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로 보는 역사 그 세번째 이야기입니다.**다시 무늬의 시대로비색청자가 아름다움을 뽐낼 무렵, 새로운 청자 하나가 등장했습니다. 이 청자는 비색청자에 없던 무늬가 있습니다.
토기든 도자기든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가장 빨리 알려주는 지표가 바로 이 '무늬'인데요, 비색청자의 절정기와 교차하며 나타난 무늬 역시 고려사회에 무시무시한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처음, 무늬가 나타난 것은 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의종임금 때입니다. 당연히 문벌귀족들이 고려사회를 손안에 넣고 뒤흔들 때이기도 합니다. 왕은 귀족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문벌귀족들은 하늘 무서운 줄 몰랐습니다.
의종은 자존심이 강했던 모양입니다. 문신들에 대하여 그 어느 임금보다 우대하였지만 그것으로부터도 고통을 받았거든요. 임금은 지나치게 오만방자해진 문벌귀족들로부터 왕실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임금의 노력만으로 유학자인 문벌귀족들의 학문적 수준을 넘어서기란 불가능했습니다. 혹시라도 문신들로부터 '학문을 싫어하는 임금'이란 소리를 들을까 봐 문신들에게 온갖 혜택을 다 주면서도 그들이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내내 괴로웠습니다.
유학자인 그들을 학문으로 따라잡기 쉽지 않다고 생각한 임금은 나라 곳간을 있는 대로 털어 호화로운 잔치를 벌이고 으리으리한 건물이나 정원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귀족들의 콧대를 누르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귀족도 궁궐을 짓고 살수는 없는 법이었지요. 의종임금은 귀족들이 꿈도 꾸지 못할 사치를 부리는 일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잔치에 초대받는 사람들은 고귀한 신분들, 귀족 중의 귀족인 문벌귀족들, 그들은 임금에게 조금도 굽히려 하지 않은 채 잘난 체를 해댔습니다. 임금은 틈만 나면 송나라 문학이 어떻고, 역사가 어떻고 하고 떠들어대는 귀족들의 입을 아예 틀어 막아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여 감히 왕실을 우습게 보는 일 따위를 하지 못하게 할 일을 의종은 꿈꿨습니다. 바로 그때, 청자로 지붕을 덮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원래 지붕을 덮은 기와는 그렇게 값비싼 재료가 아닙니다. 하지만 청자라면 달랐지요. 청자로 지붕을 만든다는 것은 그 규모만 생각해도 아찔할 지경입니다. 임금은 기분이 매우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그 청자를 좀 특별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걸 본다면 어떤 귀족도 왕실을 업신여길 생각을 하지 못할것이니까요.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양각청자로 만든 기와입니다.
이 기와로 지붕을 덮고 잔치를 벌여 귀족들을 초대했습니다. 양각청자로 만든 그릇에 음식을 담고, 양각청자로 만든 술병에 술을 담아 양각청자로 만든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습니다. 정말로 임금을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칼과 청자고려는 정복국가시대를 끝내면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호족에게서 칼과 힘을 빼앗는 것이 임금들의 과제였습니다. 그 후 무관은 고려귀족사회에 참여할 길이 없어졌습니다. 과거시험에 무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려시대를 빛냈던 서희, 윤관, 강감찬 등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장수들 모두 문과출신의 문신들입니다. 이름난 장수가 되는 길은 학문을 닦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러다보니 무신들은 높은 벼슬에 오르지도 못하고 문신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였습니다.
문벌귀족들이 하는 행동은 기가 찰뿐이었습니다. 거란과 여진이 국경선을 뻔질나게 넘어오는 상황이라 고생은 무신들의 몫이었고, 문신들은 개경에 앉아 잔치만 벌였습니다. 그런데도 문신들에게 무시를 당하다 보니 울분이 쌓이고 있었지요.
그때 의종임금이 보현원에 나들이를 갔습니다. 물론 잔치를 벌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임금은 허구한 날 잔치를 벌여놓고 문신들을 초대하여, 화려한 임금의 자태를 보여주는 일에 빠졌습니다. 고려 최고의 시인들과 술잔을 맞부딪히며 이야기를 나누노라면 스스로도 최고의 학자가 된 느낌이 들었던 것일까요?
오랫동안 이를 갈아오던 무신들 중에서 정중부 일행은 더 이상 참지 않기로 결심, 이날을 거사일로 삼았습니다. 마침내 반란이 일어난 것이지요. 언제나 효율과 일사분란한 명령체계를 최우선의 덕목으로 하는 무신들은 칼의 힘을 앞세워 신속하고도 확실하게 문신들을 비로 쓸듯이 쓸어버렸습니다. 의종임금은 유배를 가는 신세가 되었고요. 이렇게 해서 1170년부터 공포스럽기 그지없는 무신정권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나라는 칼을 쥔 사람의 품에서 품으로 휩쓸렸습니다. 이의방-정중부-경대승-이의민 등 여러 무인들을 거쳐 마침내 1196년에 최충헌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무신정권은 더욱 강하고 더욱 무서운 시대로 접어든 것입니다.
새파랗게 젊은 문신이 오랫동안 국경에서 고생한 늙은 무신의 수염을 쥐고 흔들어도 아무 말도 못했었으니 문벌귀족들에 대한 무신정권의 태도는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드러내놓고 그들에게 분풀이를 했습니다. 그것은 청자에도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문벌귀족들은 중국 송나라에서 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라 중국풍을 좇는 일이 많았습니다. 불티나게 중국 책을 베끼고, 중국 귀족들 사는 모습을 따라하느라 가랑이가 찢어질 지경이었습니다. 의종임금 때엔 왕과 귀족은 경쟁이라도 하려는 듯이 사치를 부려 보통 때보다 무려 스무 배가 넘는 중국 상인들이 벽란도를 드나들며 물건을 팔아댔습니다.
문신들은 송나라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무신들에게 그런 모습이 좋아 보일 리 없었지요. 무신들은 약해빠진 학자들이나 좋아하는 송나라 도자기에 대항해 자신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정말 놀랍고도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 최고의 도자기로 여겨지는 상감청자가 그런 무신들에 의해 꽃피웠다는 것입니다. 차별받던 무신들의 칼의 노래가 상감청자로 울려 퍼진 것일까요?
**상감청자의 탄생배경왜 청자의 나라인 중국에는 상감청자가 없는 것일까요?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우리나라 상감청자의 진가를 전혀 모르는 소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만이 상감청자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생각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과학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청자에 무늬를 그려 넣지 않은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청자의 바탕은 도화지처럼 하얗지 않아 그림을 그리면 지저분해집니다. 그래서 그림이 그려진 청자는 없습니다. 대신 무늬를 넣는 양각청자가 만들어졌습니다.
무신들은 자신들만의 청자를 만들려니 순청자도, 상형청자도, 양각청자도 아닌 새로운 청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지요. 하지만 그림을 그려 넣는 것만 빼고는 이미 다 세상에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뼈 속까지 문신들에 대한 원한에 사로잡힌 무신들이 문신들을 따라할리 없었습니다.
무신들의 제작 의뢰를 받은 고려의 도공들은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림을 그려 넣자니 오히려 지저분해지고, 그렇다고 그것 외엔 딱히 방법도 없고...
그러나 창조성에서는 그 어떤 민족보다 우수한 우리민족의 선조답게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림을 그릴 수 없다면 청자의 표면을 파서 색을 메워 그림을 그려 내면 어떨까?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표면을 파서 문양을 만들었기 때문에 '상감기법'이라고 부르는 이 새롭고 창조적인 방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청자가 '상감청자'입니다.
물론 상감기법은 이때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장식품인 금속에도 상감기법을 이용해서 금과 은을 세공하거나 보석을 넣는 일을 했던 것이니 아주 새로운 기법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기법 자체만으로 창조적이다, 하고 감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왜 상감청자가 그토록 위대한 것일까요?
**상감청자속 숨은 과학의 힘상감기법은 고려청자가 처음으로 도입한 방법은 아닙니다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렇게 묻게 됩니다.
'왜 고려청자만이 이 기법을 도입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나라 상감청자에는 상감기법이 가능하게 된 비밀이 숨겨져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유약에 있었습니다. 아무리 상감기법이 기발하고, 그래서 멋진 무늬와 그림을 그려낸다고 해도 청자유약이 희끄무레하고 불투명하다면 어찌되었을까요? 지저분해서 안하느니만 못하단 소리를 들었을법합니다.
그러니까, 상감기법으로 만든 밑그림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아니 더욱 화려하게 빛나게 해준 유약, 그런 유약을 만들어낸 비밀의 물질이 바로 '인'입니다.
비오는 날 시골에서는 하얀 달덩어리 같은 불빛이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사람들은 그것의 정체를 몰랐기 때문에 '도깨비불'이라고 부르곤 하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본 경험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옛날 어린 시절에 본 기억이 나는데요, 어두컴컴하고 흐린 날, 비가 그칠 때쯤 가랑비 속으로 올라가던 그 놀라운 경험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물론 그때는 그것이 도깨비불인지도 몰랐습니다만.
바로 그 도깨비불의 정체가 '인'입니다. 인은 우리 몸의 뼈를 이루는 구성성분인데요, 무덤 속 시체의 뼈 속에 있었던 인이 증발하면 도깨비불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인(원소기호 P)은 자연계속에 12번째로 많은 원소이니만큼 유약 속에 쉽게 섞여 들어옵니다.
중국 유약에는 이 인이 우리나라 청자보다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청자보다 훨씬 불투명합니다. 이 유약을 발라 구운 청자에 얇게 새긴 조각이나 그림은 아예 보이지도 않습니다. 거기에다 상감기법으로 섬세하고 다양한 그림을 넣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불투명한 중국 청자유약으로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상감청자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기술적 배경에는 기법이 참신함에 더해 기술적 진보가 있었던 것이지요. 유약을 투명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인의 함량을 줄여야 했고, 그 방법을 찾아낸 도공들의 노력의 결과가 고려시대 '상감청자'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청자가 중국 청자를 제치고 세계 제일의 청자가 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것이었지요. 창조적이고 동시에 과학적인 도공들의 힘.
투명유약을 만들 수 있어야 백자를 만들 수 있습니다.우리나라가 백자를 그토록 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기술적 밑받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고려적인 청자 탄생과 무신정권의 민족주의1258년에 마지막 지배자였던 최의가 죽을 때까지 최씨 정권은 68년간 집권했습니다. 잠시 권력을 잡았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지배자로서 자신들의 도자기가 필요했습니다. 오랫동안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사람들답게 그들은 도자기가 가진 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름난 도자소는 재빨리 그들 차지가 되었습니다.
몽골족이 침략했을 때 강화도로 옮긴 무신정권이 그 조그만 섬에서 버텨낸 것은 남해안 지역에 있는 곡창지대와 도자소를 미리 손아귀에 넣어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뱃길로 들어오는 도자기와 곡식으로 부족한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무신정권은 군인들답게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졌습니다. 문신들은 송나라를 비롯해 선진국 유학파들이 많고,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외국의 선진문물을 더 추종하는 성향이 강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기층 민중들과 유리되기 쉽고 그 결과가 민족주의를 배경으로 한 군인정권의 탄생을 낳는 게 아닌 가 싶습니다. 무신정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문벌귀족들 사이에서는 절대적이었던 신분서열도 무너졌고, 천민들도 칼의 능력을 보여준다면 쉽게 권력자의 자리로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소외되었던 사람들에게 무신정권은 해방자이기도 했습니다. 신분질서는 꿈틀거렸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신정권은 민족주의를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송나라나 그 뒤를 이은 원나라에 대해 무신정권이 그토록 배타적이었던 것은 이런 이데올로기가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유지하는 무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과거시험을 통해서라거나 전통적인 방식으로 지배자가 된 것이 아니라 칼에 기댄 쿠테타로 잡은 권력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벌귀족의 기반이 된 외국세력과의 단절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씨정권이 있는 한 외국 도자기는 더 이상 개경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외국풍이 주름잡았던 도자기 시장도 급변했습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외국도자기를 소유하려는 사람은 매국노였던 셈이지요. 이런 분위기에서는 결국 가장 고려적인 도자기가 만들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가 나온 것은 바로 이때입니다.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이 상감청자는 최씨 무신 정권의 대표작입니다.
이 매병은 최씨 무신정권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모든 권력을 한손아귀에 쥔 최씨 무신정권은 자신들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도자기를 만드는데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힘의 상징은 칼과 청자였던 것이지요.
**무인들의 시대에 청자 매병을 만든 까닭매화꽃을 꽂아 꽃병으로 쓰면 더없이 멋지겠다 싶어서 '매병'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만 그것은 술병입니다. 즉, 칼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요.
청동기시절, 토기는 결정적으로 변화가 나타나는데요, 그것은 경제주체가 여성에서 남성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였습니다. 도자기와 마찬가지로 토기도 권력이 바뀌면 새로운 토기가 나타났는데, 이 토기야말로 가장 최초의 권력을 상징하면서도 가장 큰 격변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 검은 색 토기가 탄생한 배경은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이 가져온 변화와 함께 시작합니다. 처음 농업혁명은 사냥하던 남성과 식물채집하던 여성의 분업이 가져온 혁명이었습니다. 유목민은 그래서 애초부터 남성적 문화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한번도 권력을 놓지 않았었거든요. 유목민족에게는 그래서 '남성 유일신'만이 존재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심지어 유목민족의 전통속에서 태어난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에서 여자는 몸만 빌려주는 존재일 뿐이고, 야훼와 예수는 동정녀의 몸을 빌려 자기 복제한 것처럼 표현됩니다.
초기 기독교가 이집트, 로마 등의 농경국가에서 선교에 고전했던 것이 바로 이런 남성적 유일신문화가 이해되지 못해서였고, 그 결과 '성모 마리아'신앙을 도입함으로써 타협을 이뤄냈다고 합니다.
이것은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불교의 주요한 숭배대상인 관음보살의 경우 북방 유목․상업지대에선 남성으로, 남방의 농경지대에선 여성으로 표현됩니다. (당연히 우리나라도 농업국가여서 관음상은 여성상입니다)
고구려나 백제, 신라, 심지어 가야까지도 국가를 세운 국조에 대한 신앙과 함께 국모신앙이 존재했는데요, 고구려의 유화부인,백제의 소서노,신라의 알영,그리고 가야의 허황후가 '남성 유일신앙'에 대항하는 '성모신앙'의 대표적 존재들입니다.(제주도의 영등할망, 지리산의 마고할미 등도 역시 성모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뿌리 깊게 국모 혹은 성모신앙이 남게 되었던 것은 신석기시대 채집경제의 주체였던 여성이 씨앗의 순환을 알아내면서 경제주체가 되었기 때문인데요, 공치기 일쑤인 남성들의 사냥일보다 여성들의 식량생산은 훨씬 더 안정적인 먹거리를 제공했던 것이지요.
여성 중심의 경제가 이루어졌을 이때는 가장 중요한 물건이 '씨앗'이었고, 씨앗을 넣는 도구는 신성시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석기시대에 여성들이 경제적 주체로서 권력의 정점을 이루었을 때의 제의는 '성모신앙'으로 남게 되었는데요, 고구려의 유화부인의 경우에도 동굴에 여신상을 모셔두는 의식을 치름으로써 풍년을 빌었습니다. 이처럼 씨앗을 땅속의 깊은 곳(동굴,음지,땅속)에 있는 여성신에게 빌어야 한다고 믿거나 식구를 먹여 살리는 할머니 신으로 표현됨으로써 신석기 시대 여성중심신앙의 형태가 보존되어왔습니다.
이때 씨앗을 넣는 그릇은 '붉은 색토기'입니다. 종지모양의 이 그릇은 잡귀가 근접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붉은 색 칠을 했습니다. 농경문화권, 특히 동양에서는 붉은색은 잡귀를 몰아내는 주술적 효과가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것은 붉은 색토기의 소멸과 함께 씨앗단지,즉 신주단지로 변합니다.
이런 여성중심적인 경제가 가능했던 것은 생산도구가 간단한 마제석기나 나무막대 등이었기 때문이었는데요, 결정적인 변화는 '보습'의 탄생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돌보습은 발명되자마자 농업생산력을 뿌리 채 흔들었습니다. 경작은 더 넓고 더 쉽고 더 광범위하게 가능해졌고, 돌이나 나무뿌리가 많아 버려지던 황무지도 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돌보습은 여성들의 힘으로 경작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힘센 남자들이 경작의 주체가 되었고, 이때부터 여성들은 부엌으로 쫓겨났습니다.(그래서 이 경제적 박탈감이 부엌을 무대로 하는 다양한 신화나 전설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경제권을 쥐게 된 남성들은 권력을 손에 넣었고, 그것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남성 위주의 세습권력, 가부장제를 정점으로 하는 남성문화를 만들었는데요, 이때 그들을 대변하는 토기가 검은색토기입니다. 검은색토기가 만들어지는 순간, 더 이상 붉은 색토기는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검은색토기는 왜 만들어진 것일까요? 이유는 이 토기가 '술병'이기 때문입니다. 즉, 술병은 술이 흘러나오면 안되고, 술이 흘러나오지 않기 위한 특수처리를 하다보니 흑연을 겉에 문질러서 토기의 구멍을 메워야 했던 것이지요.
그럼, 다시 이렇게 묻게 됩니다. 왜 술병을 만들었을까요?
가부장제적 세습권력 구축에 성공한 남성들은 자신들의 힘이 하늘에서 내려온 절대권력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축제에는 술이 등장했고, 술을 놓고 제사를 지낸 뒤에 술을 나눠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술에 취했을 때의 몽롱한 기분은 하늘과 교감한다고 여겨지게 하였고, 그것은 남성들만의 독특한 교분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여성들의 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우리나라에서는 축제가 남성적으로 흐르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을 위한 씨앗교체축제가 추수와 함께 만들어졌고, 이때는 햇곡식을 숭배하는 의식과 함께 떡을 만들어먹는 풍습으로 남겨집니다. 이것이 한가위, 혹은 추석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명절로 전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술과 술병은 남성적 권력, 혹은 권력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매병이 무신정권의 절정기에 만들어진 것은 바로 이런 까닭입니다. 청동기시대 칼의 힘을 손에 들었을 때 만들었던 검은색 토기가 시대를 건너 다시 나타난 것이지요. 매병은 칼의 다른 모습입니다.
**상감청자 매병속에 숨겨진 도공의 예술혼예술이 위대한 것은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성에 있다는 것을 이 상감청자 매병은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정말 놀랍게도 이 매병을 만든 도공의 손에서 청자는 칼보다 위대하게 시대보다 찬란하게 빛이 났습니다.
이 매병에는 도공이 몰래 감춰둔 수수께끼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무신들의 얕은 지식을 비웃고 싶었던 것일까요?
매병을 보면 가장 먼저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지요? 안정되고 편안하면서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한 연구자가 인사동을 중심으로 외국인들에게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외국인의 눈에 가장 아름답게 여겨지는 매병을 조사한 이 결과는 정말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매병의 아름다움의 비밀이 '황금비율'에 있었던 것입니다.
외국인이 선택한 가장 아름답다는 매병을 재면 가로의 길이인 병의 지름이 26센티미터이고 높이는 42센티미터입니다. 높이가 가로보다 1.615배 큰데요, 이것은 황금비율인 1.618배에 근접한 수치입니다. 도자기를 구우면 처음 빚었을 때보다 아주 많이 줄어들기 때문에 원래 만들 때는 이 비율을 정확하게 맞췄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황금 비율일 때 자연은 가장 아름답고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피라미드도 이 비율에 맞춰 지어졌습니다. 음악에서도 한 옥타브안에 8개의 흰건반과 5개의 검은 건반으로 되어 있는데 이 수를 나누면 황금비율이 나옵니다. 사람의 몸도 이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손가락은 다섯 개인데 각 손가락의 마디는 3개입니다. 역시 황금비입니다.
이렇게 자연은 3,5,8....과 같은 숫자로 이루어져 가장 아름답고 편안하며 능률적이 되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이것을 수학에서는 피보나치수열이라고 합니다. 수학은 자연의 노래인 셈이죠.
도공은 자연이 주어진 최고의 아름다움을 상감청자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칼로 권력을 손에 쥔 것이 자연이 원하는 것이었을까요? 최씨정권이 끝난 것은 이 매병이 만들어진 뒤 10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민족주의의 절정, 진사청자몽골과의 항전을 이끌었던 무신 최항은 가장 많은 고려인들을 몽골군의 손아귀에 죽어가게 만들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강화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자와 함께 살아갔는데요, 그의 무덤에서는 정말 그다운 청자가 나왔습니다. 바로 '진사청자'입니다. 진사청자는 구리를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붉은 모래로 그림을 그린 청자'라는 뜻입니다.
구리는 1085도 정도에서 녹습니다. 도자기를 굽는 온도가 1300도입니다. 그러니 가마 안에서 녹아 흘러내려버립니다. 꽤 까다로운 방법으로 보이죠?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 방법은 중국에서도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뒤늦게 나타났습니다.
상감청자도 기술적으로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저마다 다른 흙으로 굽기 때문에 높은 온도에서 흙은 제각각 줄어들어 들뜨거나 구멍이 생기거나 뭉개질 수 있습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무늬를 만들어 내기 위해 흙을 다루는 데서부터 불을 조절하는 데까지 어느 하나 쉽지 않았습니다. 도공들은 불과 흙을 정복했던 것입니다.
상감청자가 그렇듯이 진사청자도 민족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하지 않은 것을 하려는 독창성이 만들어낸 진귀한 보물인 것이지요. 비록 그것이 최항이 민족주의를 이용해 무엇을 하려 했는지 보여주는 슬픈 역사의 편린을 담고 있다고 해도 결국은 그것은 우리 민족의 보물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무신들이 닦달해댄다고 해도 가장 우리다운 것을 만들어 낸 것은 결국도공들의 높은 기술과 예술적 경지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