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기 전에 올라가야 할 험난한 산길
출근길에 한라산을 바라보니 온 산이 하얗다. 밤새 눈이 내린 모양이다. 이틀 전 저 산은 낙엽 떨어지는 소리로 요란했었다.
그동안 한라산을 수없이 올랐건만 관음사코스를 통해 동능 정상을 시도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더 늙기 전에 올라봐야지!'하는 마음은 늘 숙제였다. 그것은 한라산 정상으로 통하는 길 중에 관음사코스는 험난한 길이라서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10월 31일, 한라산 관음사휴게소에서 탐라계곡까지는 빨간 단풍 이파리가 길을 열었다. 계곡이 깊고 산세가 웅장해서 단풍이 예쁜 것일까. 등반로는 빨간 카펫을 깔아 놓은 것 같았다.
경사가 심한 개미등 등반로는 화산섬 돌계단이었다. 땀이 후줄근 흘러 내렸다. 이쯤해서 겉옷을 하나 벗고 오르기 시작했다. 개미등처럼 굽어진 등산로는 인내를 가지고 걸어야만 했다.
안개비 맞으며 개미등 올라
개미등을 벗어나니 해발 1500m 삼각봉, 새롭게 단장한 삼각봉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산에서 만나는 안개는 달갑지 않다. 구름이 걷히기를 고대 했지만, 그 기대심리도 허사, 짙은 안개와 안개비에 온몸이 젖었다.
말로만 듣던 용진각 계곡, 이날따라 짙은 안개는 심술을 부렸다. 안개속에서도 유독 식별이 가능한 것은 태풍 나리의 흔적이 산의 흉터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용진각 계곡의 약수는 3시간 30분 이상을 걸어온 등반객들에게 목을 축여주는 생명수였다. 그 생명수는 계곡 어디선가에서 콸-콸- 흐르고 있었다.
현수교는 구름 타는 다리
용진각 계곡에서 또 하나의 명소는 현수교. 해발 1560m에 설치한 용진각 현수교는 태풍 나리의 흔적을 딛고 새롭게 탄생한 구름다리다. 길이가 52.4m 정도로 그리 긴 다리는 아니지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흔들리는 맛을 체험할 수 있는 등반로였다. 구름다리를 타고 건너는 묘미는 말 그대로 구름을 타는 기분. 다만 그곳에서 왕관능을 조망할 수 없음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한라산 관음사코스 중 가장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곳은 왕관릉. 하지만 왕관능은 그림자 조차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안개와 바람만 세차게 불어 올 뿐.
"네 발로 기어올라 가야 한다구요?"
안개가 쇼를 부렸다. 왕관을 쓴 바위가 희미하게 나타나더니 다시 사라졌다. 기교를 부리는 안개쇼는 아쉬움만 남겼다. 그래서 한라산을 두고 신령의 산이라 부르는가 보다.
왕관능에서부터 동능 정상까지는 험난했다. 이 길을 두고 어떤이는 네발로 기어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때문에 산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는 코스였다.
하지만 '네발로 기어 올라가야 한다'던 등반로는 조금 가파른 산일 뿐이었다. 가파르기 때문에 땀을 흘릴 수 있고, 가파르기 때문에 느리게 걸을 수 있고, 가파르기 때문에 겸손해질수 있는 것이 바로 산세의 웅장함이 아닌가 싶었다. 아니, 산이 주는 교훈이랄까. 8.7km 관음사코스 등반로의 매력이었다.
안개와 비바람... 환호성 지르다
더욱이 1700고지 이상부터 이어지는 구상나무 등반로는 차분한 산책로였다. 교만한 사람에게는 온유를 가르치는 길이었다고나 할까. 더욱이 바람까지 막아주는 구상나무는 등반로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정상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그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안개를 생각해 보았을까? 백록담 분화구에서는 태풍 같은 바람이 불어왔다,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짙은 안개가 백록담을 휘감고 있었으니 흡사 동트기 전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백록담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날아갈것만 같은 세찬 안개와 비바람에도 백록담을 보겠다고 고개를 내밀었다. 백록담은 그저 하얀 구름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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