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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감상하고 나면 젤 먼저 소주가 떠오르더군요."

옆자리에 있는 젊은 남녀가 김인철의 말을 들었는지 의혹스럽다는 눈길을 보냈다. 김인철은 개의치 않고 소주병 뚜껑을 돌려 땄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 봐도 됩니까?"
"그럼."
"선배님은 뭐 하고 있다가 연락 받으셨나요?"
"겨우 그게 궁금한 거였어?"

"선배님처럼 우아한 여성은 밤중에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늘 궁금했어요."
"'우아'라고? 앞으로는 그런 말 하지 마. 김 경위의 여자 친구하고 비슷하게 산다고 보면 돼. 그 시간에 자거나 앉아 있거나 아니면 화장실 갈 일 있으면 가거나."
"오늘은 뭐 하고 계셨는데요?"
"그냥 잠자리에 들려고 하던 차였어."

"제 여친하고는 달라요."
"김 경위 여자 친구는 밤에 뭘 하는데?"
"채팅이요. 나보다 더 좋은 남자를 기어이 찾아내겠대요."

조수경은 숟갈로 설렁탕에 파를 쓸어 넣으며 웃었다.

"김 경위는 그 시간에 주로 뭐 하는데?"
"저는 제 친구보다 단연 몸매와 얼굴이 예쁜 여자가 나오는 영화를 봅니다. 그러면서 생각하지요. 내 여친이 저 여자 배우보다 예뻐질 가능성은 완벽히 없다고."

김인철은 조수경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술잔을 받고 보니 김인철의 잔은 어느 새 비어 있었다. 조수경은 소주병을 집어 그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선배님은 결혼하실 생각 없으세요?"
"오늘은 별 걸 다 묻네."
"너무 아까워서 드리는 말입니다."
"아까워? 내가 물건인가?"
"따지고 보면 인간도 모두 물질에 불과하니까요."

말을 마친 김인철은 빙그레 웃었다. 조수경도 웃으면서 물었다.

"요즈음 물리학에서는 그렇게 파악하나?"
"만물의 본질은 다 물질이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군."
"아무튼 저는 이 짧은 시간을 머물다 가는 물질들이 왜 그다지도 남을 미워하고 모함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김 경위. 갑자기 웬 사유적인 발언을?"
"경찰 일을 하다 보니 부쩍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지요."

김인철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경찰이 적성에 안 맞는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수경은 그 생각을 바로 번복했다. 김인철 같은 사람이 오히려 경찰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언뜻 스쳤기 때문이었다.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이야말로 일급 수사관이 가져야 할 첫 번째 자질이라고 생각 들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사건 얘기를 해 보자고."
"해결이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군요."
"나도 그런 생각을 했어. 그것보다 이 사건을 가지고 언론이 어떻게 소란을 피울지 걱정돼서 그래."

"그렇지요. 피살자가 현직 검사에다가 'EVIL'이라는 글씨까지 쓰여 있었으니 아주 충격적일 수밖에요. 언론은 온갖 난리와 소동을 다 피우겠지요. 그런데 선배님. 그 'EVIL'이라는 글씨를 최대한 이용해 볼까요?"
"사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 글씨 때문이야. 이 사건을 이전 사건들과 연계시킬 것 아니겠어?"

"그러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제 청에 가면 기자들이 몰려와 있을 겁니다. 다행히 사건 현장에는 기자가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기자들에게 다른 정보는 일절 주지 말고 'EVIL' 얘기만 하자는 것이지요."

조수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어린 청년치고는 아주 노련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기자들에게 마음껏 연계시켜 추정 기사들을 써대게 만들자는 것이지?"
"바로 그겁니다."

김인철은 좌우를 한 번 살피더니 얼굴을 가까이 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 무식하고 속되고 선동적인 기자들이 실수를 한 번 크게 하도록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차후 기사들을 쓰는 데 조금 신중해지지 않겠습니까?"

조수경은 김인철의 잔에 술을 따르려 하다 그만두었다. 병이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 경위, 한 병 더 하고 싶으면 해."
"감사합니다."

조수경은 종업원과 눈을 맞추며 빈 소주병을 들어 보였다.

김인철은 빠른 속도로 소주를 연거푸 마셨다.

"천천히 마셔."
"선배님, 저는 사실 요즈음 너무 당혹스럽습니다."

조수경은 이윽한 눈길로 김인철을 보았다.

"세상에 어떻게 이룬 민족 화해인데, 미친놈이 살인 몇 건 저지른 것을 기화로 이럴 수가 있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것을 나름대로 정치적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사람들은 통일을 원하고 분단을 싫어한다지만, 아닙니다. 분단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평화를 원하고 전쟁을 싫어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도 그렇지 않습니다. 엄연히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존재해 왔습니다."

"전쟁이 싫기 때문에 북한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그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나이브'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들은 언제라도 분열과 폭력을 즐기는 자들의 이용 제물이 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우슈비츠에서 가스실의 밸브를 돌린 사람들은 악마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게르만의 평범한 아저씨들이었습니다."

조수경은 김인철이 나이보다는 훨씬 비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김 경위 말대로 한 번 해 보자고."
"선배님 아직 답변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다 답변했잖아."
"결혼 말입니다."

조수경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6월 15일 전으로는 안 할 거야."


#수사관자질#남북화해 #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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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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