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은 출구가 하나밖에 없다. 하나의 출구는 육교와 바로 맞닿아 있다. 꽤 오래된 것인지 육교 위를 건널 때 보이지 않는 흔들거림이 온몸으로 느껴져 묘하게 아찔하다. 공무원 수험생 박지민(24·휴학생)씨가 전해준 말대로 노량진의 공기는 회색빛이 감돌았다. 노량진은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수많은 수험생들이 운집하는 그들의 삶의 터전이다. 그런데 수많은 빛깔 중 이곳 노량진은 왜 유독 회색빛을 띤다는 걸까.
300명이 한 교실... 자리 잡는 것부터 전쟁박지민씨는 발걸음을 재촉해 육교를 건너 수많은 학원 건물들 중 E학원으로 들어갔다. 수업은 오후 2시. 하지만 보통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일찍 도착해야 한다. 300명 정도의 인원이 한 교실에서 함께 수업을 듣기 때문에 앞자리에 앉아야만 충실히 수업을 들을 수 있다. 조금 늦어 강의실 뒤쪽에 앉게 되는 날이면 설치된 화면을 통해 강사의 얼굴을 보며 설명을 들어야 한다. 마치 라이브 콘서트에 와서 TV로 가수를 구경하는 느낌이 든다.
오늘은 다행히 한 시간 반 정도 일찍 도착했다. 지민씨는 부랴부랴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알 수 없는 숫자를 하나 적고는 강의실 문 앞에 쭉 늘어뜨려진 다른 노트들 뒤에 자신의 것을 추가했다. 노트들은 15, 16 같은 숫자로 제 주인들을 대신해서 줄을 섰다. 지민씨는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조금 더 늦게 도착했다면 직접 30분 넘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매번 좁은 복도에서의 기다림은 꽤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공부하기에도 고단한 공무원 수험생들은 제 돈 주고 듣는 수업에서도 매일 앞자리를 위한 경쟁을 치러야 한다. 300명이 한 강의실이라니, 학원만 좋겠다.
하루에 천여명의 수험생들이 오고가기에는 학원의 계단과 복도가 꽤 좁다. 건물에 엘리베이터도 없기 때문에 수업시간 전후로는 학생들이 빽빽하게 줄을 서서 계단을 오르내린다. 사람들은 복도에서 양치질도 하고, 간단하게 식사를 하기도 하고, 책을 보며 공부도 한다. 복도에 있는 사물함 안에는 여러 책들과 세면도구·시계·간식 등 자신만의 살림살이가 들어 있다. 사물함은 수험생들의 조그만 집이나 다름이 없다.
공무원 수험생들의 필수품은 '츄리닝', '쓰레빠' 등 편안한 복장, 방석 그리고 초시계다. 모두 근처 문구점 앞에 진열되어 있는 노량진의 베스트셀러들이다. 초시계는 하루 동안의 공부량을 체크하기 위해 사용된다. 공무원 시험은 0.1점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기 때문에 합격은 어느 정도의 운 또한 따라주어야 한다고들 하지만 하루에 6~8시간 이상은 공부 해야만 합격할 수 있다고 다들 믿고 있다.
자리를 노트로 맡아 놓고는 마음이 놓인 지민씨는 이제 무엇으로 자신의 허기를 달랠 것인지 생각했다. 학원 앞에는 다행히도 수험생들이 간단하게나마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싼 가격의 길거리 음식들이 많다. 근처에 고시식당이 있긴 하지만 지민씨는 혼자서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 일보다 길거리 주먹밥, 김밥, 꼬치 등으로 배를 채우는 게 더 편안하다. 수업 전후로 고시식당 안은 발 디딜 틈 없이 복잡한 곳이라 불편하다.
지민씨처럼 노량진 수험생들은 혼자서 생활하는 것에 익숙하다. 학원 앞에는 수험생들이 서서 담배를 피거나 휴식을 취하는데, 그 모습이 '노량진스럽다'. 넓은 8차선 도로 옆 학원 앞에서 비슷한 모습을 하고, 같은 꿈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거나 서있다.
이들은 모두 노량진 이곳에 머물거나 스친다. 사람들은 분명 동질적인 집단으로 한 곳에 모여 있지만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모두 제각각이다. 그들의 시선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이유는 이곳이 잠깐만 머무를수록 좋은 곳이기 때문일까.
뒷골목에서는 '철권' 고수들의 조우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빡빡한 일정을 혼자 해결해야 하는 외로운 일상 속에서 수험생들을 어떻게 스트레스를 풀까. 노량진에는 PC방·만화방 등 저마다 혼자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장소가 많이 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운 곳은 바로 오락실. 이곳의 오락실이 다른 동네의 여느 오락실과 다른 점은 대부분의 오락기계들이 '철권'이라는 것이다. 최신식 첨단 오락기계들은 오히려 이곳에선 천대 받는다.
"노량진에는 철권의 고수들이 많아요." 지민씨는 웃으면서 말한다. '철권'은 노량진 오락실의 주류오락이다. 자리를 하나씩 꿰차고 앉은 수험생들은 진지하게 모니터 안의 적들을 물리치고 있었다.
"철권 고수들은 200원에 한두 시간은 거뜬히 버텨내면서 주위의 구경꾼들을 모으죠." 정말 고수의 등 뒤로는 그 경이로운 실력을 염탐하는 듯 구경꾼들의 시선이 배회했다. 고수들의 실력을 말해주는 듯 몇몇 철권기계들은 인터넷으로 그들의 게임이 중계되도록 하는 시스템까지 갖추고 있다고 한다.
철권 실력이 높아질수록 시험점수도 더불어 올라가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일까. 둘의 상관관계는 차지하고서라도, 노량진에 철권의 고수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다는 사실은 수험생들의 꾸준한 수련(?)이 이뤄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노량진에서 가장 활기가 넘치는 오락실은 수험생들에게 고단하고 지루한 일상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위안이 된다.
지민씨는 작년 1년 동안 노량진에서 수업을 들었다. 그러다 노량진의 무거운 회색빛 공기가 갑갑하여 휴학 중인 학교에서 혼자 공부하기도 했다.
"노량진 사람들은 다들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요. 대학 입시 때보다 더 치열하죠. 그런데 학원가 분위기도, 사람들 표정도, 뭔가 축 가라앉아 있어요. 사람들의 열정과 치열함이 자신의 책으로만 향해 있다고 할까요. 다른 곳에 있다가 노량진에 오면 정말 다른 세상 같이 느껴져요. 그런 노량진이 지겨웠어요. 내 기분도 같이 다운되는 것 같았어요."그렇게도 노량진의 공기가 싫었던 지민씨는 얼마 전부터 다시 노량진 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강의를 인터넷 동영상으로 수강할 수 있는데도 굳이 노량진으로 향하는 이유는 뭘까.
"물론 노량진의 분위기가 유쾌하진 않지만 공부에는 분명 도움이 되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노량진에서 공부하는 걸 거예요. 저도 그렇고, 오랜 시간 공부하다보면 마음이 해이해지기 쉽거든요. 외롭기도 하구요. 노량진에 와서도 혼자 생활하지만, 같은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동질감이 느껴져서 외로움이 덜해요. 서로 말을 섞지 않는데도 말이죠. 그리고 사람들이 치열하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자극을 많이 받아요."이렇게 갑갑한 노량진 생활을 감내해야함에도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열망된다. 그 치열한 경쟁률 때문에 '가문의 영광'으로까지 여겨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사회에서는 공무원만이 안정적 삶을 보장 받는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의 10% 아니, 5%만이 결국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게 되는 현실에도 공무원이 만인의 꿈인 이유는 극심한 취업난과 더불어 다른 직장들이 가져다주는 불안함때문이다. 공무원 시험의 경쟁률이 올라간다는 것, 이곳 노량진의 유동인구가 더 늘어난다는 것은 사회전반의 고용과 복지의 불안정성을 나타낸다.
모두가 흔들리는 육교를 건너갈 수 없다"지옥이지만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하는 곳이에요."
자신에게 노량진은 어떠한 의미냐는 질문에 대한 지민씨의 대답이다. 이처럼 노량진은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지옥'이다. 동시에 '희망'이다.
하지만 이것이 단지 '노량진'만의 성격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수많은 취업준비생들은 모두 '자신만의 노량진'에서 살고 있으며, 안정적인 삶이 보장되지 않는 안개 낀 '취업을 향한 길'을 걷고 있다.
끊임없이 스펙을 쌓고 시험점수를 올려야 하는 상황에서, 그 스트레스를 혼자 스스로 풀어내야만 하는 다양한 모습의 '철권의 고수'들이 되어 가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머물지만 사람의 마음이 머물지는 않는 곳. 노량진이 회색빛을 띠는 이유는 노량진을 향하는, 안정적 삶을 위해 오늘의 불안정을 극복해야 하는 수험생 모두의 마음의 빛이 아닐까.
노량진역의 하나밖에 없는 출구와 연결된 육교는 길이 하나라서 지나갈 수밖에 없지만, 계속 흔들려서 건너는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다른 출구를 만들어야 하고 오래된 육교는 보수공사가 필요하다.
공무원만이 안정적 고용의 보장이 되어버린 우리사회의 흔들리는 고용 현실 또한 보수공사가 필요하다. 흔들리는 육교를 건너가는 건 개인의 몫이 되지만 사회적인 시각으로 문제에 접근하면 육교를 새로 튼튼하게 만들 수 있다. 모두가 노량진의 흔들리는 육교를 건너서 공무원이 될 수는 없다. 시험에 합격하지 못할 95%의 사람들 또한 건너갈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육교와 여러 가지 다양한 출구들이 우리에게 절실하다.
덧붙이는 글 | 제4회 전국대학생기자상공모전 응모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