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는 상황이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연출되었다. 창세기에 기록된 노아의 이야기를 소재로 예수는 마태복음에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11월 30일 방영된 <선덕여왕> 제55부에 나타난 신라 대신들의 모습도 그러하였다. 그들은 "백제가 이삼일 내로 대야성(경남 합천)을 침공할 것"이라는 김유신의 경고를 무시한 채 그를 죽이기 위한 정쟁에만 혈안이 되었다.
감옥 아니 '방주'에 갇혀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유신의 심정은 그저 애타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비담을 비롯한 신라 대신들이 보기에 유신은 '노아'가 아니라 '양치기 소년'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나 유신은 결코 '양치기 소년'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유신의 말대로 윤충이 이끄는 백제군이 결국 대야성을 기습하여 신라군을 대파했고 이에 따라 신라가 '대홍수'의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대야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라며 '노아'의 경고를 무시하던 신라인들의 후회는 이미 때늦은 것이 되고 말았다.
<선덕여왕> 제55부에 방영된 대야성 전투는 한국 고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로 인해 백제-신라 접경의 요충지인 대야성이 백제로 넘어갔다는 점에서 보면, 이 전투는 백제의 위대한 승리로 기념될 만한 사건이었다.
신라에 '잽'만 먹이고 '강펀치'는 못 날린 백제한편, 대야성 전투 이후의 위기국면을 계기로 김춘추-김유신 콤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고 이 콤비가 결국에는 백제 멸망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보면, 이 전투는 신라의 분발을 자극한 사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야성 전투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고구려·백제·신라가 상호 항쟁하던 시대의 한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대야성 전투의 의미를 좀 더 폭넓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선덕여왕> 제55부가 놓친 이 전투의 2가지 측면을 소개하기로 한다.
첫째, 대야성 전투는 백제-신라 관계사의 측면에서 볼 때에 '백제의 새로운 활력'을 반영하는 사건이었다. 그 활력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백제-신라 관계가 '전쟁 모드'로 전환된 무왕 3년(602)부터 무왕이 죽은 무왕 42년(641)까지의 40년 동안 백제는 신라를 총 11회 침공했다. 성을 함락했거나 성주를 죽인 경우를 승리로 간주하면, 백제는 11회의 침공에서 5승을 거둔 셈이 된다. 한편, 같은 시기에 백제는 신라의 침공을 총 2회 받아 두 번 다 막아냈다. '원정경기'에서 11전 5승, '홈경기'에서 2전 2승, 도합 13전 7승을 거둔 셈이다. 이것이 무왕시대의 대(對)신라 전쟁의 성적표였다.
'어웨이 게임'에서 11전 5승을 거두었다면, 무왕시대의 성적은 괜찮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 침공해서 한 번은 상대방의 성을 빼앗거나 성주를 죽였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624년에 속함성·앵잠성·기잠성·봉잠성·기현성·혈책성을 한꺼번에 빼앗은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4번의 승리는 한두 개의 성을 획득하는 데에 그친 것들이었다. 다시 말해, 무왕시대의 백제는 신라를 케이오(KO)시킬 정도의 대승은 거두지 못한 것이다. '잽'을 수없이 먹이면서도 정작 '강펀치' 한 방을 날리지 못한 것이다.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 백제 의자왕
그런데 무왕에 뒤이어 의자왕(재위 641~660년)이 등극하면서부터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삼천궁녀' 이야기 덕분에 '한국 최고의 난봉꾼'이 된 의자왕은, <삼국사기> 권28 '의자왕 본기'에 따르면, 즉위 이듬해인 의자왕 2년(642) 음력 7월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함락하는 기념비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신라 입장에서 보면, 의자왕의 등장은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의 등장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624년의 예외만 제외하고 보통 한두 개의 성을 획득하는 데에 그쳤던 백제가 새로 즉위한 의자왕을 앞세워 신라 선덕여왕으로부터 무려 40여 성을 한꺼번에 빼앗았으니, 백제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사건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음력 7월에 이런 일이 있었으니, 곧 수확을 기대하던 신라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사건이 얼마나 허탈한 일이었는지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이 있고 나서 불과 한 달 만에 신라는 또 한 번 쇼크에 휩싸이고 말았다. 40여 성을 빼앗긴 슬픔에 잠길 겨를도 없이, 요충지 대야성을 백제에게 또 빼앗기고 만 것이다. 무왕이 재위 42년 동안에 신라로부터 빼앗지 못한 것을 의자왕은 재위 2년 만에, 그것도 한 달 사이에 빼앗아버린 것이다.
의자왕의 즉위와 함께 백제-신라 관계의 시소가 백제 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졌고 그런 속에서 대야성 전투가 발발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에, 이 전투가 '백제의 새로운 활력'을 반영하는 사건이었다는 위의 언급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동격서를 연상시키는 대야성 전투둘째, 대야성 전투는 백제 의자왕의 전략전술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선덕여왕> 제55부에 등장한 신라의 대신들은 '대야성은 난공불락'이라는 맹신 속에 "백제가 대야성을 칠 것"이라는 김유신의 경고를 묵살했다. 드라마의 이야기대로라면,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예견하지 못한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대야성의 방어능력에 대한 맹신이고, 또 하나는 김유신 견제를 둘러싼 신라 내부의 갈등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묘사된 당시의 정황을 살펴보면, 신라가 미처 대비를 하지 못한 데에는 전혀 다른 요인이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다른 요인이란 의자왕의 전략전술을 말하는 것이다.
음력 7월에 백제에게 40여 성을 빼앗긴 신라는 한 달 뒤인 음력 8월에 중대 첩보를 입수했다. 백제가 고구려와 합세하여 당항성(경기도 화성)을 침공할 것이라는 첩보였다. 당나라로 가는 바닷길의 관문인 당항성을 잃을 경우에 신라는 고립무원의 상태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첩보는 신라 조정에 일대 충격을 주는 것이었다. 한 달 전에 잃은 40여 성을 모두 합한 것보다도 당항성 하나의 가치가 더 컸는지도 모를 일이다.
상황이 이러했으므로 신라 조정의 관심은 온통 당항성에 집중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덕여왕이 당태종(재위 626~649년)에게 급히 사신을 파견한 사실은 그 같은 신라 조정의 긴박한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합세한다는 첩보를 입수했으니 신라가 그처럼 당황해하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이처럼 신라의 관심이 한반도 중부의 당항성에 집중되고 있을 때에, 뜻밖에도 백제군은 단독으로 전광석화처럼 한반도 남부의 대야성을 전격 함락했다. 당항성 방어에 정신을 쏟던 신라로서는 불의의 일격을 당한 셈이었다.
당시 고구려가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동원하려 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신라 조정이 입수한 첩보는 백제가 의도적으로 흘린 거짓 첩보였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대야성 전투는 성동격서(聲東擊西)를 연상시키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당항성을 치는 척 하면서 대야성을 쳤으니 말이다.
백제-신라 항쟁 새로운 국면 반영하는 사건이는 첩보전과 실전을 지휘한 총사령관 의자왕의 전략전술을 보여주는 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삼국과 당나라가 총출동하는 '세계대전'이 당항성에서 발발할지 모른다는 공포심을 선덕여왕의 머릿속에 주입시킨 다음에 엉뚱하게도 대야성에서 전격적인 '국지전'을 벌여 소기의 목적을 성취한 것이다.
평상시 같았으면 신라 조정도 그만한 속임수를 눈치 챌 수 있었겠지만, 불과 1개월 전에 40여 성을 빼앗겨 한창 혼란스러울 때라 그런 의도를 간파할 만한 정신적·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서기 642년 대야성 전투는 의자왕 즉위 이후의 '백제의 새로운 활력' 속에서 벌어진 사건인 동시에, 백제 총사령관 의자왕의 전략전술을 과시한 사건이었다. <선덕여왕> 제55부에서는 이 전투와 의자왕의 관계를 다루지 않았지만, 위와 같이 실제의 대야성 전투는 의자왕의 출현과 함께 변화된 백제-신라 항쟁의 새로운 국면을 반영하는 사건이었다.
백제 의자왕 때보다 인구가 훨씬 더 많았던 조선 영조(재위 1724~1776년) 때에도 궁녀의 숫자는 700명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성호 이익(1681~1763년)의 추산을 근거로 할 때에 그러하다. 그런데도 백제 의자왕이 3000명의 궁녀를 데리고 놀다가 나라를 잃었다고 하니, 그런 이야기를 믿어야 할지 어떨지 참으로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적어도 즉위 초의 의자왕은 삼국의 항쟁구도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온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그 같은 의자왕의 역량과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 중 하나가 바로 대야성 전투였다.