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파장이 커지면서 남북대화에 반대했거나 최소한도 미온적이었던 보수야당의 여론 지지율이 치솟기 시작했다. 보수야당은 범행의 유력한 용의자인 북한이 남한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휴전선 경비를 강화하고 바다의 경계선을 철통같이 지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주장들은 다수 국민의 공감을 얻었다. 아니면 최소한도 국민의 공포감을 자극하는 데에는 성공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진보성향이 강한 일부 지역을 빼고는 보수야당이 국회를 장악하게 되리라는 분석이 나오게 되었다.
여당에서도 총선을 앞두고 표를 의식하게 된 상당수 후보자들이 정부의 남북 화해와 대북 원조에 회의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최소 6·15 전까지라도 남북대화와 대북교역을 중단하자고 제의했다. 자칫하면 북한의 전략에 말려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부 종이신문과 인터넷신문이 조심스레 국민들의 냉정을 호소하면서 사건의 신속한 해결을 정부 당국에 촉구할 뿐이었다. 곤두박질치다시피 내려갔던 증권 가격이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국의 수출입 물량에도 그리 큰 변화는 없었다.
정부에서는 범인 체포에 10억 원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하지만 경찰은 답답할 뿐이었다. 아무런 단서도 제공하지 않으면서 현상금부터 내걸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사건의 파장을 더 크게 만드는 일이었다. 경찰은 지문이나 혈흔, 모발이나 족적 등 증거가 될 만한 범인의 흔적은 물론 그 정체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정체를 모르니 당연히 범인의 인상착의라는 것도 전혀 몰랐고 따라서 그 흔한 몽타주라는 것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조수경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 몽타주를 가지고 범인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범인의 유전자를 확보한다고 해서 그를 체포한다는 보장도 없다. 10명 가까운 부녀자가 희생된 경기도 화성 인근의 연쇄살인사건도 범인의 몽타주가 만들어졌고 유전자가 확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하지 못한 채 공소시효를 넘기고 말았다. 범인이 전과자가 아니거나 불심 검문에 걸리지 않으면, 그의 유전자를 검사해 볼 기회가 오지 않으니 당연히 그를 잡을 수도 없는 것이다. -
혼란스러운 가운데에도 조수경은 현장 조사와 자료 분석을 거쳐 범인에 대한 프로파일링을 내놓았다.
1. 범인은 일반 연쇄살인범과 성격이 다르다. 연쇄살인의 가장 큰 특징은 피해자에게 죽어야 할 특정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불특정 다수 가운데에서 대상이 자의적으로 선정된다. 물론 이번 희생자들에게 죽어야 할 이유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범인 관점으로 그들은 죽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2. 범행은 매 사건 별도의 범인이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 한 인간이 그렇게 여러 번 완벽히 흔적을 남기지 않고 범행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3. 2의 항이 성립한다면 범인들은 고도로 훈련된 살인기계 같은 존재일 터이다.
4. 3의 항이 성립한다면 범인에게 훈련을 시키고 지령을 내리는 실력을 갖춘 배후 주범이 따로 있을 것이다.
5. 4의 항이 성립하려면 범행의 본부와 범인들의 은신처가 있을 것이다.
6. 편지가 모두 인천공항 부근에서 발송된 것으로 보아 범인은 해외여행을 자주 하거나 아니면 서해의 해안 또는 섬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7. 배후 세력을 북한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정치적 성격을 띠는 복수(復讐)형 범죄인 것만은 틀림없다.
8. 7항이 성립한다면 범행은 한국 현대사에서 빚어진 모종의 비극적 상황과 관련을 가질 수도 있다.
9. 8항이 성립한다면 이 사건은 현장 범인을 체포할 수 있을지 몰라도 배후까지를 완전히 규명해 내지 못할 수도 있다. 이 판단에 합리적 근거는 없다. 과거 한국의 정치적 테러가 모두 그랬다는 귀납적 추리에 불과하다.
10. 범인은 나름대로 한국의 역사를 잘 알고 있으며 영어를 상당한 수준으로 구사하는 지식인이다.
11. B.K.라는 약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범인의 특성과 실체를 파악하는 관건이다.
12. 범인은 예고된 범행을 실천에 옮길 것이다. 다만 그의 장담대로 6월 15일이라는 시간과 강물이라는 장소를 지킬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범인은 사건이 임박해서 계획을 변경할 가능성도 있다.
경찰은 범행 시기와 일시 중단 시점을 염두에 두고 출입국자들에 대한 내사를 벌였다. 그리고 인천공항과 가까운 서해안과 인근 섬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 작업도 실시했다. 전국적으로 검문·검색이 강화된 것은 물론이고 특히 한강·임진강·금강·섬진강·낙동강·소양강 등 주요 하천 부근의 경비와 탐문 수사는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총선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보수야당에서는 북한과의 모든 관계를 대폭 약화시키겠다는 총선공약을 제시했다. 그들은 국가보안법을 철폐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 동안 법을 초월하여 이루어진 남북 왕래와 교류는 현행법대로 원상회복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더 이상 북한을 경제적으로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정부여당은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또 하나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조수경은 늦은 밤에 잠자리에 들려 하다가 연락을 받았다.
"선배님, 김인철입니다."
순간 조수경은 사건이 터졌다고 직감했다.
"어디야?"
놀랍게도 현직 검사가 피살된 것이었다. 그는 서울 강남구 로열빌리지에 사는 30대 중반의 젊은 검사였다. 그는 집과 가까운 양재천 산책로에 개 두 마리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가 괴한의 습격을 받은 것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이어서 그런지 목격자는 없었다. 그는 가슴을 예리한 흉기에 찔려 피를 흘리며 개천가에 엎드려 있었다.
엷은 비안개가 끼어 있는 개천 변에 임시 조명이 가설된 가운데 조수경과 김인철은 현장 조사에 착수했다. 사체에 나 있는 10개 이상의 칼자국은 육안으로도 식별할 수 있었다. 사체의 추리닝 주머니에는 지갑이 들어 있어 신원은 금세 확인되었다. 다른 주머니에서는 볼펜으로 'EVIL'이라고 휘갈겨 쓴 종이가 나왔다.
조수경은 일련의 사건들과는 연관 없는 별도의 사건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최근의 사건들을 흉내 낸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살해 대상에게 'EVIL(악마)'라고 쓴 것도 이전 사건과는 다른 방법이었다. 이전 사건들은 어떤 개념을 말했지, 단도직입으로 '너는 누구'라는 식으로 지칭하는 수법을 쓰지는 않았던 것이다.
현장 주변에서는 수십 개의 족적과 수백 개의 모류가 채취되었다. 현장조사를 마친 조수경과 김인철은 차에 올랐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어둡고 한적한 도로를 지나자 강남 시가지의 네온 불빛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선배님, 아무래도 저거."
김인철은 사거리의 모퉁이에 있는'24시간 설렁탕' 간판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들은 설렁탕 집 주차장에 차를 댔다. 비가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 김인철은 급히 운전석에서 나와 조수경에게 우산을 받쳐 주었다.
김인철은 탕 둘과 수육 하나를 주문하더니 조수경에게 말했다.
"선배님, 소주 한 잔 하시겠습니까?"
"운전해야 하잖아."
"시내 대리 운전은 7,000원입니다. 1688-7000."
"좋아."
김인철은 참이슬 한 병을 추가로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