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쯤 헤이리 인근에 작은 밭을 가지고 계신 분이 모티프원의 현관문을 열고 한 웅큼 야채를 내밀었습니다. 상추, 쌈케일, 적잎치커리, 적근대 등 아침에 밭에 들렀다가 따오신 싱싱한 쌈용 야채였습니다.
채식만을 하시는 어머니를 닮은 탓인지 삼겹살을 굽지 않아도 이 쌈용 야채와 고추장만으로도 저에겐 훌륭한 밥상이 됩니다. 저는 야채를 씻고 밥을 한 그릇 퍼서 식탁을 차렸습니다. 수저를 들고서야 고추장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냉장고 속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날 제 옆집인 밤나무집에서 이 고추장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무엇이든 남들에게 아낌없이 퍼주기를 좋아하는 타오네 식구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동안 받기만 했던 송구스러운 마음을 덜기 위한 빚갚음의 뜻도 있어 한 끼 밥을 사는 외식으로는 합당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저의 처가 휴가인 날, 수산시장에 직접 가서 몇 가지 회를 준비했습니다. 그때 회를 뜨고 남은 생선뼈를 매운탕용으로 싸준 것이 냉동실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처는 며칠간 딸들과 함께 지내야 할 형편으로 집을 떠나기 전 저를 위해 그것을 재료로 매운탕을 준비하고자 했습니다. 고춧가루가 없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밤나무집에서 준 고추장은 아직 남아있었지만 처는 부랴부랴 한 동네의 오현광물박물관 댁으로 가서 고춧가루를 얻어왔습니다.
저는 같은 고추를 재료로 한 것이라도 주방에는 고추장과 고춧가루가 함께 상비되어야한다는 인식을 그때야 했습니다.
일전에 취재 건으로 뵈었던 강미승 작가(<내 삶을 1℃ 높이는 매직 키워드 101>, <여행, 색에 물들다>의 저자)께서 오셨습니다. 점심을 하고 3시간 정도 느리게 함께 헤이리를 걸었습니다.
최근 삼십 수년 만에 처음으로 가족들과 함께가 아닌, 홀로인 공간으로 독립했다고 했습니다. 애초 의도는 원룸형태인 그 공간을 가능하면 비워두고 직접 그린 그림을 걸거나 찍은 사진에게 빈 벽들을 내주고 싶었답니다. 하지만 혼자 사는 생활이라도 냉장고가 필수임을 알았습니다. 친구가 집들이 선물로 전자레인지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다른 친구가 장欌은 하나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강 작가는 어떻게 해서든 장을 비롯한 더 이상의 세간을 들이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도 강 작가의 결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쐐기를 박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자유여행자들을 보세요. 배낭 하나로 몇 개월을 살아냅니다. 사실 자신이 생존하는데 자신의 등짐 하나보다 많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배낭 하나보다는 좀 더 호화롭게 살고 싶다면 작은 모토홈(캠핑카)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사실 기타는 뱀이 늘씬한 다리를 가진 것에 불과해요. 그 원룸에 사족蛇足을 달기보다 차라리 강 작가의 작품들로 채우고 일 년에 한두 번씩 지인들을 불러 '오픈스튜디오'를 하세요. 그것이 오히려 개성적인 마인드를 실천하는 쿨한 강미승적이지 않나요?"
저도 지금 생각하니 꼭 고춧가루 매운탕만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고추장매운탕도 충분히 매력적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날을 꼽아보니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사기 위해 마트에 가지 않고도 한 달을 넘게 잘 살았습니다. 이 둘을 가진 이웃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내가 다 가질 필요도 없는 듯 싶습니다. 저는 이웃들이 갖지 않은 무엇인가를 가지고 나누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지금보다 훨씬 가벼워진 상쾌한 삶이 될 것 같습니다.
'단순함'이란 금연하는 것만큼 실천하기란 쉽지 않은 명제이지만 '단순한 삶'의 실현은 금연보다도 더 몸과 마음에 이로운 것이 분명합니다. Simplify your life!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홈페이지 www.motif1.co.kr 과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