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는 2명의 이슈메이커가 있다. 한 명은 "여성도 왕이 될 수 있다"는 구호를 내건 덕만공주(이요원 분)이고, 또 한 명은 "진골도 왕이 될 수 있다"는 표어를 내건 김춘추(유승호 분)다.
두 명의 이슈메이커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인물은 여걸 미실(고현정 분)이다. 지난 13일 제42부에서는 '남자가 아니라도, 성골이 아니라도 왕이 될 수 있다'는 두 사람의 캐치프레이즈에 자극을 받은 미실이 뭔가 중대한 결심을 굳히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위와 같은 <선덕여왕>의 최근 방영분과 관련하여 반드시 확인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과연 김춘추가 골품타파의 선구자 역할을 했을까'하는 점이다. 이런 확인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얼핏 생각하면 김춘추가 골품타파를 최초로 제창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권1 왕력(王曆) 편의 '제28대 진덕여왕' 부분과 '제29대 태종무열왕' 부분의 사이에 승려 일연(1206~1289년)은 다음과 같은 문구를 적어 넣었다.
"이상은 중고(中古)로서 성골의 왕이고, 이하는 하고(下古)로서 진골의 왕이다."법흥왕부터 진덕여왕까지는 성골의 왕이고, 태종무열왕 즉 김춘추 이후는 진골의 왕이라는 말이다. 이런 기록을 보다 보면, 김춘추가 골품의 벽을 허무는 데에 뭔가 선구적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골 출신의 최초 국왕이라는 것과 골품타파의 최초 주창자라는 것은 개념상 명확히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진골 출신으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른 사람과 골품타파를 최초로 제창한 사람이 서로 같으리란 법은 없기 때문이다.
김춘추 이전에 상당히 허물어져 있었던 골품제실제로, 필사본 <화랑세기>를 살펴보면, 김춘추 이전에 골품의 벽이 이미 상당히 허물어져 있었다는 사실에 접하게 된다. 그것도 김춘추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그 같은 변화가 명확히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화랑세기> 제13세 풍월주 김용춘 편에서는, 폐주 진지왕(재위 576~579년)의 차남인 용춘이 진평왕(재위 579~632년)과 함께 대(對)고구려 전쟁에 참가한 603년경에, 진평왕이 용춘의 형인 용수를 후계자로 결정했다고 알려주고 있다. 603년이면 김춘추가 출생하기 1년 전이었다.
아들이 없는 탓에 아직 후계자를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602년과 603년에 각각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을 연달아 받은 진평왕으로서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후계자를 지정해둘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평왕이 장녀인 천명공주와 사촌인 용수의 혼인을 강행한 것은 용수를 후계자로 지정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런데 용수는, <화랑세기>에 따르면, 춘추의 아버지였다. 그 역시 성골이 아니었던 것이다. 춘추가 출생하기 이전에 진평왕은 비록 한때나마 비(非)성골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용수가 후계자로 지정될 당시에 비(非)성골이 왕이 되는 것에 대한 정치적 반발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진골인 용수가 후계자로 결정되는 과정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용수의 후계자 지정과 관련된 세 사람의 태도 혹은 반응 속에서 그 같은 분위기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성골 이외 사람에게도 열려 있던 '국왕의 문'첫째, 진평왕의 태도. 용수를 후계자로 지정할 때에 그는 성골이니 진골이니 하는 관념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가 용수를 후계자로 지정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단지 "적자가 없다"는 사유뿐이었다.
둘째, 마야왕비의 태도. 용수와 천명의 혼인을 적극 주선한 인물은 마야왕비였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성골이니 진골이니 하는 관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자기 딸이 용수를 좋아한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오해였다. 어쨌든, 용수가 후계자로 지정되는 데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마야왕비는 용수의 신분에 대해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셋째, 용춘의 반응. 진평왕이 용수를 후계자로 결정하자, 이를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 바로 용수의 동생인 용춘이었다. 그런데 용춘이 반대한 이유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는 결코 "형님, 주제 파악 좀 하세요!" 혹은 "형님은 성골이 아니잖아요?"라고 말하지 말았다.
그가 내세운 반대 사유는 진평왕이 아직 젊다는 것이었다. 왕이 젊은 상태에서 후계자가 세워지면 불행한 사태가 생길 수 있다는 게 용춘의 반대 사유였다. 자기 형이 혹시라도 아버지 진지왕처럼 불행한 전철을 밟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상당히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용춘이 용수의 후계자 지정에 반대한 것은 결코 용수의 골품 때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시 신라 국정의 한 가운데에 있었던 세 사람의 태도 혹은 반응을 놓고 보면, 성골이 아닌 인물이 후계자로 지정되는 것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성골이 최고의 신분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성골 아닌 사람은 왕이 될 수 없다는 관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적어도 603년경에는 신라 국왕의 입후보 요건에 '반드시 성골이어야 함'이라는 사항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미 그 이전에 국왕의 문이 성골 이외의 사람들에게도 열려 있었던 것이다.
박씨·석씨·김씨에게도 왕위를 물려줬던 신라
위와 같이 김춘추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비(非)성골에게도 왕의 길이 열려 있었다는 사실은, 김춘추를 골품타파의 선구자로 볼 여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는 "골품제는 천박하고 야만적인 제도"라는 김춘추의 발언이 신라 사회에 일파만파의 충격을 안겨주었지만, 실제의 신라인들은 김춘추가 출생하기 이전에 이미 골품제에 대해 열린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 진·한 교체기 때의 농민반란군 지도자인 진승·오광과 고려 때의 노비해방 운동가인 만적은 "왕후장상에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라는 혁명적 발언으로 군중의 심장에 불을 확 질렀다. '누구든 왕이 될 수 있다'는 그들의 발언에는 못 미치겠지만, 신라에서는 왕이 될 수 있는 문이 비교적 넓은 편이었다. 박씨·석씨·김씨에게 왕위가 돌아간 것만 보아도 그러하다. 고려나 조선 같았으면, 박씨인 제3대 유리왕에서 석씨인 제4대 탈해왕으로 왕권이 넘어가는 순간 역성혁명을 운운했을 것이다.
달리 생각하면 어느 일가가 왕권을 독점할 수 없을 만큼 신라의 왕권이 취약했다는 증표가 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바로 그 '절대왕권의 부재'라는 이유 때문에 신라 왕의 길이 비교적 넓게 개방될 수 있었던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진골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캐치프레이즈를 표방하고 있는 김춘추에게 '골품타파의 선구자'라는 영예를 부여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기록을 통해 나타난 정황은 드라마 내용과는 사뭇 다르다. 성골이 아니라도 왕이 될 수 있다는 관념이 이미 힘을 얻은 뒤에 김춘추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신라에서는 본래부터 여러 성씨가 번갈아가며 왕위를 차지한 경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김춘추가 출생하기 이전에도 이미 비(非)성골의 남자가 왕위후계자로 결정된 사례가 있으니, '골품타파 노벨상'을 부여하려면 아무래도 김춘추 이전의 인물들 속에서 후보를 물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래서 김춘추에게 수여된 '골품타파 노벨상'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지울 길이 없다. 별다른 공헌이 없는 인물에게 '노벨상'이 돌아갔기 때문이다. 수상자를 잘못 결정하면 뒷말이 많을 수밖에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