의 귀환으로만 중단될 수 있는 곤경이다. 엄마의 실종과 그 부재의 자리에서 간단없이 솟구치는 엄마의 기억과 고통스럽게 대면하면서 고해성사를 하듯 말하고 있다.

 

마지막 4장은 사라진 엄마가 주체가 되어 일인칭화자로 등장한다. 둘째 딸의 집과 평생 숨겨온 '마음의 의지 처'였던 '곰소의 그 남자 집과 남편, 아이들 고모가 고향집, 그리고 자신이 태어나 자랐던 엄마의 집을 차례로 돌며 세상과의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린 무턱대고 '엄마'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오진 않았을까. 내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보고 생각했던 엄마의 이미지와 엄마의 삶, 그것은 과연 바로 알고 보는 것일까. 내가 알고 있는 엄마와 엄마 자신은 어느 만큼의 괴리가 있을까 문득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은 우리들 각자의 '엄마'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하는 데 있어서만이라도 성공적인 작품이랄 수 있을 것이다.

 

"언니, 단 하루만이라도 엄마와 같이 있을 수 있는 날이 우리들에게 올까? 엄마를 이해하며 엄마의 얘기를 들으며 세월의 갈피 어딘가에 파묻혀버렸을 엄마의 꿈을 위로하며 엄마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올까? 하루가 아니라 단 몇 시간만이라도 그런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엄마에게 말할 테야. 엄마가 한 모든 일들을, 그걸 해낼 수 있었던 엄마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엄마의 일생을 사랑한다고, 존경한다고. 언니, 언니는 엄마를 포기하지 말아줘, 엄마를 찾아 줘."

 

위의 '둘째딸'의 고백처럼 말하기 전에 우리들의 '엄마'에 대한 못 다한 사랑을,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나의 '엄마'를 생각했다. 책을 덮고 난 후, 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를 했다. 나의 무관심과 자식 된 도리를 다 못하고 살아가는 '부끄러움'이 만회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창비(2008)


#엄마를 부탁해#신경숙#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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