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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보성군 벌교읍에는 읍내를 중심으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벌교천이라는 강이 있다. 벌교천은 지역을 동과 서로 갈라놓는 장벽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장벽을 여섯 개의 다리가 봉합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중에서 절반인 세 개의 다리는 오로지 사람만 다닐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짚신 신고 다니던 홍교

 

1729년에 만들어진 일명 무지개다리인 홍교(虹橋). 약 300여 년 전, 비만 오면 떠내려가던 뗏목다리를 대신해 동·서로 갈린 벌교를 처음으로 봉합한 다리다. 보물 제 304호로 지정돼 있으며 일제강점기 때 철거하려는 억압을 견뎌내고 일어선 민족의 다리라고 볼 수 있다.

 

벌교 사람들은 홍교에 대한 추억들이 많다. 예전에는 홍교까지 통통배가 올라오고 그곳에 장이 섰기에 숨겨진 애환도 많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릴 적 홍교 다리 아래에서 놀았던 기억, 낚시하던 추억, 그리고 다리위에서 떨어졌던 아찔한 기억들 정도다.

 

그중에서 다리에서 떨어졌던 기억을 떠올리는 한 할아버지는 "다리에 난간이 없어 지나가던 사람들이 많이 떨어졌다"고 회고한다. 특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운전미숙으로 떨어지는 사례가 왕왕 있었는데 신기한 것은 떨어진 사람들이 죽었다거나 크게 다쳤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높이가 5미터에 가까운 다리인데 어떻게 떨어지고도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고 궁금해 하는 필자를 향해 할아버지는 "조상들이 돌봐줘서 그렇지"라고 얘기했다. 물론 조상보다는 찰진 갯벌이 돌봐준 것이겠지만 그만큼 조상과의 연결 끈이 질긴 다리다.

 

홍교는 나라에서 만든 것도 주민들이 만든 것도 아니다. 300여 년 전, 스님들이 공덕을 쌓기 위해 만들었는데 당시 불교가 생활에서 차지한 비중을 잘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때 벌교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이들을 홍교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고무신 신고 다니던 다리 소화다리

 

1931년, 소화6년에 벌교에는 또 하나의 다리가 만들어진다. 일제가 물자를 대량으로 수송하기에는 홍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점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 이면에는 벌교민들이 홍교를 중심으로 일본인들을 향해 주먹으로 저항을 한 것도 크게 작용했다.

 

오죽했으면 일제강점기 때 친일파와 공모해 홍교를 헐어버릴 생각을 다 했겠는가? 당시 주민들이 거국적으로 들고 일어서지 않았다면 홍교는 사라지고 벌교민들의 어릴 적 추억은 고사하고 벌교의 정신마저도 사라져버렸을 것 같아 아찔하다.

 

이런 사연을 안고 태어난 소화다리는 홍교와는 분명히 대비가 된다. 먼저 홍교가 돌을 조합해 만들어 놓은 자연친화적인 것이라면 소화다리는 시멘트와 철근으로 만들어졌다. 홍교가 한국인들이 건너다니던 다리라면 소화다리는 일본인들이 건너다니던 다리다.

 

주민들이 "홍교는 우리다리지만 소화다리는 왜놈들 다리여"라고 말하는 뜻은 누가 만들었고 또 어떤 재료로 만들었냐는 것보다는 그 다리를 누가 사용했느냐를 두고 하는 말인 듯 보인다. 그런데 일본인들도 이 다리를 만들어 놓고도 건너다니는 것이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다리 양옆에 조선인과 일본인들이 진을 치고 허구한 날 쌈박질을 해댔다"는 증언이 그것을 뒷받침해주고 있는데 한국인들은 지나다니는 일본인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진을 쳤기 때문에 공포의 다리가 됐다. 

 

이후, 소화다리는 그런 한이 있어서 인지 모르지만 여순사건과 6·25 전쟁 통에 '피의 다리'가 됐다. 주민들의 증언이나 소설 태백산맥에서의 묘사를 보더라도 소화다리는 살육의 현장이었으며 다리 아래 주검위로 고무신이 쉼 없이 떠다니던 아픔의 다리가 됐다.

 

구두신고 다닐 다리, 아취 인도교

 

최근 벌교엔 인도교 하나가 개통됐다. 짚신 다리인 홍교나 고무신 다리인 소화다리와는 규모와 모양새에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 빗대서 말하면 분명 '구두 다리'다. 하지만 그 규모나 모양새만큼이나 필자는 그 의미에 더 목말라 있다.

 

짚신 다리인 홍교는 스님들이 주민들을 위해 공덕을 쌓기 위해 만든 다리로 소설 태백산맥의 묘사처럼 염상진이 부잣집을 털어 쌀가마니를 가져다 놓고 동네사람들에게 나눠주던 다리다. '봉사와 사랑의 다리'라고 볼 수 있다.

 

그에 반해 고무신 다리인 소화다리는 침략자들이 수탈을 위해 또 그들이 다니기 위해 만든 다리로, 일제침략에 대한 벌교민의 저항의 주먹이 난무하던 공포의 다리였고 이후 무차별 살육이 일어난 피의 다리다. '침략과 전쟁과 저항의 다리'인 셈이다.

 

그럼 이 구두다리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미래의 일이기에 어떤 정신으로 벌교민에게 뿌리를 내릴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적어도 앞선 다리들이 분단과 침략으로 얼룩진 암울한 다리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 구두다리는 101년 전 일제에 의해 낙안군이 강제 폐군되면서 갈라진 형제를 보듬어 안는 '화합과 통일의 다리'가 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낙안군과 낙안군 폐군(廢郡)
현재의 순천시 외서면을 비롯해 낙안면, 별량면 일부, 보성군 벌교읍 그리고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일부의 땅은 옛 낙안군이었다. 하지만 101년 전인 지난 1908년 10월 15일, 일제는 항일투쟁무력화, 동학혁명진원지분산, 침략거점도시화를 위해 낙안군 자체를 없애버리고 주민들을 인근 지역 세 곳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덧붙이는 글 | 예고: [09-043] 소설 태백산맥 흔적들을 찾아서
남도TV


태그:#낙안군, #남도TV, #벌교, #벌교천, #벌교인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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