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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여인들은 물레질하면서 졸음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소리'를 했다. 속으로 혼자 웅얼거리는 듯 부르는 소리로, 힘든 시집살이를 견뎌냈다.
옛 여인들은 물레질하면서 졸음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소리'를 했다. 속으로 혼자 웅얼거리는 듯 부르는 소리로, 힘든 시집살이를 견뎌냈다. ⓒ 하주성

"요즘 여자들 예쁘기는 엄청 예쁘지. 그러나 속멋은 몰라."
"어르신, 속멋은 무엇입니까?"

"속멋이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아름다움이지."

여행길에서 만난 어느 어르신과의 대화다. 어르신의 말씀인즉슨 이렇다. 겉으로 화려하게 치장을 한다고 해서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그저 예쁘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서 예쁜 것과는 관계가 없단다.

은근짜들의 명가수 우리네 할머니들

 누에에서 실을 뽑아 내고 있다. 부녀자들은 온종일 쉴 틈이 없었다.
누에에서 실을 뽑아 내고 있다. 부녀자들은 온종일 쉴 틈이 없었다. ⓒ 하주성
예전에 우리 할머니들은 은근한 사랑을 많이 즐겼다. 지금처럼 내놓고 애인이라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은근히 흠모하는 남정네를 하나 만들어 놓고 마음속에서 그 남정네와 늘 사랑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힘든 시집살이도 어려운 줄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은근짜'들이 많았던 것이 지난 세월의 할머니들이라는 것이다.

오로롱 조로롱 잦는 물레
쉬지 않고 잘도나 돌아간다
뒤 창문에 붙으신 청개구리
방안에 독한 독새 앉았으니

여인네들이 물레질을 하면서 하는 소리다. 물레타령은 만정 김소희 선생의 물레타령이 워낙 유명하여 모두 그런 소리로 알겠지만, 여인네들이 하는 물레소리는 수많은 소리가 전한다. 이런 물레소리가 많은 까닭은, 창자(唱者) 누구나 다 자신만의 소리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 사설에서 보이듯 '뒤 창문에 붙은 청개구리'는 연인을 뜻한다. 밤에 몰래 연인이 집으로 찾아와 창문 밖에서 신호라도 할 심산이다. 그런데 문제는 서방님이 방안에 계시다. '방안에 독한 독새(독사)'는 바로 서방님이다. 서방님이 계시니 걸리면 경을 친다는 소리다.

참으로 은근하다.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그 숱한 고생을 참고 견디는 힘이 되었다. 부녀자들의 소리는 은근히 세상을 비판하고 힘든 시집살이를 풍자한다. 그 안에 참으로 깊은 멋이 숨어 있다.

성님성님 사촌성님 시집살이 어떱디까
동생동생 말도마라 시집살이 개집살이
시집살이 삼년만에 삼단같은 머리채는
짚덤불이 되었구나 곱디고은 내손일랑
두껍잔등 되었구나

흔히 들을 수 있었던 시집살이 노래다. 그러나 이 사설을 음미하면 그 또한 대단하다. '시집살이는 개집살이'라고 표현을 할 수 있는 두둑한 배짱이 있었다. 그리고 삼단 같은 머리채가 짚덤불처럼 변하고 고운 손이 두껍잔등처럼 갈라지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힘든 시집살이를 그렇게 비유하면서 은근히 시집을 비방한다. 혼자서 입 속으로 웅얼거리듯 불렀으니 누가 알아듣지도 못했을 것이다.

요즘도 속멋이 있을까?

 베를 짜거나 밭일을 하거나 언제나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가 삶의 원동력이다.
베를 짜거나 밭일을 하거나 언제나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가 삶의 원동력이다. ⓒ 하주성

이렇게 예전 여인네들은 '은근짜'였다. 지금처럼 내놓고 노래방에 가서 흔들고 뛰며 노래를 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하루 종일 일만 하다가 밤이 되면 또 물레질을 하고 베를 짜야 했던 것이 우리네 여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하면서도 속으로 부르는 이 속절없는 소리가 삶의 활력소 노릇을 했던 것이다.   

이런 속멋을 알기 때문에 그 숱한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우리의 옛 할머니들. 지금의 여인들이 과연 그러한 속멋을 알 수 있을까?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도 바뀌고 사람들의 사고도 바뀌었다. 요즘은 개성들이 강해 자신을 들어내 놓는다. 그것이 멋이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그런 것을 멋이라고 생각하는 사고 때문에 세상이 황폐화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속보다 겉에 치중하는 요즘 세태가 걱정스러운 것도, 매일 TV를 통해 전달되는 '막장' 드라마도 어찌 보면 은근짜들의 멋을 잃었기 때문은 아닐까.

겉을 치장하기 보다는 속으로 멋을 부릴 줄 아는 지난 세월, 그리고 그 힘든 고통 속에서도 언제나 소리를 잊지 않았던 우리네의 할머니들. 그런 진정한 속멋을 다시 찾았으면 하는 되지못할 욕심을 내본다.


#옛소리#세태풍자#멋#여인#시집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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