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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추운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이 맘 때면 누구보다 몸과 마음이 시린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홀로 지내는 어르신들입니다. 이 분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과 몸 누일 방도 필요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이야기 나눌 사람입니다. 긴 세월 이어온 그 분들 생엔 한 시대가 고스란히 스며 있습니다.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과 함께 그 분들을 찾아나섭니다.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흰칼라가 달린 유니폼을 입고 화장품 가방을 어깨에 메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흰칼라가 달린 유니폼을 입고 화장품 가방을 어깨에 메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 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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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4월 3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해. 내가 처음으로 제복을 입고 화장품 가방을 어깨에 메던 날이었거든. 이젠 살았구나 했지. 이것만 열심히 하면 애들하고 먹고 살 건 나오겠구나..."

붉게 충혈되었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진다. 30년도 더 지난 일인데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고 슬픔이 북받친다는 강삼순(72·호적상 1939년, 실제 1938년생) 할머니. 요즘도 지나온 날들을 떠올릴 때마다 알지 못하는 서러움이 밀어닥쳐 한참을 울다가 잠이 든다.

"고향은 강원도 충성군 사북면이에요. 내 나이 열다섯에 6·25가 터졌지만 우리 동네는 이미 6·25 몇 년 전부터도 전쟁이나 마찬가지였어. 하루 종일 총격소리가 그치지 않을 때도 있었으니까. 북쪽에서 '드르르르' 총을 쏘면 남쪽에서 '드륵드륵' 총을 쏘고, 하루하루 난리가 날 것처럼 불안했거든."

한국동란이 일어나기 3년 전. 할머니의 부모님들은 가족을 이끌고 고향 사북면을 떠났다.  마을 근처에서 남과 북의 크고 작은 교전이 끊이지 않았던 터라 터전을 일굴 수 없었던 대부분의 주민들이 고향을 떠나던 때였다.

"아버님과 가평으로 이주해서 친척의 농사를 도와주며 살았지. 전쟁이 끝나고도 얼마간을 가평에서 살다가 스물둘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니 전쟁의 충격이 가시지 않아 폐허만 남은 거야. 우리 마을엔 국방군의 탄약고가 설치되어 있더라구. 파견부대가 나와 탄약고를 지키고 있었고. 마을엔 온통 군인들이 천지였는데 어디서 아가씨가 하나 뜨니 난리도 아니었지. 난 부끄러워서 밖에 나가지도 못했어."

전쟁 통에 혼기가 늦어진 할머니는 이웃의 소개로 스물셋에 마을에 주둔 중이었던 직업군인과 결혼을 한다. 군인가족이 되어 편안한 결혼 생활이 될 거라 예상을 했지만 운명은 가혹했다. 남편이 누군가의 모함으로 결혼 몇 달 만에 불명예 전역을 하게 된 것이다.

"남편과 시댁이 있는 포천으로 내려와 종중 땅을 붙여 먹고 살다가 철원으로 들어가게 됐어. 아는 사람이 철원에서 당구장을 하는데 당구장 관리를 맡겼거든. 당구장을 몇 년 했는데 5·16이 터진 거야. 갑자기 당구장 영업을 못하게 하더라구. 주인이 문을 닫고 떠나버리니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했지."

당구장에서 월급을 받던 남편은 실직을 하게 되었고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해지자 손수레를 구해 산에 올랐다. 산에서 땔감나무나 구들장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돌들을 실어오고 그것을 팔아서 생활을 했던 것이다.

딸의 초등학교 졸업식.
 딸의 초등학교 졸업식.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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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임신 중이었거든. 잔뜩 부른 배를 안고 남편을 도와 나무도 하고 돌도 나르고 했는데 무리가 됐는지 그만 8개월 만에 조산을 한 거야. 아이도 잃고... 산후조리를 전혀 못했어. 그땐 어려서 산후조리가 뭔지도 몰랐고. 한 달 만에 일어나 남편과 일을 나갔지. 그 춥다는 철원에, 그때가 2월이었는데... 얼마나 추웠는지 몰라. 언 손을 불어가며 구들장 돌을 들어 나르고 나무도 끌어오고. 그러다가 산후병으로 지독하게 앓아누웠지."

그 후 할머니는 급속하게 몸이 쇠약해져 내리 세 번의 유산을 경험한다.

"큰딸을 서른 하나에 낳았어. 건강하게 낳아서 얼마나 좋았는지. 그땐 산후조리를 해달라고 친정어머니를 불렀어. 그런데 애 낳고 일주일 만에 아버지가 어머니를 데리러 온 거야. 더 큰일이 생겼다고 어머니를 데려가시는데 정말 서운하더라구."

딸을 낳고 세 살 터울로 첫 아들을 얻었다. 그리고 연년생으로 막내아들이 태어났다. 막내가 들어선 것을 알고는 키울 수 없을 정도의 가난 때문에 지우려고 했지만 차마 어린 생명에 모진 짓을 할 수 없었다는 할머니.

"너무나 가난해서...(눈물) 뭐 먹은 게 있어야 젖이 나오지. 우리 막내. 그게 제일 불쌍해.  아무리 빨아도 젖이 말라 나와야 말이지. 애는 배 고프다고 울고 젖은 안 나오고. 이웃 아줌마가 이유식을 한 통 가져다주더라구. 그래서 갓난아기에게 그걸 먹였지. 그거라도 먹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막내 아들이야기에 할머니는 참았던 눈물을 쏟으신다.

"막내 17개월에 애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애들 데리고 어떻게 사나 하는 걱정에 눈물도 나오지 않더라구. 두 살, 세 살, 여섯 살...  세 아이를 데리고 이를 악물고 살았어. 걸음마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막내를 들쳐업고 논에 나가 일을 했지. 일하는 동안 논두렁 사이에 풀어 놓으면 얼굴이고 몸이고 온통 흙투성이가 되어가지고 울기는 또 어찌나 우는지... 그렇게 울던 아이 얼굴이 지금도 선해. 잘 먹이고 입히고 키우지 못해 그게 늘 미안하고..."

남편과 사별한 후 세 아이를 데리고 살면서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남편이 남편과 살던 시골집과 논 두 마지기 반이 전부였어. 농사는 짓지만 당장 돈이 귀하니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했지. 그래서 삯빨래를 했어. 그 겨울에 담요를 빠는데 나중엔 펌푸 물이 말라 물도 나오지 않더라구. 얼마나 크고 무겁던지... 그거 빨고 병이 나서 봄까지 앓아누웠어."

남편이 부엌에 만들어 준 펌프. 그 덕에 삯빨래로 생계를 이을 수 있었다.
 남편이 부엌에 만들어 준 펌프. 그 덕에 삯빨래로 생계를 이을 수 있었다.
ⓒ 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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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가난해 먹고 사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시절. 남의 배추밭에서 버려지는 언 배추를 뽑아다 손을 호호 불어가며 김장을 담아먹었고 아이들 옷은 낡은 털실을 재생해서 짜 입혔다.

"털옷이 오래 입으면 양쪽 팔꿈치가 헤지거든. 그러면 팔을 풀어서 배쪽이 되게 짜고, 배가 되었던 부분은 팔로 짜서 입히고, 그것도 여러 번 하다보면 실도 닳아 털도 다 빠지고 가늘어져. 그러면 그런 것들을 모아 섞어서 짜 입히고... 어떻게 살았나 몰라. 우리 애들 정말 불쌍하게 컸어."

그러다가 할머니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 지인의 소개로 당시 기혼 여성들의 직업으로는 알아주던 화장품 외판원이 된 것이다.

"그 언니가 날 보고 화장품 외판원을 해보지 않겠냐는 거야. 당장 따라 나섰지. 처음엔 차비도 없어서 누가 가는 길이 아니면 갈 수도 없었는데... 철원에 나가니 대리점에서 세금 낸 증명을 가져 오라는 거야. 뭐가 있어야 세금을 내지. 그런데 잘 아는 분이 대신 그 증명을 해 주시더라구. 지금으로 말하자면 보증을 서 준 거지."

그렇게 해서 화장품 가방을 어깨에 처음 멘 날이 1976년 4월 3일. 흰칼라가 달린 외판원 복장을 입고 화장품이 가득 든 가방을 양어깨에 메니 묵직한 가방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날아 갈 듯했다. 더 이상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희망에 가슴이 뛰었다.

"철원에 군부대가 있어서 군인가족들도 많이 살잖아. 다른 농촌하곤 다르지. 군부대가 있다보니 유흥업소도 많고. 골목골목 열심히 걸어 다녔지. 여자 일 치고는 좋은 일이야. 누가 장사하는 사람을 자기네 안방에 들이고 그래. 화장품 아줌마들은 안방에 들어가 차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고 즐겁게 장사를 하는 편이거든. 화장품 장사 13년 해서 아이들 학교 보내고 공부시켰네."

그래도 화장품 장사 할 때가 가장 좋았다는 할머니. 세 아이가 혹시라도 누구에게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더 깨끗이 입히고 더 곱게 차려 내 보냈단다.

"동네 아줌마들이 나한테 '그 집 빨래 줄이 자꾸만 달라지네' 그러는 거야. 빨아 널은 애들 옷이 점점 좋아진다는 거지. 아무래도 돈을 버니 애들 옷도 사 입히고 그랬지. 나야 유니폼을 입으니 그거 하나면 되지만 애들은 잘 입히고 싶었거든."

남편 없이 세 아이를 키웠지만 늘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려 했던 할머니는 아이들 공부뒷바라지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남들은 딸을 중학교 마치고 서울로 보내 돈을 벌어오게 한다면서 자랑들도 했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어. 딸이 농과를 갈까 그러는데 그냥 인문계를 가라고 했지. 그리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주산이랑 부기를 가르쳤어. 공부도 잘하고 인물도 좋고, 그래서 고3에 벌써 농협에 취직이 된 거야."

"화장품을 팔러 나가는데 아는 분이 버스 안에서 그러는 거야. '내가 지금 듣고 오는 길인데 그 집 딸 농협에 합격했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너무 좋아서 사람들도 아랑곳 하지 않고 '와아~' 하면서 큰 소리를 질렀네. 얼마나 좋은지 세상이 다 내 것 같더라구."

힘들게 키워온 아이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갈 때의 보람을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 그렇게 자녀들이 자라고 저마다 자리를 잡아가는 듯 보여 철원생활을 접고 자식들이 살고 있는 서울로 올라온 할머니. 그러나 서울생활은 철원보다 더 녹록치 않았다.

외로움이 목까지 차 올라 우울증이 되었다는 강삼순할머니
 외로움이 목까지 차 올라 우울증이 되었다는 강삼순할머니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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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서울 광진구로 이사를 왔어. 애들이 다 서울에 사니 나 혼자 철원에 있고 싶지 않았거든. 서울에 얼마나 살았을까 큰 아들이 사업을 하다 크게 빚을 진 거야. 신용불량자가 되더니 그만 해외로 도피를 해버리고. 막내아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민을 가고. 이쪽(서대문구 북가좌동)에 딸이 살고 있어서 2년전에 이사를 오긴 했는데 딸도 형편이 좋지 않아 엄마라고 짐만 되네."

이민 간 막내아들이 할머니가 살고 있는 전셋방 대출 이자를 부담해주고 있고, 딸에게 매달 용돈 10만 원을 받고 있지만 다른 수입이라고는 국민연금 9만3천 원이 전부라 병원비를 충당하기도 빠듯한 할머니 살림살이다. 그러나 할머니에게 고통스러운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이 아니란다. 수시로 찾아오는 외로움이 물질적 어려움보다 육체적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는 것.

"가슴에 슬픔이 맺히다, 맺히다 우울증이 왔나봐.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어. 화장품 아줌마 하면서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메고 걸어 다니다 보니 관절이 왔나봐.  다리도 얼마나 쑤시고 아픈지... 잠도 오지 않고 몸도 아프고 그럴 때면 애들이 더 그리워. 그래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들 이름을 크게 불러 본다고...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그러면서 말이야."

워낙 소심한 성격 탓에 쉽게 남들 앞에 나서지도 못하며 사람을 쉽게 사귀지도 못한다는 할머니. 그러다보니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의기소침해 지며 과거 지나온 시간들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는 시간이 많다. 사시던 곳 철원으로 다시 들어가시면 친구들도 있고 하니 서울보다는 좋지 않겠느냐고 물어보니 고개를 저으신다.

"난 그 추운 동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철원에서 애들 아버지 잃고 죽도록 고생하고 물론 화장품장사하면서 애들 키우던 시절도 있었지만 나에게 철원은 춥고, 슬프고, 아픈 기억만 남아있는 곳이거든. 철원은 얼마나 춥고 얼마나 슬픈 동네인지 몰라..."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힘들어 하시던 할머니가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 깊은 곳에 담아 두었던 아픈 이야기를 털어 내신다. 혼자 참고 견디며 끝내는 가슴에 응어리가 되어버린 이야기들. 어쩌면 누군가에게 이렇게 털어놓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외로워하는 할머니와 밤늦도록 이야기 친구가 되어 주고 싶은 날이었다. 

강삼순 할머니는?
북가좌동 반 지하 방에 전세로 살고 계시며 매월 노인연금과 딸에게 받는 용돈 10만원으로 생활. 건강이 좋지 않아 공공근로를 하기에 어려움이 있음. 이사 온지 몇 년 되지 않았고 성격도 활달하지 못해 친구가 없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우울증이 깊어지고 있어 이야기를 나누어 줄 친구가 필요하다고 함

덧붙이는 글 | * 어르신들 친구가 돼 주세요.

이 글을 읽고 어르신들에게 답글을 보내주세요.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60-1, 02-324-0455)으로 편지나 이메일을 보내주시면 어르신들에게 전해드리겠습니다. 한 끼 식사보다, 하루 잠자리보다 더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더불어 우양에도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태그:#강삼순할머니, #독거노인, #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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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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