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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교 최초의 다리 미리내, 다리 이름과 짓게 된 과정은 뭔가 문제점이 있어 보인다
벌교 최초의 다리 미리내, 다리 이름과 짓게 된 과정은 뭔가 문제점이 있어 보인다 ⓒ 서정일

지난 9월, 벌교천에는 다리 하나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주위에서 들어보니 사람만이 다닐 수 있는 인도교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육교 같고 어찌 보면 다리 같은 명물이 벌교에도 탄생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후, 정식개통을 앞두고 여기저기에서 벌교 인도교가 개통된다고 좋아들 했다.

 

필자는 보성군이나 벌교읍에서 과연 다리 이름을 뭐라고 붙일까 하고 내심 궁금해 했다. 그리고 어떤 작명가가 어떤 의미 있는 이름으로 백년대개를 바라보면서 새겨놓을까 하고 기대감도 컸었다. 다리 공사 내내 완공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다리 이름에만 온통 신경이 쓰였다. 그러다가 도무지 궁금해서 정식 개통을 며칠 앞두고 다리에 가 보았다.

 

새색시 시집가는 날 마냥 하얀 종이로 다리 이름 동판은 곱게 가려져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첫날밤 옷고름을 푸는 듯 한 마음으로 떨리는 손으로 살짝 종이를 들춰봤다. 초록색 동판이 보이기 시작했고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그곳엔 고작 '벌교인도교'라고 새겨져 있었다. 한 순간에 기대는 무너지고 쓴웃음이 나왔다.

 

만약 4차선 도로를 건설하면서 그 도로 이름을 '벌교독립만세로'나 '벌교이순신백의종군로'가 아닌 4차선이니까 그냥 '벌교4차선로'라고 지어놓았다면 얼마나 우스운 꼴이며 외부에서 보성이나 벌교 사람들의 수준을 또 어떻게 보겠는가? 사람들이 건너다닐 수 있는 인도교라고 그냥 '벌교 인도교'라고 이름을 걸어놨으니 그 허탈감이란….

 

그런데 이틀 후 누가 뭔 소리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갑자기 보성군과 벌교읍에서 다리 이름을 공모한다고 수선을 떨기 시작했다. 물론 '벌교인도교'라는 동판은 떼어 내버린 후였다. 그래, 경위야 어찌됐든 뭔가 잘못됐다는 점을 인정하고 뉘우쳤으니 그냥 묻어두기로 하자. 이제는 의미 있는 이름이 나오겠지 하고 잊고 살았다.

 

지난 13일, 다시 가 본 그곳엔 '다리 미리내는 공모를 통해서 접수된 59건 중에서 벌교읍 인도교 이름 선정위원회에서 최종 선정된 다리 이름으로 은하수를 뜻하는 순수 우리말임'이라 적혀있었다. '다리미리내(?)' 좀 실망이었다. '벌교 인도교'라고 지어 놓았을 때는 허망하더니 '다리미리내'라고 붙여놓으니 헛웃음까지 나왔다.

 

이름 공모에 59건 접수했다는 것과 벌교읍 인도교 이름 선정위원회가 엄선했다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고 대단해서 다리 이름 동판보다 위에 크게 붙여놨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공모의 진정한 의미를 살리려면 다리 이름 밑에 '회정리에 사는 홍길동 지음'이라고만 표기하면 그만이다.

 

누가 봐도 관의 초기 잘못을 면피해 볼 요량임을 알 수 있다. 중요한 다리 이름 지은이는 온데간데없고 곁다리 내용인 '시민들에게 공모했더니 59건이 들어왔고 시민대표격인 벌교읍 인도교 이름 선정위원회가 선정했는데 그 이름이 미리내다리로 이것은 순수한 우리말이며 온전히 시민들이 지은 다리이름이다'라고 광고하고 관은 줄행랑을 쳐 버렸다.

 

애초부터 인근에 있는 소화다리가 일제침략과 이념전쟁으로 피의 다리인 점을 상기해서 이번 인도교를 '평화의 다리' 혹은 '화해의 다리'로 짓거나 벌교의 위대한 인물인 나철 선생의 호를 따서 '홍암교'로 부르겠다는 의지나 생각조차 없었다는 것은 관이 얼마나 지역에 관해 애정이 없었는가를 방증하는 것이며 깊이 있는 고민 없이 일처리를 한 것도 모자라 면피용으로 시민을 앞세운 어처구니없는 행태인 것이다.

 

 낙안읍성 관광 팸플릿의 문구는 관광안내서와는 거리감이 있다
낙안읍성 관광 팸플릿의 문구는 관광안내서와는 거리감이 있다 ⓒ 서정일

그런데 인근 낙안의 낙안읍성 관광 팸플릿을 보면 관이 생각 없이 일하거나 의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한술 더 뜬다. 60년대 반공교육용인지 낙민루을 소개하는 문구에는 '여순사건 당시 공비들에 의해 소실된 것을 1987년 복원하였다'고 적고 있다.

 

일반 대중을 상대하는 공공 문서에서 사실관계가 정확히 입증되지 않은 내용을 기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여순사건은 이념을 달리했던 지역민 서로에게 비극적 사건인데 '여순사건 당시 소실된 것을 복원했다'라고 알려줘야 옳은 행태인데 '여순사건 당시 공비들에 의해 소실됐다'라고 적어 놨다. 전쟁사도 아니며 건물 역사를 설명하는 관광안내서에 그렇게 적어 놨다.

 

공비라는 단어는 아군에서 적대적 개념으로 사용했던 악의적인 표현이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공산당의 유격대. 중국에서, 국민 정부 시대에 공산당의 지도 아래 활동하던 게릴라를 비적(匪賊)이라고 욕하며 부르던 데서 유래한다'라고 기술돼 있다.

 

만약 그토록 정확히 사실을 적겠다고 원한다면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낙민루는 소실되기 전 이미 경찰이 점령해서 사용했고 빨치산이 경찰과의 충돌시 불을 질렀기 때문에 '1924년 중수된 낙민루는 여순사건 당시 경찰이 점령해 사용하면서 일부 건물을 훼손했고 빨치산이 방화해 전소됐다'라고 적어야 한다. 그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인도교니까 벌교인도교라고 이름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나 공모에서 가장 중요한 공모당선자는 제쳐두고 곁다리들만 적어놓은 것이나 관광안내서에 앞뒤 자르고 공비가 했으니까 공비라고 적어야 한다는 것이나 모두 오십보백보다.

 

낙안군과 낙안군 폐군(廢郡)
현재의 순천시 외서면을 비롯해 낙안면, 별량면 일부, 보성군 벌교읍 그리고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일부의 땅은 옛 낙안군이었다. 하지만 101년 전인 지난 1908년 10월 15일, 일제는 항일투쟁무력화, 동학혁명진원지분산, 침략거점도시화를 위해 낙안군 자체를 없애버리고 주민들을 인근 지역 세 곳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덧붙이는 글 | 남도TV에도 실렸습니다


#낙안군#남도TV#벌교#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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